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5장 무속과 죽음
  • 2. 무속적 생사관의 원형
  • 무속과 불교의 관계
주강현

사람이 죽으면 ‘타계한다’고 한다. 여기서 타계(他界)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뜻한다. 내세(來世)를 타계라 하는 것은 제2의 세계가 존재함을 암시한다. 즉 내세는 사람이 죽은 뒤에 영혼이 가서 산다고 믿는 앞으로의 세계, 곧 새로운 제2의 세계란 뜻이다. 사람들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를 이승, 죽어서 가는 새로운 세계를 저승이라고 한다. 내세는 인간의 영혼이 영원히 불멸한다는 영생을 믿는 영혼관에 따른 것이다. 내세는 지옥일 수도 있고 무속에서 내세우는 극락(極樂)일 수도 있다. 극락도 성격이 약간 복잡하여 서쪽에 있는 서방 정토(西方淨土)인 서천 서역국(西天西域國) 정도로 표현한다. 안동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바리데기’ 일부를 발췌해 본다.

나는 오구 받는 영혼 들어

내가 앞을 길을 치어서

오구 받는 영혼을

양금침 꽃밭에 시화시계(十之世界)로 인도한성

불설문(佛說門)으로 보내 줍시사

나무야 허어- 나무아미타불145)김태곤, 『황천 무가 연구』, 창우사, 1966, 203∼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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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를 천도하는 바리데기
망자를 천도하는 바리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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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에는 극락과 지옥이 있고 망인의 영혼은 죽은 뒤 명부(冥府)로 가서 명부의 십대왕(十大王) 앞을 차례로 거쳐 간다. 극락은 흔히 서천 서역국의 꽃밭으로 묘사하는데, 여기에는 다분히 불교적인 색채가 강화되어 있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불교적인 것이고 어디까지가 본디 무속적인 것인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 양자는 일찍이 융합되어 경계를 가르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것은 분명히 불교적인 맥락에서 출발하였고, 어떤 것은 무속에만 특수하게 있기 때문에 둘을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바리공주가 찾아간 저승도 도교와 불교의 색채를 함께 띠고 있으나, 본디는 멀고 이상한 세계가 아니고 ‘바로 여기, 이곳의 세계’이다. 바리데기에서 구송(口誦)하는 뒷동산은 꽃밭이다. 그 꽃밭의 꽃은 부모를 살려낸 꽃이고, 꽃밭은 부모의 넋이 영원히 살아나기를 희구하는 저승의 꽃밭이다. 그러므로 이는 재생을 상징한다. 바리 공주가 이룬 재생이 여기 이곳에서 펼쳐졌고, 저승은 우리 주위에 꽃밭으로 널려 있다. 즉 한국 무의 재생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꽃밭의 세계이다.146)조흥윤, 『한국의 샤머니즘』, 서울대 출판부, 1999, 182쪽. 극락과 지옥으로 명확하게 구분되기보다 꽃밭이라는 다소 추상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은유로 설정된 곳에서 재생이 이루어지는데, 이 대목은 무속적이라고 볼 수 있다.

제주도 큰굿에서 나오는 꽃밭은 인간의 생명 체계를 식물 체계에 유추해서 생각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견해도 있다. 서천 꽃밭이라는 특수 한 생명 원천의 신화적 공간은 이런 사고에서 생겨났다. ‘인간 생명 체계+생명 체계’로 사고하는 인식 체계는 바로 인간도 식물처럼 재생하거나 영생 또는 환생할 수 있다고 믿게 한다. 서천 꽃밭은 인간의 생명을 잉태하기도 하고(생불꽃), 죽이기도 하는(악심꽃) 꽃들이 피어 있는 신화적 공간인 꽃밭이다. 이들 서천 꽃밭은 큰굿과 큰굿의 신화를 창조한 집단이 인간의 생명 체계를 식물 체계에 비유해 생각하고, 인간 생명의 원천 장소로 형상화한 특수한 신화적 공간으로 여겨진다. 즉 이러한 사고를 기저로 형성된 것이 바로 큰굿에서 벌이는 시왕맞이제이며 여기에 나오는 저승과 지옥에 관한 내용이라고 여겨진다.147)이수자, 「저승, 이승의 투사물로서의 공간」, 『죽음이란 무엇인가』, 도서출판 창, 1990, 68쪽. 서천이라는 말은 불교의 서역에서 비롯하였고, 서천 꽃밭이 불교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꽃밭이라는 이상적·신화적 공간은 충분히 무속적인 원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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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문
지옥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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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무속에서 연출하는 지옥은 꽃밭에 비하면 매우 복잡다단(複雜多端)하다. 꽃밭이야 꽃밭 자체로 만족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곳에 관하여 구태여 구구하게 더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인간이 갖은 죄를 짓고 끌려가는 지옥은 그렇지 않다.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가는 데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지만, 고통스러운 곳으로 끌고 가려면 설명이 필요하며, 게다가 이승 사람들에게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교훈도 주어야 한다.

무가 사설(巫歌辭說)에 나타나는 지옥에는 억만지옥, 칼산지옥, 불산지옥, 독사지옥, 한빙지옥, 구렁지옥, 배암지옥, 물지옥, 흑암지옥 등이 있다. 서울 새남굿에서는 ‘칼산지옥 불산지옥/특산지옥, 한빙지옥/구렁지옥, 배암지옥/무간팔만사천 억만지옥을 넘어서니’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들 지옥은 늘 칼끝이 꽂혀 있는 산이나 불이 활활 타고 있는 산, 아니면 극심한 추위가 계속되는 지대나 뱀 이 득실거리는 토굴, 흑암(黑巖) 지대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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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끌려오는 죄인들
지옥에 끌려오는 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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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불교에 시왕(十王)이 있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즉, 지옥의 구체성은 분명히 꽃밭의 신화적 공간과 다르게 본디 무속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유추한다. 본디 지옥이란 말은 땅(地)과 감옥(獄)의 합성어로 산스크리트 ‘Naraka(奈落迦, 奈落)’를 의역한 것이다. ‘행복이 없는 곳’ 또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어두운 곳’을 가리킨다.

이곳은 인도 고대 브라만교에서 ‘선인선과(善人善果), 악인악과(惡人惡果)’에 따른 윤회관을 받아들여 상정한, 죄업에 따라 생사를 반복하는 육도(六道)인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가운데 하나로 죄의 과보(果報)를 받는 고통스러운 곳이다. 현세에서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으로, 섬부주(瞻部洲)의 땅 밑 500유순(由旬)으로서 철위산의 바깥 변두리 어두운 곳에 있고 염마(閻魔)가 다스린다고 한다. 사람은 수명이 다하여 저승사자를 따라 구만리 저승길을 가게 되는데, 이승과 저승의 혼백을 주관하는 삼라천자에게 심판을 받은 뒤 극선자(極善者)는 극락으로, 극악자(極惡者)는 지옥으로 향한다. 대부분 이곳에서 전생의 인연에 따라 사람으로 환생하거나 지옥으로 가게 된다.

지옥은 신분 귀천과 관계없이 덕행과 악행에 따라 엄격히 심판하는 곳이라 무사전(無私殿)으로 불린다. 각 지옥과 그곳을 담당할 십대왕이 있으며 망자가 소속될 지옥의 공간이 망자의 출생 간지에 따라 배치된다. 십대왕은 진광대왕 도산지옥(秦光大王刀山地獄), 초강대왕 화탕지옥(初江大王火湯地獄), 송제대왕 한빙지옥(宋帝大王寒氷地獄), 오관대왕 검수지옥(五官大王 劍樹地獄), 염라대왕 발설지옥(閻羅大王拔舌地獄), 변성대왕 독사지옥(變成大王毒蛇地獄), 태산대왕 추해지옥(泰山大王錐解地獄), 도시대왕 철상지옥(都市大王鐵床地獄), 전륜대왕 흑암지옥(轉輪大王黑闇地獄) 등이다. 여기서 염라대왕도 십왕의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옥은 그림으로 다양하게 그려졌는데 지옥도(地獄圖) 또는 지옥변상도(地獄變相圖)가 그것이다. 이러한 그림으로 전생의 악업에 따라 받는 고통의 실상을 보여 줌으로써 권선징악을 드러내어 중생을 교화하려 한다. 감로(甘露) 탱화와 시왕도(十王圖), 현왕(現王) 탱화에서도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불교적인 것이라고 믿은 신앙 체계조차도 본디 무속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제주도 시왕맞이굿이 무속 고유의 것에 불교적인 측면이 윤색(潤色)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가령 그들은 시왕 불교에서 말하는 시왕은 10명인데, 무속 자료에 나타나는 시왕은 대왕 14명과 판관 1명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무속적인 것이 불교적인 것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간주된다.

후한(後漢) 말의 기록을 보면,148)응소(應劭), 『풍속통의(風俗通義)』. 고대 우리 땅에 이미 지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서는 “황해 건너 북쪽 산에 길이 천 리나 되는 굴이 있는데, 이 지옥문 앞에 큰 복숭아나무가 있고 수문장이 지옥의 귀혼을 지키고 있다.”라고 하였다. 권선징악을 목표로 하는 지옥 신앙은 오래 전부터 사후 세계에 관한 믿음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이 근래까지 이어져서 망자를 천도하는 무속 신화에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저승이란 용어야말로 우리 조상이 죽음과 관련하여 가장 흔히 써 온 말이다. 개념적으로 따지자면 저승은 지옥의 상위에 있다. 죽음 이후의 세계인 저승에는 극락이나 지옥이 다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속에도 불교와 지옥 개념이 들어와 얼마만큼 자리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순수 한 무속적 의미로는 그것을 나름대로 적당히 변용(變容)하였으므로 지옥이란 용어를 쓰기가 곤란하다. 무에는 원래 지옥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불교가 전래된 뒤 역사적 전개로 보이지만 시베리아 샤머니즘에도 단순히 지하계라는 개념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가 기성 종교가 형성되고 극락이 설정되면서 자연스럽게 상대 개념으로 지옥이 생겨났다. 상두 소리로 보이는 황천(黃泉)도 본디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옥은 도교와 불교에서 통용되는 개념이다. 기독교의 지옥이 영원한 고통과 처벌의 세계인 반면, 도교나 불교의 지옥에는 그런 개념이 없다. 중국의 지옥에 관심을 둔 서양 학자들이 불교의 윤회전생과 시왕, 명부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시왕의 명부를 다루는 바람에 지옥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많이 잘못되었다.149)조흥윤, 앞의 책, 156∼158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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