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5장 무속과 죽음
  • 3. 죽음의 시공간
  • 죽음과 공간
주강현

첫째, 한국인의 망자의 사망 위치에 관한 고정적 개념이다.

한국인에게는 전통적으로 객사(客死) 기피증이 있다. 태어난 곳이 아니면 자신이 나쁘게 생각하는 곳에서 죽는 것은 객사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꺼리는 것이 객지에서 비명횡사(非命橫死)하는 것이다. 이런 죽음은 저승을 제대로 찾아가지 못하고 무주구천(無主九天)을 떠돌기 때문에 씻김이나 오구 등의 풀어 주는 의례로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이 강하다.

거리거리에 객사영산

총 맞구 칼 맞구 가든 영산

댕구 폭격을 맞구 가든 영산이며

전차에 기차에 마차에 자동차 택시차 세발차 치어 가던 영산이며

부스럼 뜨겨레 가든 영산이요

폐병에 가든 영산에 냉병에 가든 영산

주마창에 가든 영산이며157)『한국 무가집』 1, 집문당, 1971, 18쪽.

이 무가에서 보듯이 한 많은 영산 가운데 으뜸은 역시나 객사 귀신이다. 제명에 못 죽은 것도 억울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정주하는 공간 이외의 장소에서 죽은 망자가 제일 억울하다. 그래서 외지에서 죽더라도 망자가 동네 안산에 묻히는 것을 제일의 복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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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건지기굿
넋건지기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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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육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믿음, 즉 죽음이란 육신에서 넋이 분리되는 것이라는 믿음 체계에서는 당연히 넋의 행방이 문제가 된다. 물에 빠져 죽은 이를 위한 수망굿의 경우, 육신을 건지는 것이 급선무이기는 하지만 넋이라도 건져야 한다는 차선책이 제시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넋건지기굿을 한다. 긴 천에 병을 매달아 망자가 죽은 바다나 강에 던져두고 그 병을 건져 올려 그 안에서 머리카락 등이 올라오면 망자의 넋이 올라온 것으로 간주한다. 머리카락이 올라올 리 없겠지만 그렇게 믿는다. 육신도 중요하지만 ‘넋이라도 있고 없고’가 좀 더 중요하다.

억울하게 죽은 죽음에 관한 진혼(鎭魂) 의례는 굿의 핵심이기도 하다. 무속에서 집행하는 의례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은 역시 생사와 관련된 대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집안 재수굿을 하더라도 반드시 조상 청배(請陪)가 있으며, 조상을 잘 달래야만 굿이 제대로 끝난 것으로 여긴다. 더욱이 원령이 있는 집안의 굿에서는 조상굿이 중요하다. 영혼은 원래 죽은 뒤에 소상, 대상을 지내는 동안에 이승에 머물러 있다가 3년 탈상과 함께 저승으로 들어가는데, 원령은 3년이 지나도록 저승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면서 방황하며 자손들을 괴롭힌다. 그래서 진오귀, 오구굿, 씻김굿 등을 하여 영을 달래어서 천도해 주어야 한다. 영의 천도 과정은 살아 있는 신화가 연출 되는 통과 의례이다. 영혼을 천도하는 과정에서 혼은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이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다. 굿에서 망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잠시 환생하여 마치 살아 있을 때처럼 넋두리를 늘어 놓는다. 그리고 굿이 파하면 다시금 저승길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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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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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김굿에서는 망자의 맺힌 고(苦)를 풀어 주어 우환 근심 없이 극락으로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이 고가 풀려야만 망자의 맺힌 고가 모두 풀리고 망자가 저승길을 순탄하게 간다고 설명한다. 고가 다 풀리면 망자의 넋이 극락으로 천도하는 길을 닦아 주는데 길게 펼쳐 놓은 질베가 길이 된다. 곽머리 씻김굿에서는 방 문턱 부분에 망자의 머리가 오도록 관을 놓고 질베를 방 안쪽의 망자 발끝 부분까지 늘여서 관 뚜껑 위에 걸쳐 놓는다. 길닦음은 보통 망자를 위해 길을 닦자는 내용, 망자의 넋이 고개를 넘어 길을 가는 과정, 다리를 건너는 과정, 쉬어 가는 과정, 하직, 질베 거두기, 망자 여의기로 구성된다.158)국립 민속 박물관, 『진도 무속 현지 조사』, 1988, 44쪽. 고풀이, 씻김, 갈가름은 망자와 조령, 사령계(死靈界)와 조령계(祖靈界)의 구분 관념에 기초를 둔 의례이다. 여기서는 사령이 살아 있을 때의 죄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로지 주술적인 것에 집중되고 있다. 이런 구조는 그 기초에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할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둘째, 죽음의 공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은 역시 집 안이다.

집은 누구에게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안식을 취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태어날 때 삼신(三神)의 보호를 받으며, 집을 지을 때부터 성주의 음덕을 입고, 늘 부엌에서 조왕의 음덕을 입어 세 끼 밥을 먹고, 지신의 음덕으로 탈 없이 산다. 물론 집 안에도 조상신이 깃들어 있어 대대로 돌보아 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무덤 터를 잘 정하는 것 못지않게 집터를 잘 정하는 것도 당대발복을 위해서 중요하다. 집은 평상시에만 보호자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단계에서도 소임을 한다. 죽음 직전에 저승사자가 마을과 집으로 들어올 때 극렬하게 저항하는 신들이 있다. 집 안의 성주신이나 조왕신 같은 다양한 신격들과 자신의 생명을 점지해 준 삼신은 끝까지 저항하면서 임무를 받고 달려온 저승사자에게서 지켜 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역설적으로, 이 신들의 보호가 끝났을 때, 즉 저승사자가 이겨서 망자의 넋을 끌고 갈 때 죽음이 성립되는 방식이다. 안동 지방 오구굿 가운데 시무굿에서 저승사자가 수명이 다 된 사람을 잡으러 나오자 맨 먼저 동네 골매기 수문장이 못 잡아가게 막아서며 서낭님도 막고 나선다. 집 안으로 겨우 접어드니 조왕이 막아서고, 천신만고 끝에 겨우 대청으로 들어서니 성주님이 막고 나서며, 안방으로 들어서니 삼신할머니가 막고 나선다.

집 안은 가족적 공간이다. 따라서 상두가에서 ‘대문 밖이 저승’이란 말은 가족의 공간을 떠남으로써 이제 망인이 사회적 공간인 마을로 나감을 뜻한다. 대문 밖에서 노제(路祭)를 치르는 것은 가족 공동체와 분리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의례적 장치이다. 모든 굿의 시작과 종료도 집안 경계선인 문에서 이루어진다. 무당이 굿의 뒷전에서 문의 경계선에 칼을 던져 마무리하는 것은 영의 존재가 문이라는 경계에서 완결된다는 것을 뜻한다. 집 안에는 평소에도 문신(門神)이 있어 경계선을 말해 주며 아기가 태어나면 금줄을 쳐서 경계를 짓는다. 초상집에 저승사잣밥을 문전에 놓고, 아기가 탄생한 집 문전에 금줄을 걸쳐 놓는 것은 생사가 문을 경계로 판가름이 난다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서 집과 사당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살림집이 산 사람을 위한 공간이라면 사당은 죽은 사람을 위한 공간인데, 이는 유교적인 인식이다. 살림집 안에 사당을 건립하는 것은 죽음을 삶의 연속 아니면 동질적인 세계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당은 죽은 사람, 즉 조상의 생활공간인 것이다. 그러나 보통 집에서 신주와 사당은 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지방을 모셔 제사를 지냈다가 태우는 것으로 처리되는데, 죽음을 삶의 공간에서 인정하지 않는 비유교적인 관념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159)장철수, 앞의 글, 28∼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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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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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죽음의 공간에서 마을은 사회적 공간을 뜻한다.

상여 길은 동구를 떠남을 의미한다. 가족 공동체가 중심이 되는 초상을 집 안에서 치른다면 동네의 중요한 곳에서 치르는 노제는 망자가 사회적 공간으로 나왔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죽음의 사회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집 안의 초상치레 못지않고 대규모 노역이 필요한 곳이 마을 공간이다. 상여를 집단으로 메는 일, 마을 안산에서 대규모 산역(山役)을 마치는 일 등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개인의 죽음이 사회화되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향도(香徒) 조직을 꼽을 수 있다.

조선 전기의 향도 조직은 불교 의식과는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으나 마을 단위로 사신(祀神) 행위와 상부상조하는 장례 따위를 행하는 공동 조 직으로서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예를 당시 기사에서 많이 볼 수 있다.160)향도의 공동 노동체적 성격에 관해서는 주강현, 「조선 후기 황두 공동 노동 연구」, 『국사관 논총』 99, 국사 편찬 위원회, 2002, 101∼134쪽 참조. 향도는 가까운 평민끼리 조직한 일종의 촌계(村契)이다. 이들 향도에는 대개 술과 노래, 상부상조와 장례, 사신 행위 등이 어우러져 있다.

지금은 풍속이 날로 야박해져 있지만 오직 향도만은 아름다운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대체로 이웃의 상민(常民)들이 모두 모여서 회합하는데 적으면 7∼9명이요, 많으면 혹 100여 명이 되며 매월 돌아가면서 술을 마시고, 초상을 당한 자가 있으면 같은 향도 사람들끼리 상복, 횃불, 음식을 마련해 주거나 상여 줄을 잡아 주거나 무덤을 만들어 주며 사람들이 모두 시마복(緦麻服, 먼 친척이 입는 상복)을 입으니 이는 참으로 좋은 풍속이다.161)성현, 『용재총화』 권8.

요즘 각 도에서는 흉황(凶荒)으로 기아를 모면하기도 어려운데, 무지한 백성은 후환을 돌보지 아니하고 사신향도(祀神香徒)나 계내(契內) 등의 일로 낭비가 적지 않으니 …… 원하옵건대 금년 겨울부터 …… 금주(禁酒)시킴이 어떻겠습니까.162)『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12월 을사.

외방 백성은 부모의 장례 일에 인근 마을의 향도를 모아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조금도 애통해 하지 않는다.163)『태조실록』 권15, 태조 7년 12월 신미.

지금 마을마다 사람마다 모두 향도를 맺고 죽은 사람을 매장하니 …… 원하옵건대 지금부터 가난한 자의 장례는 모두 향도에게 맡기소서.164)『세종실록』 권22, 세종 5년 12월 정묘.

지금 경외(京外)의 양반 부녀들이 혹은 향도라 하고 혹은 신사라 하여 각기 술과 고기를 가지고 공공연히 취회(聚會)한다.165)『세종실록』 권123, 태조 31년 정월 계해.

이런 향도 같은 민간 조직을 장악하기 위한 대응책으로 나라에서는 향약법(鄕約法)을 실시한다. 향약 실시는 지배 세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향약이 전국적으로 잘 실시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양반은 자신의 권익 보호 형태를 띤 향규(鄕規)나 족계(族契) 등을 통하여 생활하였고, 상민이나 천민은 예부터 향도·계 등으로 불리는 인보(隣保) 조직을 통하여 서로 부조(扶助)하고 규검(糾檢)하는 생활을 영위하였다. 따라서 향약이 실시된 지역에 따라 향도의 외적 측면이 다소 해소되었다고 하더라도 향도의 상부상조하는 내적 기능은 그대로 이어졌다. 심지어 “이항인(里巷人)들이 향약을 맺는 것을 시속(時俗)으로 향도로 일컫는다.”166)『명종실록』 권29, 명종 18년 9월 정해.라고 하여 향약마저 향도라고 부를 정도로 향도는 당대까지 보편적인 명칭이었다. 조선 후기의 향도는 여전히 상부상조하는 과거 전통은 이어받되 촌락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축소·변질된다. 상부상조하는 일은 동일하나 지배층의 향약 실시 문제와도 밀접히 관련을 맺고, 상두꾼 조직이나 비밀 결사적 특질도 보인다. “지금 민간에는 본디 향도의 약속이 있으니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 등의 일은 또한 선유(先儒) 향약의 뜻에 그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 또 우리나라 풍속에 안으로는 서울에서부터 밖으로는 향곡(鄕曲)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린지계(洞隣之契)나 향도지회(香徒之會)가 있어 사사로이 약조(約條)를 세워 서로 검섭(檢攝)하려 합니다. 다만 각자 자기 뜻만 따르려 하므로, 엉성하고 법도가 없어 망기(網紀)를 삼아 의지하는 데에는 부족합니다.”라고 하였으니,167)유희춘, 『미암일기초(眉巖日記抄)』 4, 조선 총독부 조선사 편수회, 71∼72쪽 ; 『선조실록』 권7, 선종 6년 8월 갑자. 앞부분은 영의정 권철(權轍)의 말을 요약한 것이고, 뒷부분은 좌의정 박순(朴淳)의 말이다. 향도의 조직성이 약화된 상황을 보여 준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향도는 점차 축소·변질되었지만 상부상조하는 생활 기풍만은 잃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죽음과 마을의 관계에 결정적인 분리 현상이 나타난 것은 이른바 근대로 접어들면서부터였다. 즉, 조선 총독부가 1912년 식민지 경영의 일환으로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 규칙」(총독부령 123호)을 반포하여 매장보다 화장을 권하고 공동묘지를 권장하면서부터이다. 묘지를 인가가 없는 외진 곳, 도시 외곽 등에 설치하게 하여 묘지가 사람들의 삶의 공간과 분리되면서 묘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욱 가중시키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168)송현동, 「근대 이후 상장례 정책 변화 과정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사 민속학』 14, 한국 역사 민속학회, 2002, 208쪽. 마을 안산에 묘지가 선산 형태로 안착하여 삶의 공간인 마을 안에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생하는 관계가 끝나고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분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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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공동묘지
1920년대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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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죽음의 공간에서 가장 본질적인 영역은 역시 저승이다.

민중의 생활에서 구현되던 집 안이나 마을에서의 저승길은 막상 제의에서는 좀 더 ‘전문적’인 형태로 설명된다. ‘대문 밖이 저승’이기는 해도 저승으로 떠나가는 길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저승으로 가는 길은 심한 요철(凹凸)과 풍설(風雪), 가시 많은 나무로 이어진다. 안동 지역의 오구굿 가운데 시무굿에서 부르는 무가에는 저승 가는 길이 잘 묘사되어 있다. 시무(저승사자)가 망자의 혼을 이끌고 저승으로 들어가면 열두 대문이 나온다. 여기서 대문은 중요한 관문이다. 이때도 망자의 육신은 남고 영혼만 들어간다. ‘기밀망제 영혼묘 저승으로 들어가서’란 표현이 그 대목이다. 제주도 굿에서는 헹기못이라는 물이 있어 그곳에 빠져야만 저승의 초군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을 어떤 장소의 입구로 생각한다면, 제주도 굿에 연이어 등장하는 여러 개의 문은 이후부터 본격적인 저승임을 뜻한다.

제주도 굿에서는 저승까지의 문을 댓가지로 만들어 상징하고 심방이 노래와 춤으로써 치워 닦는다. 그 길은 매우 멀고 잡초목이 무성하여 험한 것이라 하고, 그 잡초목을 베어 넘겨 정리하는 일에서부터 고운 무명 다리를 놓는 일까지 차례로 연극적으로 실연해서 사령을 불러들인다. 이승과 저승이 수평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 사자가 청소한 길, 깨끗하게 건 다리를 건너서 방문한다고 생각하는 점 등은 무속적 타계관(他界觀)을 고찰하는 데서 주목할 만하다.

문을 통과했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무가에 따라서는 또 다른 장벽이 나타난다. 커다란 산이 나타나고 큰 강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승과 저승을 가로지르는 큰 물을 건너야만 사자의 영혼이 무사히 저승에 당도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저승에 가려면 하데스 강을 건너가야 한다. 중국 도교에서는 귀성(鬼城)으로 알려진 평두현(酆都縣) 아래에 있다고 믿어왔다.

동해안 산오구굿에서 절정은 영산맞이이다. 굿당 밖에 기둥을 두 개 세우고 용선을 달아 굿당을 장식했는데, 용선에서 굿당 안까지 길게 무명으로 연결하여 극락으로 가는 길을 만든다. 용선은 영혼이 강을 건너가는 데 사용하는 배이다. 백포(白布)의 길을 따라 굿당 안에서 바깥쪽으로 나가게 되어 있는데 백포의 길이 끝나는 곳에 용선이 달려 있고 영혼이 그 길로 가는 상징적인 의례가 행해진다. 사자는 강을 건너야 천도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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