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5장 무속과 죽음
  • 1. 우주적 생명과 인간 생명의 합일
주강현

천지 혼합(天地混合)으로 제이르자

천지 혼합을 제일릅긴

천지 혼합시 시절(時節)

하늘과 땅이 이 없어

늬 귀 쑥허여 올 때

천지가 일무꿍뒈옵데다

천지가 일무꿍뒈여올 때

개벽시(開闢時) 도업(都業)이 뒈옵데다

제주도 큰굿에서 서두에 부르는 초감제(初監祭) 첫머리 베포도업침의 한 대목이다.138)현용준, 『제주도 무속 자료 사전』, 신구 문화사, 1980, 33쪽. 제주도 큰굿은 초감제로 시작하여 천지 만물이 생성된 배경을 노래한다. 무가(巫歌)의 서두 내용을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태초 이전에는 천지가 혼합하여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없는 채 어둠의 혼돈 상태였다. 이런 혼돈에서 하늘과 땅이 갈라져서 천지가 개벽하게 되었는데, 하늘에서 아침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물 이슬이 솟아나서 음양이 상통하여 개벽이 시작되었다. 하늘은 갑자년 갑자일 갑자시에 자방(子方)으 로 열리고, 땅은 을축년 을축일 을축시에 축방(丑方)으로 열렸다. 그 후 하늘은 점점 맑아져 청색을 드리웠는데 하늘 위에도 세 하늘, 땅 위에도 세 하늘, 지하에도 세 하늘, 이렇게 삼십삼천으로 갈라지고, 땅은 애초의 백사지 땅에서 산이 생기고, 그 산에서 물이 나와 초목이 움트게 되었다.139)赤松智松·秋葉隆 , 『韓國巫俗の硏究』(上), 서울, 1937.

이렇게 인간이 사는 세상이 열리게 된 것이다. 심방은 이를 굿판에 아뢰면서 굿을 시작한다. 멀리 북쪽으로 올라가서 함경도 함흥 지방에서 큰굿을 할 때 부르는 무가에도 개벽 신화(開闢神話)가 전승된다. 일찍이 손진태(孫晉泰)가 채록(採錄)하여 『조선 신가 유편(朝鮮神歌遺篇)』에 수록한 자료들이 바로 그것이다.140)손진태, 『조선 신가 유편』, 향토 문화사, 도경, 1930. 부여 지방의 용왕굿, 제석굿에서도 우주와 지상 만물의 생성 기원을 밝혀 준다. 이들 구술사(口述史) 전통은 정교하게 분화되어 있지 않은 자연과 사회의 여러 조건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종교 주술이나 인류 기원 문제에 연류(連類)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 체계의 형성 과정을 설명해 준다.141)N. Frye, The Educated Imagination, Indiana Univ. Press, 1964. 재미있는 것은 이 같은 개벽 신화에 죽음의 문제가 함께 거론된다는 것이다.

제주도 큰굿에서 여섯 번째로 여기는 대목에 시왕맞이가 있다. 이승에 있는 여러 임금과 망자를 저승까지 데리고 갈 차사(差使)를 불러 모시고 하는 제의인데, 인간이 사후에 저승까지 편안하게 가서 새롭게 삶을 시작할 수 있게끔 기원하는 굿이다. 세상 개벽을 논하면서 인간의 죽음 문제를 병렬로 거론하는 것은 우주의 탄생과 인간의 생사 문제가 늘 함께함을 암시한다. 대상(大喪)을 치른 뒤에 행하는 무의(巫儀)인 시왕맞이를 천지개벽하는 초감제에서부터 시작함으로써 우주적 생명과 인간의 생명이 유기적임을 거론하였다. 무속의 범신론적·우주적 자연관은 인간 생명의 범신론·우주성과도 상통한다. 죽음이 단순하게 개인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생명과 연관되어 있음을 밝힘으로써 죽음의 외연적 성격이 확대된다.142)그동안 한국 무속을 분석하는 틀은 대부분 ‘민간 신앙’이란 좁은 틀로 실증적인 분석에 머무르는 감이 있었다. 그러나 좀 더 큰 틀에서 하나의 세계관이란 관점에서 무속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무속에 나타난 한국인의 생사관을 다루면서 세계관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 무속에 내재된 이와 같은 죽음의 초자연적 세계관이 거세된 이유는 무엇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이른바 근대적 사고, 즉 결과론적 으로 사회 진화론에 매몰되어 영적 유기체에 관한 핍하(乏下)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143)주강현, 『우리 문화 21세기』, 한겨레신문사, 1999.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도 ‘야생의 사고’가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서세동점(西勢東漸)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입부터 ‘근대’라는 언표(言表) 속에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비하하였으며, 우리 것은 낡은 것, 버릴 것, 없앨 것, 심지어는 나쁜 것이란 인식을 남겼다. 근대라는 전대미문의 압도적인 담론(談論) 속에서 이같이 멸시받은 과정은 ‘영성(靈性)의 문화’를 ‘물성(物性)의 문화’가 지배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우리는 영성을 상실해 갔다.

서구의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영성과 물성의 문화는 상호 대립적인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이다. 민중의 근원적인 유개념(類槪念)을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 생태계 전체까지 아우르고, 이제까지 서양인이 ‘유기물’의 반대 개념인 ‘무기물’이라고 불러온 산맥, 바위, 공기, 물, 흙, 바람까지도 하나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한국 문화사는 철저하게 물신(物神) 경도(輕度)의 문명관에 주눅이 들고 말았으니, 영성의 문화에 강조점을 찍지 않을 수 없으며, 죽음의 문제는 영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5)는 인간 주체와 자연 물질의 통일을 ‘신기(神氣)의 통(通)함’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최제우(崔濟愚, 1824∼1864)에게도 인간 주체(안에 신령함이 있다, 內有神靈)와 자연 물질(밖에 기화가 있다, 外有氣化)은 하나이다. 서양적인 물질력이 인간 주체와 자연을 소외시키기 때문에 그대로 수용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두 사람은 예리하게 알아차린 것이다. 인간 주체와 자연 물질이 소외되지 않는 일치는 새로운 질서를 요청한다. 이것을 최제우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통하여, 최한기는 자연의 변증법적 발전(大氣運化)과 사회의 변증법적 발전(統民運化)이 부단히 일치되어 나가는 자연과 사회의 변증법적 발전(天人運化)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철학적 전개의 바탕은 무속적인 세계관과 대립 하는 관계가 아니다.

우주적 생명과 인간 생명이 하나라는 무속의 세계관은 천지 합일(天地合一)이라는 오랜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앞에 인용한 초감제의 대목처럼 천지개벽하는 과정에서 인간 생명의 탄생을 노래하며, 동시에 죽음의 의례를 집행하면서 천지개벽이 서두를 장식함으로써 삶과 죽음은 유기적으로 하나로 묶인다. 한국 무속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합일주의적·유기체적 세계관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세계와 다를 바 없으며,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의 자연주의적 영성 체계와도 다를 바 없다. 예를 들어 시베리아 사하(Shaha)족의 전통적 세계관을 하나의 구체적인 실례로 살펴보면 요체는 바로 정신에 관한 것이다. 사하 사회 과학원의 사하로브(Zakharova)는 정신세계에서 어머니의 혼과 땅의 혼, 공기의 혼이 중요하다고 설명하였다. 세 차원으로 정신을 가르는 것은 바로 전통적인 중부 시베리아 사람들의 특수한 측면이라고 한다.

‘수르’라는 영혼은 에너지를 인격화한 것이다. 사하족의 샤먼 의례는 인간과 동물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정신의 현현(顯現)이다. ‘수르’에 관한 생각은 자연 철학에 기초를 둔다. 정신이 자연 현상인 땅과 공기, 모성적 기원 같은 여러 요소로 나뉘어 연결되어 있음은 환경에 대한 특수한 해석의 결과이다. 사하족 의식은 기독교에서 해석한 것과 전혀 다르게 영혼을 먼저 생각한다. 사하족은 자연에서 정보의 주요 원천을 발견한다. 자발적인 자연 철학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무형의 유산이다.

샤먼은 죽어서 새가 되어 날아간다. 여기서 영혼이 중요한데, 우주로 환원한다는 사고에는 인간이 살고 있는 땅과 공간으로서의 우주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럼으로써 삶과 죽음은 유기성을 얻는다. 우주적 생명과 인간의 생명은 유기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식의 도그마에 빠진 인간 중심의 생사관은 애초부터 없다. 나무와 바위에 영이 깃들며, 구렁이에게도 영이 깃든다. 당수나무의 베임과 바위의 폭발은 심각한 문제를 뜻하며, 업구렁이의 죽음은 고스란히 인간 세상의 일그러짐을 연상하게 한다. 민속지에서 죽음이 어떻게 현현하는지 살펴보자.

전라남도 임자도에 딸린 부남 군도에는 작은 섬마다 당(堂)이 있었다. 그 가운데 큰 당이 굴도의 당이었는데 1970년대에 마을 주민 일부가 필요 없다고 하여 당목을 베고 당을 없애 버렸다. 마을에서 당을 지극 정성으로 모신 사람이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안개가 뿌연 바닷가에서 어떤 여인이 아기를 업고 서 있었다. 누구냐고 묻자 자신은 당의 여신인데 갈 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여인은 방황하다가 끝내 자신은 죽음의 길을 떠난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마을에서는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는 일이 잦아졌고, 급기야 다시금 당을 모시자는 의견이 분분해졌다.

제보자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본인의 꿈에 현몽(現夢)한 대목이 아니라 실제로 겪은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같이 당이 소멸하면서 마을의 운수가 일그러지는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을 파괴하는 것은 신의 죽음으로 나타나며, 신의 죽음은 마을 운수가 일그러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당은 지극 정성으로 모셔야 할 대상으로 인지된다. 당을 파괴하는 것은 민속사회의 우주가 파괴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로써 영의 세계가 사라지고 인간이 죽게 된다는 것이 많은 민속지에 나와 있다. 이는 우주적 생명과 인간의 생명은 하나일 수밖에 없는 세계관에서 나온 결과물이다.144)주강현, 「한국 무속의 생사관」, 『동아시아 기층 문화에 나타난 죽음과 삶』, 한림대 인문학 연구소, 2001.

이 글의 서두에서 왜 이토록 장황하게 우주적 생명과 인간 생명의 합일을 강조하였을까? 양자의 합일을 보지 않고는, 즉 이분법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않고는 저승과 이승, 지옥과 극락, 죽음과 삶, 영혼과 육신 등 나눌 수 없는 불이(不二)의 관계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불이와 이분(二分)은 태생이 다른 것이다. 이분적 사고는 기독교 문명과 데카르트 이후의 이른바 근대적 과학관이 바탕을 이루고 있으니, 불이적 관계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무속과 죽음을 인식하는 올바른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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