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1장 전통 연희의 전반적 성격
  • 3. 전통 연희의 역사적 전개
  • 삼국시대
전경욱

고구려·백제·신라는 중국과 서역의 악을 받아들여 우리의 예술 생활을 풍부하게 하였다. 한 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하여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때부터 한반도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부르는 외래 기원의 연희가 서역과 중국에서 유입되었다. 특히 서역악은 중국을 통해서도 받아들였지만 서역과 직접 교류를 통해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는 예도 있다.

고구려에서는 고분의 벽화에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연희를 많이 그렸는데, 이 고분들의 연대는 3세기 중엽부터 5세기 중엽 사이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악이 수나라 개황(開皇, 581∼600) 초에 칠부기 가운데 하나로 중국 문헌에 나타나기 이전부터 이미 고구려에서 산악·백희가 성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북주(北周, 557∼580) 때 서역악을 채용했는데,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이미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서역 전래의 산악·백희가 그려져 있었다.

중국 문헌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고구려의 중국 연희 수용은 다음과 같다.

(가) 순제 영화 원년(136) 그 왕(부여왕)이 조회하러 경사에 왔다. 황제가 황문(내시)으로 하여금 악기를 연주하고 각저희(角抵戲)를 놀게 한 다음 부여왕을 보냈다.11)『후한서』 권85, 동이열전75, 부여.

(나) 한나라 때 악사와 연희자를 (고구려에) 하사하였다.12)『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30, 동이전, 고구려.

(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에 속하게 하고, 악사와 연희자를 하사하였다.13)『후한서』 권85, 동이열전75, 고구려.

(가)에서 각저희는 산악·백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듯하다. 한대(漢代)에는 각저희를 씨름에만 국한하여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산악·백희 일반을 지칭할 때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나)와 (다)는 동일한 내용을 다룬 기록이다. (나)에서는 악사와 연희자를 고취(鼓吹)와 기인(技人)으로 표기했고, 한나라가 이들을 고구려에 보낸 시기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다)에서는 한나라에서 이들을 고구려에 보낸 시기를 무제 때라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 고구려에 중국 산악·백희의 영향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악은 오현과 필률 같은 서역 악기를 먼저 수용했기 때문에 백제 악이나 신라악보다 우월하여 수나라의 구부기에 들 수 있었다. 4세기 중엽의 무덤인 안악 3호 고분의 행렬도에는 관악기로 긴저(장적)·뿔나팔·작은 뿔나팔·배소, 현악기로 완함·현금, 타악기로 세운 북·말북·메는 북·메는 종·요·흔들 북·손북·소 등이 있어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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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 3호분의 행렬도
안악 3호분의 행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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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나무다리 걷기(수산리 고분, 팔청리 고분), 농환(장천 1호분, 약수리 고분, 수산리 고분, 팔청리 고분), 무륜(수산리 고분, 장천 1호분), 마상재(약수리 고분, 팔청리 고분), 칼 재주 부리기(팔청리 고분, 안악 3호분의 행렬도), 씨름(각저총, 장천 1호분), 수박희(무용총, 안악 3호분) 등 곡예에 해당하는 연희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가면희(안악 3호분) 등 연극적 놀이와 원숭이 재주 부리기(장천 1호분) 같은 동물 곡예 등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연희가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안악 3호분의 후실 벽화에는 외국 출신으로 보이는 춤꾼이 가면을 착 용하고 있다. 세 명이 각각 긴 퉁소, 완함(비파의 한 종류), 거문고를 연주하는 가운데 한 명이 탈춤을 추는 그림이다. 춤추는 인물이 쓰고 있는 붉은색 물방울무늬 머리쓰개가 이국적이다. 이 인물은 코가 큰 탈을 썼으며, 다리를 X자형으로 꼬고 손뼉을 치는 듯한 자세로 춤을 추고 있다. 이 ‘꼰 발 춤사위’는 인도와 서역계의 춤 동작으로 우리나라 춤에는 없는 것이며, 모자 역시 인도계 터번이다. 그러므로 이 인물은 외국계 무용수이거나 외국인으로 가면 분장하고 서역계의 춤을 추는 우리 무용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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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리 고분의 곡예도
수산리 고분의 곡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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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 3호분의 가면희
안악 3호분의 가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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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십부기 중 고구려기에 호선무(胡旋舞)와 광수무(廣袖舞)가 들어 있다. 이 두 춤은 모두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발견되었다. 호선무는 원래 서역에서 기원한 춤으로 강국·미국·식닉 등 소그드 여러 나라의 춤이었다. 강국악은 속칭 호선무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신당서(新唐書)』 「예악지(禮樂志)」에서 고구려의 호선무는 놀이꾼이 큰 공 위에 서서 바람같이 빨리 도는 놀이라고 하였다.14)『신당서(新唐書)』 권21, 예악지, 구부기. 고산동 10호 고분에는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춤을 추는 모습을 그려 놓았는데, 이는 호선무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서(隋書)』 「음악지(音樂志)」에는 “고구려의 가곡(歌曲)에는 지서(芝栖)가 있고, 무곡(舞曲)에는 가지서(歌芝栖)가 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서역의 안국악에 가지서와 무지서(舞芝栖)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의 지서와 가지서도 서역 계통의 가무로 추정된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산악·백희의 한 종목인 인형극도 매우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서』 「동이전」에 백제기로 투호(投壺, 병 속에 화살 넣기), 위기(圍碁, 바둑), 저포(樗蒲, 윷놀이의 일종), 악삭(握槊, 주사위놀이인 쌍륙)과 농주지희(弄珠之戲, 방울받기)를 들고 있다.

한편 백제인 미마지가 중국 남조 오에서 배워 612년 일본에 전하였다는 기악이 있다. 기악의 내용은 일본 문헌인 『교훈초(敎訓抄)』(1233)에 소개되어 있는데, 이는 절에서 불사(佛事) 공양의 무곡(舞曲)으로 연출되던 교훈극으로서 묵극(默劇)이었다. 그러므로 기악의 존재를 통해 볼 때 백제에도 연희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연희로는 가무백희·황창무·농환·사자무(獅子舞)·무애희(無㝵戲)·입호무·신라박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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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호무
입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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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무백희는 중국의 산악 또는 백희와 통할 수 있는 용어다. 가무백희라는 용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왕 9년(32)조에 처음 나타난다. 그리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551년(진흥왕 12)에 처음 설치한 팔관회에서 가무백희를 놀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황창무는 가면을 쓰고 춤추는 검무로서, 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官昌)이 계백 장군에게 살해된 사실을 전설 화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칼춤 또는 칼 재주 부리기는 이미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나오는 산악·백희의 일종이다. 황창무는 칼 재주 부리기가 고사와 결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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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 장식 목 항아리
토우 장식 목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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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가야국 가실왕(嘉實王)의 명으로 우륵(于勒)이 12곡을 지었는데, 가야국에 난리가 나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 귀화하였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사(達巳),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상기물(上奇物)이다.

이 가운데 세 번째 곡인 보기는 방울받기인 농환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덟 번째 곡에 사자기가 있는 점으로 보아 사자춤도 이때 이미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우륵이 지은 12곡이 곡조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륵이 신라로 귀화하자 진흥왕은 계고(階庫)·법지(法知)·만덕(萬德) 세 사람에게 명하여 우륵에게 악을 배우게 하였다.15)『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3년. 이때 우륵은 그들의 재능에 따라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우륵이 지은 12곡은 가야금 곡조만이 아니라 연주·노래·춤이 어우러진 연희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승려 원효가 우인(優人)이 놀리던 큰 박을 본떠서 연희 도구를 만든 후 무애(無碍)라고 이름짓고, 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어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교화시켰다는 내용이 보인다. 결국 무애희는 전문적 연희자인 우인들의 연희 도구를 본떠서 만든 무애를 사용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던 연희다. 무애희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전승되었다. 『고려사』 「악지」에 “무애희는 서역으로부 터 유래하였다. 그 가사에 불가의 말을 많이 사용하고 방언이 섞여 있어 기록하기가 어렵다.”고16)『고려사』 권71, 지25, 악2, 속악(俗樂) 무애(無㝵). 한 점으로 보아, 무애희는 서역 전래의 연희로서 전문 연희자가 연행하던 것을 원효가 개작하여 불교 포교에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신서고악도 가운데 신라악의 입호무와 신라박이 그려져 있음은 신라의 연희가 중국으로 건너갔음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연희 장면, 수나라의 칠부기와 당나라의 십부기에 포함되었던 고구려악, 신라에서 궁중의 공연 예술을 담당했던 왕립 음악 기관인 음성서, 입호무, 신라박, 통일 신라의 금척·무척·가척의 존재 등을 통해서 전문 연희자가 활동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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