•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4장 한국의 묘제와 변천
  • 5. 조선시대의 묘제와 부장품
신광섭

조선시대의 묘제에 대해서는 연구도 미미할 뿐만 아니라 발굴 조사 보고서도 체계적이지 못하다. 그 이유는 묘제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데다가 고고학에서도 시기적으로 후대에 속하기 때문에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굴 조사 보고서가 있다 하더라도 고분을 발굴할 때 트렌치(trench)에 걸려 간략하게 보고된 것과 간혹 문중에서 선대의 묘를 이장하던 중 약간의 복식류나 지석 등이 출토되면 사후 신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조사가 사실상 어려웠다.137)정종수, 「조선 초기 상장 의례 연구」, 중앙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4 ; 정종수, 『역사를 움직인 풍수 이야기』, 웅진 출판, 1999 ; 김구진, 「조선 초기 왕릉 제도」, 『백산학보』 25, 1979.

조선시대의 상제는 고려시대의 민간 신앙적 요소가 강하게 담긴 무속과 불교식이 습합된 무불식 상장례에서 유교식 상장례로 바뀌었다. 이러한 상제의 변화뿐만 아니라 무덤 형태도 사각분에서 원분으로 바뀌었다. 분묘 외형 변화와 함께 묘실 내부의 축조 방법도 고려의 석실묘에서 회격묘(灰隔墓)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의 분묘는 외형이나 매장 방법에 따라 다음의 표와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외형·매장법에 따른 조선시대 분묘의 분류
분류·기준 명칭 내용
매장법 단장(單葬) 한 봉토에 유해 1구만 매장된 묘.
합장(合葬) 한 봉토 내에 부부가 함께 매장된 묘.
다장(多葬) 한 봉토 내에 3구 이상 매장된 묘.
봉분의 수 단분(單墳) 봉분이 하나만 있는 묘.
쌍분(雙墳) 한 묘역 내에 두 개로 된 묘.
족분(族墳) 한 묘역 내에 친족·문중 등 여러 개가 집단으로 있는 묘.
봉분의 형태 원분(圓墳) 봉분 형태가 둥근형의 묘.
방형분(方形墳) 봉토의 기단이 사각형으로 된 묘로, 고려시대에 많이 보이며 일부 조선 초기까지 내려온다.
유돌분(乳突墳) 봉토의 뒤편으로 꼬리를 두고 봉분을 중심으로 양쪽에 사성을 둔 형태로 꼬리묘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분묘는 품계에 따라 크기가 달랐다. 분묘의 계한(界限)이 정해지지 않은 조선 초기만 해도 서로 묘역을 광점(廣占)하려고 난리였다. 특히 풍수설에 현혹되어 길지를 선점하기 위해서 상하 구분 없이 서로 앞 다투어 싸움을 하였고, 비록 선대에 길지로 생각하여 안장하였더라도 후손이 더 나은 길지를 찾아 천장을 하였다. 부유한 집안에서는 관곽이나 문·무인석 등 묘 석물을 호화스럽게 꾸미는 것이 흔한 일이었으며, 봉분을 높이고 묘역을 넓게 하여 권위와 위세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삼았다. 이러한 묘지 광점의 폐해로 각품(各品)과 서인의 분묘의 한계와 보수 금법을 제정하여 규제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분묘는 경내에 계한(界限)을 정하여 경작과 방목을 금하는데, 종친이면 1품은 사방 100보를 한계로 하고, 2품은 90보, 3품은 80보, 4품은 70보, 5품은 60보, 6품은 50보로 하며, 일반 문무관이면 거기서 10보씩 감하고 7품 이하나 생원·진사·유음자제(有蔭子弟)는 6품과 같고, 여자는 남편의 관직을 따르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 신분에 따라 쓸 수 있는 묘역의 넓이는 표 ‘조선시대 신분별 묘역의 넓이’와 같다. 여기에서 제시한 7품 이하 서민의 묘역은 30.25㎡로서 약 10평에 지나지 않는 넓이이다. 아울러 신분에 따라 묘에 설치할 수 있는 석물(石物)의 종류와 수는 표 ‘조선시대 신분별 석물의 종류와 수’와 같다.

조선시대 신분별 묘역의 넓이
신분별 묘역의 주위 한 면의 길이 봉분의 높이
1품관 90보(64m) 22.5보(16m) 11척(3.3m)
2품관 80보(56m) 20보(14m) 10척(3m)
3품관 70보(50m) 17.5보(12.5m) 9척(2.7m)
4품관 60보(42m) 15보(10.5m) 8척(2.4m)
5품관 50보(36m) 12.5보(9m) 7척(2.1m)
6품관 40보(28m) 10보(7m) 6척(1.8m)
7품 이하 서민 30보(22m) 7.5보(5.5m) 4척(1.2m)

조선의 부장 제도는 고려에 비하여 부장품의 규모가 적을 뿐만 아니라 크기도 실물보다 작게 만들어 부장하였다. 그것은 조선의 장례 풍속이 부장품을 많이 넣지 않는 박장 풍속과 석실묘에서 회격묘로 바뀌어 무덤 안의 공간이 적어져 부장품을 넣기에 부적절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정동유(鄭東愈, 1744∼1808)는 고려와 조선 묘의 특징에 대하여, “고려는 석회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돌로 담을 쌓고 넓은 돌을 가져다 광을 덮었기 때문에 관을 내왔다가 들여 놓기를 마치 창고 안의 물품을 내었다가 넣었다가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한 부장품이 적은 것은 불교 신앙으로 내세관을 강조하던 고려에서 조선의 유교 사회로 종교 사상이 교체되면서 부장품을 적게 넣는 박장 풍속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신분별 석물의 종류와 수
신분별 석인(石人) 석호(石虎) 석양(石羊) 석마(石馬) 망주석(望柱石)
1품관 2 2 2 2 2
2품관 2 2 2 2 2
3품관   2 2 2 2
4품관   2   2 2
5품관     2 2 2
6품관 석물 없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로 자리 잡은 회격묘는 지면 아래에 광을 파고 목관을 안치한 다음 석회·황토·가는 모래를 각각 3:1:1의 비율로 섞고 느릅나무 껍질(柳皮)을 삶아 달인 물에 넣은 삼물(三物)로 관곽 주위를 다져 쌓은 후 흙으로 봉토를 한 무덤을 말한다. 관곽과 광 사이를 회격으로 다져 만든다 하여 회곽분·회곽묘라고 한다.

석실묘에서 회격묘로 바뀌게 된 것은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마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른 것으로, 그가 묻힌 광릉을 석실 대신 회격으로 하였는데, 그 후 조성된 왕릉은 모두 회격으로 하였다. 일반에서도 이를 따라 묘광을 석실에서 회격으로 축조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부장품으로 묘지와 명기를 들 수 있다. 묘지는 죽은 사람의 명자(名字), 세계, 행적, 수년(壽年), 졸장 연월일(卒葬年月日) 등의 기록을 돌이나 사기, 호(壺)나 석관 등에 직접 새겨 묻는 것으로 광지(壙地) 또는 지석이라 한다. 지석을 묘에 묻는 것은 대개 묘비를 만들어 세울 형편이 되지 않거나 묘비를 세우더라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분묘가 유실될 경우 묘주를 밝히고 피장자의 생시 행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지석에는 죽은 자의 성명, 관작, 생졸(生卒), 선휘(先諱), 자손에 대한 대략만을 적어 봉분 뒤쪽에 묻고, 사기 묘지에는 죽은 이의 경력을 상세히 적어 무덤 앞에 각각 나누어 두 곳에 묻어 분묘의 유실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판석에 피장자의 관명과 이름, 가족 관계를 새긴 지석의 형태로 묘지의 시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전한시대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묘지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만들었는데, 고구려 때 벽화 무덤인 동수묘(冬壽墓, 서기 357년)와 5세기 중엽의 모두루(牟頭婁)의 묘지가 있고, 6세기 전반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묘지가 있으며, 고려시대로 들어오면서 묘지에 명자, 세계, 행적, 생몰 연대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여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의 묘지는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재료는 개석(뚜껑)과 저편석(底片石) 두 조각을 사용하며, 내용은 뚜껑에 관직이 있으면 ‘모관모공지묘(某官某公之墓)’라 새기고, 없으면 그 사람의 자(字)를 써서 ‘모군모보(某君某甫)’라 쓴다. 저석(底石)에는 성명, 출생지, 출생 연월일, 관력 부임지, 생몰 연대, 장지, 처자, 가족 사항 등을 기록한다. 매지(埋誌)는 장삿날에 하며, 묻는 방식은 개석과 저석을 합하여 철사로 묶어서 묘광 3∼4척(90∼120㎝) 앞에 묻는다.

왕릉은 일반 민묘와 달리 현실에서 남쪽으로 7척(약 210㎝) 떨어진 곳에 5척(150㎝) 깊이로 땅을 파고 석회·황토·가는 모래를 각각 3:1:1로 섞은 삼물로 광을 만든 다음 지석 내면의 네 변을 유회로 발라서 물이 글자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그 위에 개석을 합한 후 다시 유회로 틈을 막고 동철로 묶어서 광내의 삼물 위에 안치한 뒤, 다시 삼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리고 흙으로 그 위를 채웠다.

실제 출토되는 조선시대 묘지는 석재 외에 청화백자와 흙을 벽돌처럼 만든 토제(土製) 지석이 많다. 흙과 석회를 섞거나 흙을 굳혀 만든 토제 묘지 는 조선 후기의 것이 많이 출토되는데, 그 이유는 백자 지석이나 돌로 만든 지석보다 제작이 훨씬 쉽고 간편하며 제작 기간이 짧게 걸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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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을 묻는 시기는 장일에 묻는 것이 정도(正道)이나 한식일에 묻기도 하고, 후대 길일을 택하여 묻기도 하였다. 묘지는 한 번 써서 묻으면 새로 고쳐 쓰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묻는 장소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광중에서 3, 4척 남쪽, 즉 광중과 상석(床石) 사이에 묻기도 하지만 관곽의 천회(天灰) 위에 겹쳐 놓기도 하고, 토제인 경우는 관 크기에 맞추어 상하로 배열하기도 하였다.

묘지가 분묘의 실전(失傳)을 막고 피장자의 생전 행적을 살피기 위해 묻는 것이라면 명기(明器)는 사자의 영생을 위해 묻는 것이다. 명기란 무덤 안에 시신과 함께 넣는 식기, 악기, 집기, 무기, 거마(車馬), 목각 인물상 등의 기물을 말한다. 제기가 사람의 그릇이라면 명기는 귀신의 그릇이다. 명기는 사자가 쓰는 것이기 때문에 생자가 쓸 수 없도록 소박하고 형식적으로 형태만 갖추어 만들었다. 예컨대 대나무 그릇(竹器)은 살아 있는 사람이 쓸 수 없도록 형식적으로 만들고, 와기(瓦器)는 거칠어서 광택이 없고, 목기(木器)는 새기고 다듬지 않아 소박하고, 거문고와 비파는 비록 줄을 늘여 놓아도 탈 수가 없고, 종경(鐘磬)은 있어도 순거(簨簴)가 없기 때문에 이들을 ‘명기’라 한 것이다. 즉 명기는 신명(神明)의 도로써 대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자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명기를 부장하는 습속은 일찍이 중국 은대부터 시작되었다. 상고시대로 올라갈수록 부장품은 생시에 사용하던 것을 부장하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인지가 발달하자 명기는 형식화 내지는 타성화되었고, 오히려 광중의 부장기물보다는 상설 제도 같은 능역(陵役)의 외양에 더 치중하였다. 조 선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부장기물은 조잡하고 형식화되었다.

조선 초기 국장에 사용되는 명기는 『세종실록』 「오례 흉례」에 도해와 함께 품명·수량·용량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도해로 설명한 것이 30종이고, 현궁(玄宮)에 안치되는 명기의 총수량은 81종 346개이다. 이 가운데 소(筲, 대나무 그릇)는 3되들이로서 각기 한 점씩 모두 여덟 개인데, 서(黍)·맥(麥)·양(粱)·도(稻)·마(麻)·숙(菽)·소두(小豆)·직(稷) 등 오곡과 마 등을 담았다. 옹기는 세 개인데 용량은 소(筲)와 마찬가지로 세 되로, 혜(醯) 한 개·해(醢) 한 개·설(屑, 생강과 계피가루) 한 개 등이다. 와무(瓦甒)는 두 개로 용량은 세 되이고 각각 예주(禮酒)와 청주를 담았다.

표 ‘세종의 구영릉 터 발굴 부장품의 종류와 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종의 서실에서 296점, 왕비의 동실에서 278점 등 모두 574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왕이 왕비보다 18점 더 많은 것은 왕비에게는 무기류를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의 구영릉 터 발굴 부장품의 종류와 수
현실 서실(세종 대왕 현실) 동실(소헌 왕후 현실)
명기 유별 목기류 와기류 철기류 소계 목기류 와기류 철기류 소계
신기류 35 35 - 70 35 35 - 70
악기류 27 51 - 78 23 51 - 74
악인상 41 - - 41 41 - - 41
무기류 11 - 3 14 - - - -
집기류 13 26 - 39 13 26 - 39
하인상 54 - - 54 54 - - 54
181 112 3 296 166 112 - 278

사대부와 서인의 장사에 쓰는 명기는 나무로 만드는데, 거마(車馬)·종 복(목노비)·시녀 등으로 각각 생시에 봉양하던 물건을 갖도록 하여 상징화하였다. 그 수량은 4품 이상은 30개, 5품 이하는 20개, 서민은 15개를 쓰도록 했다. 그리고 대나무로 만든 종다래끼(한 개)에 포를 담고, 대나무 그릇 다섯 개에 오곡을 담고, 옹기 세 개에는 술과 소금·젓갈을 담아 묻었다. 대나무그릇에 오곡을 넣어 매장하는 것은 사자의 식량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저승에서도 이승에서와 같이 곡신에게 풍요를 염원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았다. 곡신은 지신과 함께 나라의 중요 신으로 나라에서 사직을 세워 제사를 지내 풍년을 기원하였다.

복완(服玩)으로는 평상(牀)·장막(帳幕)·요·의자·탁자·공복(官服)·신·홀·복두 등을 명기처럼 작게 만들어 부장하였다.

이러한 명기는 조선 초기에 나무로 만들었으나 중·후기로 내려오면서 도자기 기술이 발달하여 자기로 바뀌었으며, 명기 이외에도 생시에 썼던 숟가락과 젓가락 등의 물건을 부장하기도 하였다. 명기와 복완 제도는 영조 때 일부 사치스럽고, 장난기가 섞이고, 긴요하지 않은 것 등을 이유로 규모를 축소하여 실시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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