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1장 전통 연희의 전반적 성격
  • 2. 전통 연희의 종류와 외국과의 교류 양상
  • 가무희
전경욱

가무희는 노래와 춤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다. 한대의 화상석에서 이미 칠반무(七盤舞)·반고무(盤鼓舞)·건무(巾舞)·파유무(巴渝舞) 등의 가무희가 발견되었다. 한대의 동해황공(東海黃公)은 춤과 노래로 진행된 가무희다. 남북조시대에는 난릉왕입진곡(蘭陵王入陣曲)·발두(鉢頭·撥頭)·답요랑(踏搖娘) 등의 가무희가 있었다.

중국에서 산악·백희의 영향으로 동해황공, 답요랑 등 산악·백희 계통의 자생적인 가무희가 생겨났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처용무(處容舞)·황창무(黃昌舞) 등 산악·백희 계통의 자생적인 가무희가 생겨났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산악·백희가 한나라와 위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역에서 유입되기 시작하여 수·당나라를 통하여 계속 흘러 들어왔고, 특히 남북조시대에 많이 전래했지만 한나라 이전에도 이미 중국에 산악·백희와 같은 종목의 연희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한 무제가 서역을 개척한 이후 서역에서 전래한 산악·백희가 일방적으로 중국의 산악·백희를 성립시킨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먼저 우희를 예로 들면, 우희는 서역에서 전래된 연희가 아니라 중국에서 자생한 전통 연희다.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국어(國語)』 「정어(鄭語)」에 보이는데, 기원전 774년 서주(西周) 유왕(幽王)의 궁정에 난장이와 꼽추가 배우로 있었다고 한다. 서역에서 산악·백희가 전래하기 수백 년 전부터 이미 골계희인 우희가 전문 배우에 의해 공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인형극인 괴뢰희도 춘추시대에 나무를 사람 모양으로 깎아 노예 대신 순장한 풍습에서 유래하였다. 본래 괴뢰희를 장례 때 상가에서 연행하던 사실은 서역에서 괴뢰희가 전래하기 이전에 이미 중국에 인형극의 전통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가무희도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한대와 남북조시대에 중국 자생의 전 통적인 가무희가 있었다. 그러므로 가무희가 모두 서역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후대에는 서역에서 많은 가무희가 들어왔다. 당나라 문인 단안절(段安節)의 『악부잡록(樂府雜錄)』에서는 호풍(胡風)이 성하던 당대에 성행한 악무로 건무(健舞), 연무(軟舞), 자무(字舞), 화무(花舞), 마무(馬舞)를 소개하고 있다. 이 중 건무에는 능대(稜大)·아연(阿連)·자지(柘枝)·검기(劍器)·호선(胡旋)·호등(胡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 자지·호선·호등은 이란풍의 무용이다. 강국기(康國伎)·미국기(米國伎)·식닉기(識匿伎)에도 ‘호선녀무(胡旋女舞)’가 보인다. 이 춤은 원래 서역에서 기원하였는데, 강국·미국·식닉 등 소그드(Soghd) 여러 나라의 춤이었다.

그리고 산악·백희의 곡예 종목에 해당하는 강정, 무륜, 줄타기, 농환, 농검, 물구나무서기, 마희, 동물 재주 부리기 등도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유사한 연희가 존재하였다. 여기서는 농환, 농검, 나무다리 걷기, 강정을 통해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중국 자체에 산악·백희의 곡예 종목이 존재했음에 대해 살펴보자.

방울받기 하면 으레 의료(宜僚)를 떠올린다. 우리나라에서도 최치원의 「향악잡영」 5수 등 여러 기록에서 방울받기를 묘사할 때 의료를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의료는 초 장왕(楚莊王, 재위 기원전 613∼591) 때의 사람이다. 『장자(莊子)』 주(註)에 “의료는 초나라의 용사다. 방울받기를 잘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양 무제(梁武帝)의 『천자문(千字文)』 주에 “의료는 초나라 사람이다. 농환을 잘 하였다. 여덟 개는 공중에 있고, 한 개는 손에 있었다. 요즈음의 농령이 이것이다.”라는 기록도 있다.

의료보다 약 1세기 후인 송 원공(宋元公, 재위 기원전 531∼517) 때 칼을 여러 개 공중에 던졌다가 받는 농검이 있었다. 『열자(列子)』 「설부(說符)」에 “춘추시대 송나라에 난자(蘭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재주를 가지고 송 원공에게 잘 보이고자 하였다. 송 원공이 불러서 재주를 보이도록 하니, 자기 키의 두 배나 되는 긴 막대기 두 개를 양쪽 발에 묶고 위로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였다. 일곱 개의 칼을 번갈아 던지며 놀았는데, 칼 다섯 개는 항상 공중에 있었다. 송 원공이 크게 놀라 즉시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난자는 이미 춘추시대에 일곱 개의 칼로 농검을 했고, 양발에 긴 막대를 묶고 걸어 다니는 나무다리 걷기도 한 것이다.

무거운 솥을 들어 올리는 연희인 강정은 이미 기원전 306년경 진나라의 연희에 존재했다. 『사기』 「진본기(秦本紀)」에 따르면, 무왕(武王)은 힘이 세고 놀이를 좋아하였다. 역사(力士)인 임비(任鄙), 오획(烏獲), 맹열(孟說)은 모두 높은 관직에 올랐다. 왕은 맹열과 강정을 하다가 다리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한나라 때 서역에서 산악이 전래하기 전에 이미 강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서역으로부터 산악·백희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전인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우희, 농환, 농검, 나무다리 걷기, 강정 등의 연희 종목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연희사나 일본 연희사에서 산악·백희를 논할 때는 으레 한대에 서역으로부터 전래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한대에는 춘추전국시대에 존재하던 일부 종목과 공통되는 연희 이외에도 새롭고 수준 높은 다양한 산악·백희의 종목이 서역인에 의해 전래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나라 왕단(王漙)의 『당회요(唐會要)』 산악(散樂) 조에 “한 무제 때부터 환기(幻技)가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듯이, 이때 유입된 새로운 연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환술이다.

둘째, 기존에 존재하던 연희 종목도 서역의 뛰어난 연희자가 공연하는 수준 높은 연희의 영향으로 더욱 발전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구나무서기나 솟대타기 같은 종목은 중국뿐 아니라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자생적으로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는 연희다. 그런데 서역에서 전래한 물구나무서기나 솟대타기는 안식오안이나 도로심장처럼 수준 높은 고난도의 연희이기 때문에, 기존의 물구나무서기나 솟대타기를 대신해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셋째, 중국의 전통적인 연희 종목인 농환과 농검은 서역에서 전래한 농 환, 농검과 자연스럽게 결합하면서 더욱 발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에는 단순히 곡예적인 묘기를 보이던 연희에서 진일보하여 음악 반주에 맞추어 공연하는 등 연희의 내용을 다양하게 발전시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중국 한대의 화상석이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는 악기 연주에 맞추어 곡예 종목을 연희하고 있는 장면이 발견되었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 중국과 서역에서 산악·백희가 전래하기 이전부터 고유의 산악·백희 종목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롭고 수준 높은 산악·백희의 종목이 중국과 서역으로부터 다수 유입됨으로써 기존에 존재하던 연희 종목도 중국과 서역의 뛰어난 연희자가 공연하는 수준 높은 연희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했을 것이다.

고구려기는 중국 수나라의 칠부기와 구부기에 들어 있었고, 백제기와 신라기는 칠부기 외의 외국악(外國樂)으로 존재하였다. 이어 고구려기는 당나라의 십부기에도 들었고, 백제기는 십부기 외의 외국악으로 존재하였다. 『구당서』에 따르면, 고구려악은 당나라 초에 가장 풍성했고, 무태후(武太后) 때도 25곡(曲)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삼국악은 이미 수나라 이전부터 중국에 전해졌고, 수준도 상당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의 악(樂)은 오늘날처럼 단순히 음악만을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라 춤·노래·연희 등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쓰였다.

또한 고구려는 서역계의 악기와 가면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백제악(百濟樂)·신라악(新羅樂)이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고려악(高麗樂, 고마가쿠)이라는 명칭으로 전래되었다. 여기서 고려악은 고구려악(高句麗樂)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5세기 중엽에서 9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 신라악·백제악·고구려악의 순서로 전래되어 병립했으나, 9세기 중엽에 이르러 외래 악무(外來樂舞)를 정리할 때 당나라와 천축(인도) 등의 악무를 좌방악(左方樂)이라 하고, 삼국 및 발해의 악무를 우방악(右方樂)이라고 불렀다. 우방악은 일명 고려악이라 하여 고구려악이 삼국악의 총칭으로 불렸 다. 고구려악은 24곡이었는데, 이 가운데 신도리소(新鳥蘇)·고도리소(古鳥蘇)·신소도쿠(進走禿)·다이소도쿠(退走禿)·나소리(納曾利)·소리고(蘇利古)·곤론핫센(崑崙八仙)·고도쿠라쿠(胡德樂)·오닌데이(皇仁庭)·기도쿠(貴德)·아야기리(綾切)·지큐(地久) 등 12곡은 가면무악(假面舞樂)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만 가면을 쓴 인물들이 보일 뿐, 가면극 연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헌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의 문헌에는 이와 같이 고구려 등 삼국의 가면희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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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함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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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후기(日本後紀)』(841)에 따르면, 일본 조정에 파견된 고구려 악사 네 명은 군후(軍篌, 거문고)·막목(莫目, 피리)·횡적(橫笛, 젓대) 등 고구려 악기와 고구려 춤을 가르쳤고, 백제 악사 네 명도 군후·막목·횡적 및 백제 춤을 가르쳤으며, 신라 악사 두 명은 가야금과 신라 춤을 가르쳤다고 한다.

삼국시대에 전래한 산악·백희의 종목은 이후 우리나라에서 더욱 발전하여 중국과 일본에 영향을 줌으로써 명실 공히 연희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국적 변용을 통해 토착화되면서 조선 후기에 이르면 본산대놀이 가면극, 꼭두각시놀이, 판소리 등 발전된 양식의 연극적 갈래를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과정에서 황창무, 처용무 등 자생적 연희도 생겨났다. 이러한 자생적 전통의 연희는 후대에 마을굿 계통 가면극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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