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5권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 제5장 무속과 죽음
  • 5. 죽음의 역사 사회화
  • 죽음의 신원과 역사 사회화
주강현

씻김, 고풀이 등이 개인 차원의 해원이라면, 해원은 좀 더 사회적인 의미망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최영(崔瑩), 임경업(林慶業), 남이(南怡), 나아가서 홍경래(洪景來)나 최제우(崔濟愚)같이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게 민중은 자신의 해원을 빗대어 실천해 왔다. 즉 죽음이란 문제가 일시에 끝남이 아니라 사회성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죽음의 문제를 풀어 온 민중의 세계관이 엿보인다.

부여 은산 지방에 전해지는 별신굿은 백제 부흥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전하는 장기 지속적인 역사적 맥락을 보여 주며, 전설의 문학성과 역사성을 통하여 백제 무주고혼(無主孤魂)과 복신(福神) 등에게 바치는 추모제 형식을 갖추고 있다.191)신영명, 「백제 광복 전쟁 이야기의 구조와 의미」, 『어문논집』 26, 고려대 국어 국문학 연구회, 1986. 집단적 죽음의 신원(伸冤)이 추모제 형식의 별신굿을 통하여 역사 사회화적 의의를 지닌다. 이처럼 죽음의 신원이 갖는 의미는 대단한 장기 지속력을 확보하고 있다.

조선 후기 동학 농민 운동에서 교조(敎祖) 최제우의 신원 문제가 강력하게 대두되면서 운동성을 확보하는 데서 신원이 결코 개인의 문제에 머물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892년에 동학교단 지도부는 최시형(崔時亨)의 입의통문(立義通文)을 계기로 교조 최제우의 신원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동학교단의 급부(給付)가 최제우의 신원에 있다고 믿으면서 각지의 교도들이 복합 상소를 올리기 시작한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이윽고 죽임을 당해서 그 무리가 없어졌으나 제우가 죽은 뒤로 어리석은 백성이 더욱 미치고 혹해서, 그 자취를 신기하게 꾸미고자 하여, 혹은 칼이 받지 않았다 하고, 혹은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다 하고, 혹은 형체를 감추어 죽지 않고 현재 사람으로 살아 있다.”라고 했다.192)황현, 『동비기략초고(東匪紀略草藁)』.

사실 죽은 뒤에도 그가 살아 있다는 식의 믿음은 일찍이 홍경래의 평안도 농민 전쟁 같은 민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바 있다. 홍경래에 의탁 한 민중의 체제 개혁 바람은 홍경래가 성이 함락된 뒤 몸을 날려서 성을 빠져나갔으며 멀리 도망쳐서 그날 죽임을 당한 홍경래는 사실 가짜였다는 식으로 그가 죽지 않았다는 구전을 낳았다.193)『속조야집록(續朝野輯要)』 “定州野談以爲 景來於城壁崩壞時 飛身越城 逃遠方 當日被殺者 假景來.” 홍경래 사후에 작성된 관변 측 자료에서는 그를 흉측한 반역의 주모자로 그렸다. 홍경래를 다룬 소설 중에서도 『신미록(辛未錄)』 등은 그를 신랄하게 매도하였다. 반면에 『홍경래실기(洪景來實記)』나 『홍경래전(洪景來傳)』에서는 영웅으로 그려 민의 입장과 관의 입장이 다름을 알 수 있다.194)윤재근, 「‘홍경래전’ 연구」, 『경기 어문학』 4, 경기대 국어 국문학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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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무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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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에 왕조의 시간이 숨쉬고 있다면, 굿당에는 민중의 시간이 숨쉬고 있다. 고려의 옛 수도 개성 동남쪽에 있는 덕물산은 야트막하고 빼어난 절경도 아닌 터에 철마다 무당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봄에는 꽃맞이굿이요, 가을에는 단풍맞이굿이 열렸다. 무당은 작두를 타면서 서슬이 퍼래져서 공수를 내렸다. 왜 황해도 무당들은 덕물산을 조종(祖宗)으로 보면서 굿판을 펼쳤을까? 굿판의 민중은 돼지를 최영에게 바쳤다. 생타살, 익은타살이라고 하여 살아 있는 돼지를 비수로 얼러서 죽이고 돼지의 각을 떠서 제물로 바쳤다. 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끝나고 난 다음에는 으레 민중의 잔치인 음복(飮福)이 뒤따랐다.

최영이 신이 된 뒤로 불과 2세기 만에 신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왕조의 시간이 힘을 다한 고려 말기 이후의 최영 장군과 왕조의 허약한 힘이 적나라하게 폭로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의 임경업 장군이 조선조 민중의 신으로 부각된 것이다. 왕조의 시간이 쇠하면 민중의 시간이 되는 것일까? 양이 극을 다하면 음이 되고, 음이 극을 다하면 양이 되는 탓일까? 도대체 임경업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가 신의 반열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여기에서는 죽음의 역사 사회화 과정에 관한 하나의 전범으로써 억울 하게 죽은 임경업이 어떻게 신격화되고 의례를 통하여 현현하는지 분석하려 한다. 즉, 하나의 표본 사례로 죽음의 역사 사회화 과정을 분석해 보려 한다.195)주강현, 『조기에 관한 명상』, 한겨레신문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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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무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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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가 최영이 출생하는 시대였다면, 후기는 임경업이 출생하는 시대였다. 임경업은 조선 후기적 상황이 연출한 에너지를 보여 주면서 확고부동한 하나의 신으로 현현하였다. 풍신, 용신, 지신 등 자연신이 대부분 자연적 직관물의 상징으로서 기호화된다면, 인격신은 구체성을 띠며 민중 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역사적 힘을 부여한다. 인격신은 당대 민중 세계관의 반영물이며 민중사의 축적물로서 역사에 투영된다. 특히 임경업같이 근세로 접목되는 17세기 인물이 신격화되는 과정에는 중세 사회 민중적 세계관이 녹아 있는 것이다. 봉건적 구질서의 완전한 파괴는 주술적인 에너지의 폭발로만 가능한 것이며, 개벽의 새로운 세상은 합리와 이성으로만 실현할 수 없다고 볼 때,196)황선명, 「후천 개벽과 혁세 사상」, 『민중 종교 운동사』, 학민사, 1984. 새로운 구원자로서 신격의 출현은 곧 민중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며 새로운 구원과 희망의 근거가 된다.

20세기까지도 서해 바다 전반에 걸쳐서 임경업 장군 신화와 신앙이 분포되어 있었다. 조기잡이의 중심지였던 연평도 일대에서는 임 장군 당이 가히 ‘신앙의 메카’로 존재하였다. 연평도 당에서는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길일을 택하여 굿을 쳤다. 조기잡이를 떠나기 전, 서해안 어촌에서도 대개 임 장군을 모시고 마을굿이나 뱃고사를 올렸다. 조기잡이를 떠나서도 연평도에 가면 반드시 임 장군 당을 찾아서 가져간 백미로 떡을 해서 제사를 지냈다. 조기잡이를 끝내고 와서도 다시 정성껏 당에 고사를 올렸다. 이렇듯 임 장군 당은 서해안 각처에 흩어져 있었다.

황해도와 경기도의 구워리, 등산이,197)구워리는 구월봉, 등산이는 등산곶을 말할 것이다. 용호도, 소어청, 대어청, 백령도, 장산곶, 몽금포, 소새(큰섬), 한천, 대어섬, 어영도, 둥글섬, 방울이섬, 울도, 쑥게(덕적도), 문갑도 등에도 임 장군 당이 있었다. 옹진만의 최대 어장인 용호도 산 정상에도 산신당이 있어 해마다 임경업 장군 당제를 크게 지냈다. 연평도에서부터 장산곶을 돌아가면서 황해 도서 곳곳에 임 장군 당이 널리 분포했다는 증거이다. 심지어는 중국 대륙에까지 임 장군의 사당이 넓게 분포하였다.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백범일지』에서 이르길, ‘삼국충신임경업지비(三國忠臣林慶業之碑)’라 새긴 비석이 서 있어, 중국인이 병이 나면 이 비각에 제사 드리는 풍속이 있다고 하였다. 황해를 거점으로 한반도는 물론 중국에까지 그의 영향력이 미쳤다는 증거이다.

임경업 당은 장군의 위력에 의탁하여 행해지는 벽사진경적(辟邪進慶的) 의례이자, 생산신을 모시면서 풍어와 고깃배의 안전을 기원하는 유감주술적(有感呪術的)인 생산굿의 터전이다. 외세와의 관계에서 억울하게 죽은 임 장군에 대한 민중적 해원이 그의 죽음을 야기한 청나라와 조선의 건널목인 서해에서 조기잡이 신으로 신격화하였다는 것은 민중이 역사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신격을 형성해 나갔는가 하는 귀중한 단서이다. 그리고 그 해원은 단지 정서적·관념적 해원에 그치지 않고 어업 생산을 도와주는 민중의 벗이요, 수호신이자 생산신으로서 환원되어 갔다는 사실은 생산 대중이 지니고 있는 역사의 동력화, 즉 생산력 발전에 조응하는 탁월한 민중 정서를 엿보게 한다.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고기잡이에서도 수력, 풍력 따위의 실제적인 자연 과학의 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좀 더 분명히 알게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수신·풍신 등에 의탁했음은 당대의 낮은 생산력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채택된 임경업 당은 낮은 생산력 가운데서도 실제 조기잡이를 할 때 긴요한 어살 어업 따위의 기술력에 바탕을 둔 설화와 중선배의 공동 노동의 대동적인 일노래인 배치기에 바탕을 둔 공동체 문화의 구심점으로서 당대의 생산력 수준에 토대를 둔 제 마을 공동체 문화가 집결되었 던 공동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의 분포도 곧바로 조기잡이 어업권의 분포와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에 임경업 신앙이 황해 전체로 퍼졌을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뱃길을 통하여 빠르게 섬과 해안으로 퍼졌을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 마침 배무이 기술이 현저히 발전하였고, 이는 고기잡이배도 예외가 아니었다. ‘메카 참배’처럼 임경업 당에 인사를 올리는 계기는 이동 선단 어업을 가능하게 한 배무이 기술의 발전과 큰 배가 많아진 것에 힘입었다. 일시에 형성되는 수천 척의 선단 규모는 앞선 시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점은 일제 강점기에 왜 그렇게 연평도 당 숭배가 성황을 이루었는가에 대하여 해답을 줄 것이다. 실제 임 장군을 모시는 굿은 어떻게 하였을까?

임 장군을 모시는 개인적 의례로는 황해도의 배연신굿이 대표적이다. 이는 무당이 벌이는 뱃굿으로, 배와 선원의 안전, 풍어를 기원한다. 초기의 소박한 굿에서 출발하여, 비교적 큰 배에 대한 큰 굿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특히 조기잡이로 돈을 번 선주(船主)들과 객주(客主)들이 굿을 번성하게 하였을 것이다. “고생하는 어민을 굿판 잔치로 한껏 풀어 먹인다.”는 실리도 있었을 것이다. 옹진 지역에서는 임경업 장군을 모신 이래로 배연신굿이 시작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

임 장군은 뱃굿에 절대적으로 군림한다. 당에서는 산신과 부군님 또는 서낭님, 그리고 장군님을 같이 모시는 경우가 많은데, 황해도에서는 주로 임경업이 장군님으로 으뜸으로 모셔진다. 그래서 당을 장군당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제의 때에 장식하는 기도 장군기라고 부른다. 굿에서 장군기(참대에 장군 화상이 그려진 기를 매었음)를 들거나 봉죽(마을 사람들이 각자 서리화, 수팔련, 함박꽃 등 각종 꽃을 가지고 와서 꽂은 꽃대)을 들고 펼치는 대규모 제축(祭祝)을 펼친다. 먼저 당산맞이에서 반드시 광목에다 임경업 장군을 그린 장군기를 들고 간다. 장군기가 신을 받아야만 본 굿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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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거리에는 조기잡이를 기원하는 대목이 반영되어 있다. 소당제석거리에서 무당은 제일 큰 조기를 들어 물동이에 넣는다. 그러면 조기 머리의 방향을 보고 뱃사람들은 그쪽으로 고기잡이를 나가면 장원(고기를 제일 많이 잡는 것)하겠다고 자기네끼리 점을 친다. 영산 할아범·할맘굿에서는 그물 올리는 굿을 연출하고 끝에 가서는 그물을 펴서 바닷물에 넣었다가 고기를 퍼서 배에다 싣는 시늉을 하고 배치기를 하는 등 연극적인 굿거리로 끝난다. ‘쑹거 주는 굿’에서는 뱃사람들이 긴 무명을 양쪽에서 붙잡고 떡을 담아 쑹거를 섬기면 뱃사람들이 뒷소리를 받으며 선원과 선주가 옷자락을 벌려 복떡(고기로 간주함)을 받아 간다. 이와 같이 배연신굿은 철저하게 임경업 장군과 조기잡이에 관련된 생산 의례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굿에는 고기를 많이 잡고 안전을 비는 선주와 선원들의 바람이 어업 생산 의례로 반영되어 있다. 황해도의 해주, 옹진, 연평도 지역권 내 에서 성행했고, 특히 용호도, 육섬, 까막깨, 개머리 등이 주를 이룬 지역인데, 바로 조기 생산을 기원하는 생활 현장의 생산 의례로서 배연신굿이 성립되어 나갔고, 임경업 장군을 의례의 주신 격으로 정착시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임 장군에 대한 당대 민중의 해원이 단지 정서적·관념적 해원에서 그치지 않고, 어업 생산을 도와주는 민중의 벗이요 수호신이자 생산신으로 환원되어 갔다는 사실에서 죽음의 역사 사회화 과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생산 대중이 지니고 있는 역사의 동력화, 즉 생산력 발전에 조응하는 탁월한 민중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임 장군에 대한 신격화는 칠산 바다에서부터 신의주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서해안 일대에 걸쳐 조기의 신으로서 강력하게 자리매김한 것이며, 의례는 바로 이를 표출하는 구체적인 통로인 셈이다. 민중은 의례를 통하여 죽음의 사회적 의미를 재인식하고, 이를 집단적인 의례로 전승한 셈이다.198)이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80년대에 널리 행해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민중 열사 진혼굿 같은 유형의 현대적 민속이 의미하는 담론의 핵심도 이 같은 해원의 사회화 과정이 여전히 이어짐을 뜻한다. 오늘날에도 어떠한 특정한 죽음은 늘 사회적인 문제로 다가오며, 이 같은 사회화 과정에 대한 한국인의 보편적인 인식은 현대적 삶을 사는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는 셈이다.

억울하게 죽은 자만이 신이 된다. ‘억울하게 죽은 자’가 ‘억울한 자’를 구원한다는 집단적 해원이 신을 요청한다. 해원의 역사화, 그것도 집단적 역사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최영이나 중국의 관운장처럼 비명횡사한 장군들이 공통적으로 당대의 민중에게 힘을 주는 신격으로 모셔졌다는 것은 곧 민중의 한풀이가 신의 현현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인격신이 출현하는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지배 이데올로기의 왕권을 중심으로 출현하는 형태 : 민왕, 뒤주 대왕, 강화 도령신, 태조 대왕신 등

② 왕권 개념에 부수된 형태로 출현하는 형태 : 송씨 부인, 내전신, 왕녀신, 중전마마신, 정전부인신, 공주신, 바리 공주신, 칠공주신 등

③ 무장적 반대 급부로 출현하는 형태 : 임경업, 남이, 최영, 유충렬, 양 장군, 홍 장군, 마 장군, 조 장군, 김유신 등

④ 무조신(巫祖神)으로 출현하는 형태 : 삼멩두, 작도대신, 창부신, 만신 할머니 등

⑤ 마을 공동체의 신격, 즉 인격신이 마을의 신격으로 출현하는 형태 : 곪기나 당산신 등으로 출현하는 경우199)주강현, 「서해안 조기잡이와 어업 생산 풍습」, 『역사 민속학』 1, 1991, 93쪽.

임경업의 신격화 역시 해원의 패러다임에서 한발도 벗어나질 않았다. 그는 ③에 해당된다. 따지고 보면 그도 별반 잘한 일이 없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불완전한 인물이었기에 신이 되지 않았을까. 고전 소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200)『청구야담』 권4, 임장군산중우녹림(林將軍山中遇綠林).

당신의 담력과 용맹도 가히 쓸 만한 재목이라 할 것이오. 허나 한번 세상에 나가면 장차 반쯤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사람이 될 것이라, 천운의 소관이매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덧없이 수고로울 뿐이오.

임경업은 그렇듯 불안전한 사람이었다. 민중은 영웅을 완벽하게 묘사하기도 좋아하지만, 오히려 사람의 허점을 좋아하는가 보다. 이미 떨어질 것으로 예정되었으니 신화의 시간으로 접어들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전쟁이 끝나고 시대는 변하였다. 국토와 민생을 유린당한 조선 왕조는 더는 백성의 하늘일 수 없었다. 조선 전기의 민중이 최영을 신으로 받아들였듯이, 이제 민중은 또 하나의 ‘스타’를 요구하였다. 비명횡사한 임경업이 이제 신으로 모셔지기 시작했다. 왕조의 시간과 민중의 시간이 전혀 달랐던 탓이다. 그렇다면 영웅의 조건은 무엇일까? 신이(神異)한 출생, 간난(艱難)의 고통, 시기와 질투, 모험과 반역의 세월, 비참한 최후 ……. 임경업은 그런 조건에 부합되었을까? 소설 『임경업전』이 장안의 지가(紙價)를 올리게 된다. 소설에서 임금의 꿈에 경업이 나타난다.

“흉적(凶賊) 김자점이 소신을 박살하고 찬역(簒逆)할 꿈을 품어 거의 일이 되어 가오니, 바삐 죽이소서.” 하며 울며 가거늘, 상이 놀라 깨니 경업이 앞에 있는 듯한지라. 슬픔을 이기지 못하시더니, 날이 밝으매 김자점을 올려 엄형(嚴刑) 국문(鞠問)하시니, 자점이 복초(服招)하여 전후 역심(逆心)을 개개 승복하거늘, 상이 대로하사 “자점의 삼족을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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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장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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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업의 자식들은 장군의 영위를 배설하고, 비수를 들어 김자점의 배를 갈라 오장을 끊고 간을 내어놓고 축문을 지어 임공영위(林公靈位)에 고하고, 다시 칼을 들어 흉적을 점점이 저며 씹으며, 흉적의 남은 시신을 장안 백성이 점점이 저미고 깎아 맛보며 뼈를 돌로 짓빻아 꾸짖는다. 김자점은 드디어 ‘살을 뜯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되어 있다.201)『임장군전』보다 앞 시기에 출현한 『박씨전』에서 이미 김자점은 주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그날 밤에 임금에게 임 장군이 나타나는데 학을 타고 온다.

신의 원사(冤死)함을 신원치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할까 하옵더니, 오늘날 전하의 대덕으로 신의 원수를 갚아 주시고 역적을 소멸하시니, 신이 비로소 눈을 감겠나이다.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는 임경업을 사칭한 자도 등장한다. 어떤 자가 임경업의 이름을 빌려 오랑캐를 치겠노라고 소문을 냈다. 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는데, 그가 진짜 임경업이 아닌 줄 알고 나서는 모두 흩어졌다. 임경업이 결코 죽지 않았다는 헛소문이 나돌았다는 반증이다. 마치 홍경래가 죽고 난 다음에 다시 살아나서 진인(眞人)으로 재출현했다는 소문이 나돈 것과 같다. 민중은 그가 ‘재림 예수’가 되기를 원했을까? 이제 임경업이 신의 반열에 오를 시간이 되었다. 신으로 현현은 어떤 필연성이 있었을까?

임경업이 신이 된 이유는 절묘한 당대의 정치적 소산이다. 당대 민중은 『박씨전』 등의 소설을 통하여 이미 김자점에 대한 격렬한 저항, 임 장군 에게 격정적으로 의탁하는 분위기였다. 신원은 어디까지나 사후의 공식적인 보증수표일 뿐이었다. 더욱이 송시열(宋時烈)은 국가에서 신원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임장군전』을 썼다. 그는 “내가 임 장군의 가전을 읽고 감명 받은 바 있어서 전을 지었다.”라고 하였다.202)신원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인조가 임경업의 죽음과는 무관하다는 지도층 나름의 전술적 배려도 있는 것이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대중의 투사 심리와 지배 계급의 ‘충효 선전 작업’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와서 봉건 지배층은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봉건 제도가 약화되는 것을 막고 봉건적 제도와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 하였다. 충신, 열녀, 효자, 효부에 대한 정려(旌閭)와 표창(表彰)도 이의 방편이었다. 임경업은 봉건적 충군 사상의 상징이 되도록 배려되었다. 신원은 몇 가지 경로를 거쳐서 준비된 것 같다.

첫째, 민중 자신의 선택이다. 임금과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최선임을 알았고 또 그렇게 한평생 살아왔는데 결국 타인의 모함에 빠져 죄인으로 처형된 억울함, 어수선한 국내외 정세에서 강직한 성격으로 자신의 책임을 충실하게 수행하여 왔지만 항상 여건이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에 무인으로 자기가 갖고 있는 탁월한 능력을 한 번도 시원하게 발휘하지 못한 점 등이 일반 민중에게 해원의 필요성으로 제기되었다.

외세의 침입으로 최대의 고통을 받은 자는 당시의 백성이었다. 전후 처리 과정의 외세 압박에서도 백성에게 집중적인 착취가 가해졌다. 백성은 무언가 강력한 힘을 원하였다. 그에 대한 터무니없을 정도로 과장되고 지나치게 윤색된 뛰어난 묘술 등이 사실과 다른데도 일단 설화로 정착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힘을 발휘하면서 민중을 감동시켜 나갔다.

둘째, 국가 정책적인 신원을 임금이 공인하자, 복권된 임경업에 대한 찬양과 고무가 역으로 민중에게 전화된다. 민중 사이에서 임 장군이 영웅화되는 과정에서 뒤늦게 복권이란 사후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봉건 지배층의 충효 선전책과 맞아떨어진다. 화려한 만남이라고나 할까.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 임경업의 실체와 신격화된 임경업의 모습에는 차이가 나는데도 민중은 그를 애국과 비애국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전자를 택하였다. 파란만장한 반외세 투쟁, 수포로 돌아간 북벌 의지, 당파 세력에게 고문으로 죽임을 당한 비참한 죽음 따위는 신격화로써 다시 생명을 얻었다. 그리하여 임경업은 민중에게 힘을 주는 무사로 되살아났다. 민중은 억울한 죽음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임 장군을 신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에203)『열하일기(熱河日記)』 도강록(渡江錄). 관제묘(關帝廟)를 구경하는 대목이 나온다. 연암의 시대에 『임장군전』이 당대의 ‘베스트셀러’였음을 알려 주는 대목이다.

묘에 구경꾼이 수두룩한데 한 군데서 『수호전(水滸傳)』을 앉아서 내리읽는데 여럿이 빙 둘러싸고는 듣고 있었다. 분명 읽기는 『수호전』인데 이야기꾼이 들고 있는 책은 『서상기(西廂記)』이다. 고무래 정 자도 못 알아보면서 입으로는 청산유수이다. 흡사 우리나라에서 『임장군전』을 외우는 것과 같았다.204)『열하일기』 관제묘기(關帝廟記).

이상의 임경업 장군의 신격화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듯 죽음의 역사 사회화 과정은 한국의 문화사에서 아주 강인한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물론 망자를 매개로 이를 역사 사회화하는 방략(方略)은 모든 민족에게 나타난다. 그러나 단순하게 역사 사회화하는 방략과 신의 반열로 끌어올려 신앙 차원으로 모시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러한 점에서 임경업을 비롯하여 최영같이 비명횡사한 사람들이 무속에서 신으로 존재함은 매우 깊은 의미망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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