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1장 전통 연희의 전반적 성격
  • 2. 전통 연희의 종류와 외국과의 교류 양상
  • 괴뢰희
전경욱

괴뢰희는 인형극이다. 중국의 괴뢰는 춘추시대에 나무를 사람 모양으로 깎아 노예 대신 순장한 풍습에서 유래되었다. 처음에 괴뢰희는 장례 때 상가(喪家)에서 연행하던 것이었으나, 즐거운 잔치에서 괴뢰희를 연행한 것은 한대 말부터다. 송대에는 괴뢰희가 매우 발달하여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공연장에서 중요한 공연 종목이 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인형극이 매우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기록에서는 고구려의 인형극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나, 중국의 여러 기록에서는 고구려의 인형극에 관한 내용이 발견된다.

대체로 산악잡희에는 환술이 많은데 모두 서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뛰어난 환인(幻人)이 중국에 옴에 따라 시작되었는데, 한나라 안제(安帝, 즉위 106년) 때 천축에서 바친 기예이다. …… 굴뢰자는 괴뢰자(魁礧子)라고도 한다. 인형(偶人)을 만들어 연희했는데 가무를 잘했다. 본래는 상가(喪家)의 음악이었지만 한나라 말에 비로소 가회(嘉會, 즐거운 연회)에서 사용되었다. 북제(北齊)의 후주인 고위(高緯, 즉위 565년)가 이것을 몹시 좋아했다. 고구려에도 인형극이 있었다. 현재 민간에서 성행하고 있다.3)두우, 『통전(通典)』, 굴뢰자(窟礧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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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풍속도의 박첨지놀음하는 모양
기산풍속도의 박첨지놀음하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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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을 통해 인형극도 산악잡희의 한 종목이었고, 고구려에서 독자적인 인형극이 전승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 본 당나라 두우의 『통전』(801) 외에도 『구당서』와 송나라 진양의 『악서(樂書)』(12세기 초)에서도 고구려의 인형극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송나라 마단림의 『문헌통고(文獻通考)』(1319)에는 당나라 이적이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황제에게 인형극을 진상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인형극은 고구려의 자생적 연희 전통 속에서 생겨난 것이거나 서역에서 유래된 인형극이 고구려에서 한층 발전된 것으로, 고구려의 인형극이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인형극을 보고 한시 「부답병서(復答幷序)」와 「관롱환유작(觀弄幻有作)」을 지었다. 이색의 한시 「구나행」에 “누런 개는 방아 찧고 용은 여의주를 다투며”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인형극을 묘사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의 인형극은 성현(成俔, 1439∼1504)의 「관나희(觀儺戲)」와 「관괴뢰잡희(觀傀儡雜戲)」, 박승 임(朴承任, 1517∼1586)의 「괴뢰붕(傀儡棚)」, 나식(羅湜, 1498∼1546)의 「괴뢰부(傀儡賦)」,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의 「남성관희자(南城觀戲子)」 등의 한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유랑 예인 집단인 남사당패는 풍물(농악),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가면극), 덜미(꼭두각시놀음) 등 여섯 가지 연희를 가지고 각처로 돌아다니며 공연하였다. 남사당패의 연희는 중요 무형 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지금도 전승되고 있는데, 꼭두각시놀음이 바로 인형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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