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1장 전통 연희의 전반적 성격
  • 3. 전통 연희의 역사적 전개
  • 고려시대
전경욱

고려시대에는 이미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온 팔관회·연등회를 비롯하여, 수륙재(水陸齋)·우란분재(于蘭盆齋)·팔관회(八關會)·나례(儺禮)·수희(水戲) 그리고 왕의 행행(行幸)과 환궁(還宮), 궁중 연회, 개선장군의 환영 잔치 때 각종 연희를 공연하였다. 그 내용은 주로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곡예 연희와 환술, 산악의 한 종목인 골계 우희, 가면희, 교방 가무희(敎坊歌舞戲)인 궁중 정재 등이었다.

곡예 연희와 환술은 여러 기록에서 잡희, 백희, 가무백희, 산대잡극, 산대희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지만, 결국 그 연희 종목은 대부분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의 전문 연희자로는 북방 유목민 계통, 재승 계통, 서역 계통 등이 있었다. 특히 이 시기의 연희 담당층으로 양수척(楊水尺)·거란족·달단(韃靼) 등 북방인 계통의 사람들이 있다.

예종 때 양성지(梁誠之, 1415∼1482)가 올린 상소문에 양수척의 후예인 재인과 백정들이 당시까지도 고려시대의 양수척이 하던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풍습과 짐승을 도살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19)『예종실록』 권6, 예종 1년 6월 29일 신사. 내용이 있어, 고려시대의 연희 담당층이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국교로 숭상하여 불교 사원에서 연등회·우란분재·수륙재 등 여러 행사를 거행했으며, 이러한 행사에서 각종 연희를 공연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에 속한 무리이면서도 장사를 하고, 기생들과 뒤섞여 놀며, 속인의 복장을 하고 절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공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20)『고려사』 권7, 세가7, 문종 10년 9월.

연희에 뛰어났던 서역인들은 당나라 이전부터 중국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부터 서역 계통 연희자가 발견된다. 고려 의종(재위 1147∼1170) 때 규정된 법가위장(法駕衛仗) 과 연등위장(燃燈衛仗)에 서역악인 안국기(安國伎)·고창기·천축기가 나온다.21)『고려사』 권72, 지26, 여복(輿服), 의위(儀衛), 연등위장(燃燈衛仗). 연등위장은 연등회 때 왕이 봉은사(奉恩寺) 진전(眞殿, 선대 임금들의 초상화를 모신 곳)으로 거둥할 때 앞장서는 의장 대열을 말하는데, 이때 잡기(雜伎)와 안국기가 연행되었음을 전해 주고 있다.

고려 개국 후 최초의 팔관회는 918년(태조 원년) 11월에 철원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의 공연 내용은 백희가무(百戲歌舞), 사선악부(四仙樂部), 용봉상마거선(龍鳳象馬車船)이었다.

고려시대에 정월 15일과 2월 15일의 연등은 궁정을 중심으로 거행되었다. 이때 여러 가지 연희가 베풀어졌는데, 『고려사』에는 연등회에서 행해진 왕모대가무(王母隊歌舞)라는 교방악에 관한 내용이 있다.22)『고려사』 권71, 지25, 악2, 용속악절도(用俗樂節度).

고려 말에 이색이 지은 한시 「동대문에서 대궐 문 앞까지의 산대잡극은 전에 보지 못하던 바라(自東大門至闕門前山臺雜劇前所未見也)」에 따르면, 산대의 모양은 봉래산과 같았고, 바다에서 온 선인이 과일을 드리는 춤을 추었고, 북과 징소리에 맞추어 처용무를 추었으며, 긴 장대 위에서 솟대타기를 했고, 폭죽놀이가 있었다.

또 이색은 나례를 구경하고 지은 한시 「구나행」에서 오방귀무(五方鬼舞), 사자무, 불 토해 내기, 칼 삼키기, 서역의 호인희(胡人戲), 줄타기, 처용무,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 등을 묘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처용무가 나례, 중국 사신을 위한 연회, 궁중 연회, 개인적 연회 등 다양한 행사에서 연행되면서 고려 사회의 보편적인 연희로 자리 잡은 것으로 나타난다.

수희(水戲)는 물에 배를 띄워 놓고 백희를 연행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위나라 명제 때 마균(馬鈞)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송대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가운데 「황제가 임수전에 행차하여 표기(標旗) 빼앗는 연희를 구경하고 연회를 베풀다(駕幸臨水殿觀爭標錫宴)」라는 시에 수희가 묘사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수희에서는 물 위에 50여 척이나 되는 많은 배를 띄워 놓고 배 위에 채붕을 설치했으며, 귀신놀이를 하면서 불을 머금었다가 뿜어내는 연희가 있었다.23)『고려사』 권122, 열전35, 백선연(白善淵). 그리고 고기잡이 도구를 실었던 점으로 보아 어부가를 부르면서 고기 잡는 모습도 연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뿐만 아니라 배 안에 비단 장막을 치고 여악과 잡희를 실었으며, 19척의 배를 모두 비단으로 장식하였다.24)『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21년 5월. 이처럼 고려시대의 수희에서는 배 위에 채붕까지 설치하고, 전문 연희자와 뱃사공과 어부들이 동원되어 다양한 연희를 펼쳤다.

또 고려시대에 우희는 길거리, 궁중 연회, 사냥터, 절에서의 연회 등 다양한 곳에서 연행될 정도로 대중적인 연희로 자리 잡았다.

가면희의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고려사』에는 1244년(고종 31) 2월에 최이(崔怡)가 고종이 베푼 연회에서 가면인 잡희(假面人雜戲)를 바쳤다는 내용, 처용의 가면을 쓰고 처용무를 추었다는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25)『고려사』 권23, 세가23, 고종 31년 2월. 그리고 “우리나라 말로 가면을 쓰고 연희하는 자를 광대라 한다.”는 기사도 볼 수 있다. 이는 고려시대에 전문적으로 가면을 쓰고 노는 가면희가 있었고, 그 공연 또한 상당히 활발했음을 알려 준다.

교방 가무희인 궁중 정재는 고려시대에 새로이 생긴 연희로 중국 송대의 가무희를 도입하여 팔관회와 연등회 등에서 연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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