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2장 궁정 연회의 전통과 정재의 역사적 전개
  • 3. 정재의 이념과 미학
  • 정재의 형상화 방식
사진실

물(物)에 의탁하여 심(心)을 드러내는 악의 창작 과정에서 다시 몇 가지의 형상화 방식을 추출할 수 있다. 다음은 『예기』 「악기」에서 무악(武樂)의 형상화 방식을 언급한 부분이다.

빈모가(賓牟賈)가 일어나 자리를 피하면서 청하기를 “무릇 무악(武樂)에서 방비하고 경계하는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면 이미 천명을 들은 것입니다. 감히 묻건대, 느리게 하며 또한 오래도록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머물거라. 내 너에게 말하겠다. 무릇 악이란 이루어진 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방패를 잡고 바로 산처럼 서는 것은 무왕의 일이다. 도약하여 뛰어오르는 것은 태공(太公)의 뜻이다. 무악의 종장에 모두 앉는 것은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다스림이다. 또한 무릇 무악은 시 작하면서 북쪽으로 나아가고, 두 번째 곡에서 상(商)나라를 멸망시키며, 세 번째 곡에서는 남쪽으로 나아가고, 네 번째 곡에서는 남방의 나라들을 정벌하며, 다섯 번째 곡에서는 나뉘어져 주공은 왼쪽에 소공은 오른쪽에 있는다. 여섯 번째 곡에서는 다시 첫 번째 자리로 돌아오니 천자를 숭앙한다. 무자(舞者)를 옆에 끼고 방울을 흔들면 무자는 창으로 네 번 공격하여 찌르니, 중국에 위엄이 가득 찬다. 무자를 나누어 옆에 끼고 방울을 흔들며 나아가는 것은 일을 빨리 이루려는 것이다. 오래도록 대열에 서 있는 것은 제후가 이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 하였다.71)『예기』, 악기19.

무악의 덕은 무왕과 태공, 주공과 소공의 업적을 기리는 데 있다. 이러한 뜻이 ‘상징’의 방식을 통하여 물의 영역으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의 인용문의 주에 따르면, 춤추는 사람이 방패를 들고 산처럼 의연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무왕이 방패를 잡고 제후가 이르길 기다리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도약하여 뛰어오르는 것은 태공이 위엄과 무력을 드높이는 뜻을 상징한 것이고, 또한 무악이 끝날 즈음에 자리에 앉는 것은 주공과 소공이 문덕(文德)의 다스림으로 무(武)를 그치게 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무악이 시작되면서 네 번째 곡까지 방위를 바꾸어 나아가는 것은 사방의 나라들을 평정하는 무공을 상징하고, 다섯 번째 곡에서 주공과 소공이 좌우에 있는 것은 그들이 좌우에 거하는 모습을 상징한다고 한다. 여섯 번째 곡에서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무공을 이루고 나서 호경(鎬京)에 돌아가니 사해(四海)가 모두 무왕을 숭앙하여 천자로 삼는다는 내용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창으로 네 번 공격하는 것은 주(紂)를 정벌하는 모습을 상징한다고 한다. ‘상징’의 방식은 동서남북과 좌우, 전진과 회전, 앉거나 뛰기, 느리고 빠르기 등과 같은 기호를 통하여 양식화되어 있다.

세종 때 만든 정대업(定大業)은 이러한 전통을 이은 조선의 무악으로 역시 상징의 형상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제작 당시 정대업은 소무(昭武), 독경(篤慶), 선위(宣威), 혁정(赫整), 지덕(至德), 정세(靖世), 진요(震耀), 영관(永觀)의 여덟 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72)『세종실록』 권116, 세종 29년 6월 4일 을축. 경사를 돈독하게 하였다는 뜻의 독경(篤慶)에는 “목조(穆祖)가 알동(斡東)에 살 때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장(長)이 되었는데, 이로부터 왕업(王業)이 시작되었다.”는 사적을 담았다. 천위(天威)를 떨쳤다는 뜻의 선위(宣威)에는 “조소생(趙小生)과 탁도경(卓都卿)이 쌍성(雙城)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환조(桓祖)가 토벌하여 평정한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 빛나는 덕으로 나라를 평정시켰다는 뜻의 혁정(赫整)에는 “태조가 여러 번 왜구를 쳐서 섬멸하고, 나하추(納哈出)를 달아나게 하고, 홍건적을 평정하고, 올자(兀刺)를 빼앗고 동녕(東寧)을 함락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을 쫓아내고, 호발도(胡拔都)를 쳐 이겨서 환란을 평정한 일”을 담았다. 지극한 덕을 세웠다는 뜻의 지덕(至德)에는 “신우(辛禑)가 요동(遼東)을 쳐서 명나라를 범하게 하매 태조가 대의(大義)를 앞세워 군사를 돌린 일”을 담았다. 세상을 안정시켰다는 뜻의 정세(靖世)에는 “정몽주가 태조의 위엄과 덕행을 시기하여 해치려 하므로 태종이 맑게 살피고 잘라 없앤 일”을 담았다. 천둥처럼 빛났다는 뜻의 진요(震耀)에는 “대마도 왜적이 은덕을 배반하고 변경을 소란하게 하므로 태종이 장수를 명하여 정벌한 일”을 담았다. 소무와 영관은 정대업의 서두부와 종결부에 해당하며, 나머지 장은 각각 조선 개국 이후 열성(列聖)의 무덕(武德)을 담고 있다. 세조 때 정대업은 소무, 독경, 탁정(濯征), 선위, 신정(神定), 구웅(奮雄), 순응(順應), 총수(寵綏), 정세, 혁정, 영관의 11곡으로 개작되어73)『세조실록』 권31, 세조 9년 12월 11일 을미. 환조의 사적을 담은 탁정을 새로 만들고 혁정에 있던 태조의 사적을 선위로 옮기고 혁정에는 세종이 왜구를 섬멸한 사적을 담았다. 지덕과 진요를 없애고 태조의 사적을 담은 신정, 구웅, 순응, 총수를 새로 만들었다. 『악학궤범』에 이르게 된다. 『세조실록』에 기록된 악사(樂詞)의 내용과 『악학궤범』에 수록된 정재 절차를 비교하여 정대업의 형상화 방식을 가늠할 수 있다.

(가) 선위(宣威)의 노래

아아! 고려가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여 외적의 업신여김이 심히 성하였네.

섬 오랑캐가 제멋대로 침범하였고 나하추(納哈出)의 도둑들이 방자히 굴었네.

홍건적이 사납게 거들먹거리고 원나라 여얼(餘孼)들이 세차게 밀어닥쳤네.

얼승(孼僧)들이 제멋대로 날뛰고 오랑캐의 괴수들이 어지러이 날치었네.

아아! 우리 거룩하신 선조께서 신묘한 무공을 크게 드날리셨네.

비로소 하늘의 위엄을 선양하시니 빛나고도 당당하도다.74)『세조실록』 권31, 세조 9년 12월 11일 을미.

(나) 선위(모두 12박)의 연주에 이르러 처음 2박에 곡진(曲陣)을 만들고, 또 2박에 직진(直陣)을 만들고, 또 2박에 예진(銳陣)을 만들고, 또 2박에 원진(圓陣)을 만들고, 또 2박에 방진(方陣)을 만들고, 끝 2박에 처음 대열로 도로 돌아간다.75)이혜구, 앞의 책, 311쪽.

천위(天威)를 선양한다는 뜻의 ‘선위(宣威)’ 장으로 태조가 사방의 외적을 물리쳐 위엄을 떨치는 무덕이 담겨 있다. (가)의 가사 내용에 따르면, 태조는 ‘섬 오랑캐, 나하추의 오랑캐, 홍건적, 원나라 여얼, 얼승, 호적(胡賊)의 추장’을 상대로 찬란한 무공을 세웠다. (나)의 정재 절차에 따르면 군 대가 여러 가지 진형(陣形)을 갖추는 모습을 연출하여 태조의 무공 장면을 상징하였다. 모든 진형에서 36명의 무기(舞妓) 중 여덟 명은 안쪽에 위치하고 나머지 28명이 그들을 에워싼다. 이들은 오방색의 갑옷을 입고 있는데, 곡진형의 경우 가운데 여덟 명은 황색, 동쪽의 일곱 명은 청색, 서쪽의 일곱 명은 백색, 남쪽의 일곱 명은 홍색, 북쪽의 일곱 명은 흑색을 입고 있다. 이들은 남쪽을 향하여 진형을 갖추고 있으며 검, 창, 궁시의 순서로 대열을 이루고 있다. 황색 갑옷을 입고 검을 든 사람은 군대의 대장으로 태조를 형상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곡진형에서 직진형, 예진형, 원진형으로 진형을 바꾸어 나가는 것은 사방의 외적을 물리쳐 평정하는 내용을 나타내었다. 방위와 선후, 곡선과 직선, 둥글고 모남, 손을 여미고 발을 구름 등의 단순한 기호를 사용하여 전투와 무공을 상징하였다.

정대업은 보태평과 더불어 무무(武舞)와 문무(文舞)로서 종묘 제례악에 사용되었으며 다른 정재를 제작하는 모범이 되었다. 인조 경오년(1630) 진풍정에서 연출된 정재는 헌선도, 수연장, 금척, 봉래의, 연화대, 포구락, 향발, 무고, 처용무의 아홉 정재였다. 이 가운데 조선 개국의 사적과 정당성을 다룬 금척과 봉래의는 정대업과 마찬가지로 상징의 형상화 방식을 따르고 있다. 백제와 신라에서 유래한 무고나 처용무는 민간의 고사를 담은 악으로 역시 상징의 형상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탁물우의’의 원칙에 따르되 ‘상징’과 다른 형상화 방식으로 ‘가탁(假託)’을 들 수 있다.76)사진실, 「고려시대 정재의 공연 방식과 연출 원리」, 『정신문화연구』 7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109∼112쪽 ; 「정재의 극중 공간·공연 공간·일상 공간」, 앞의 책 참조. 가탁은 일상 공간을 의탁할 허구적인 극중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차이점이 있다. 헌선도와 연화대에서는 서왕모와 선녀, 연꽃에서 피어난 동녀 등의 극중 인물이 등장한다. 헌선도의 경우 서왕모가 선도를 드리는 행위에 가탁하여 현실의 의례 공간에서 임금 이하가 대왕대비에게 만수무강의 정성을 드리는 행위를 나타내었다. 연화대에서는 연꽃에서 나온 동녀가 가무의 재주를 바치는 행위에 가탁하여 의례 공간에서 기녀가 정재를 연출하는 행위를 나타내었다. 향악 정재인 향발은 악기 이름을 따서 제목을 지었는데, 『악학궤범』에 따르면, 당악 정재 오양선(五羊仙)의 가사를 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경우 향발에 등장하는 출연자 역시 신선이라는 극중 인물로 전환된다. 가탁을 통하여 형상화된 극중 공간은 일상 공간의 의미를 증폭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가탁의 방식은 일상 공간의 행위를 변형하는 재치 넘치는 놀이 정신을 구현하였다.

수연장은 만수무강의 축수를 드린다는 점에서 헌선도나 연화대와 같으나 서왕모나 연꽃 동녀라는 극중 인물을 빌지 않고 연회에 모인 참석자들 스스로 행위자가 되고 있다. 포구락 역시 기녀 자신이 행위자가 되어 연회의 즐거움을 더하는 공 던지기 놀이를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형상화 방식을 ‘제시’라고 한다. 상징이나 가탁과 달리 직접적인 언술과 행위를 통하여 진연의 덕목인 경사의 기쁨을 표현하게 된다.

지금까지 물(物)의 영역에 의탁하여 심(心)을 드러내는 정재의 형상화 방식을 ‘상징’, ‘가탁’, ‘제시’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 정재의 내용과 형식은 끊임없이 그 본질인 덕성을 일깨워 준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 후기 정재에는 ‘재현(再現)’의 형상화 방식이 적용될 수 있다. 이는 선유락(船遊樂)이나 항장무(項莊舞)와 같이 지방에서 형성된 정재들이 허구적인 극중 공간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77)허구적인 극중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가탁과 재현의 원리가 상통한다. 그러나 가탁의 원리는 일상 공간의 층위가 개입하여야만 극중 공간의 의미가 완결되므로, 극중 공간의 독자성이 보장되는 재현의 원리와 대비된다. 재현된 극중 공간은 개연성 있는 허구로서 현실 세계를 반영할 뿐, 특정한 일상 공간에 종속되지 않는다.

소설 『구운몽(九雲夢)』을 각색하여 만든 정재 성진무(性眞舞)도 재현의 형상화 방식을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 연극계는 ‘서사의 화출(畵出)’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서사적 재현을 연극적 재현으로 입체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때 정재 항장무와 성진무가 각각 홍문연연의(鴻門宴演義)와 구운몽연의(九雲夢演義)로 개량되었다. 시·가·무로 표현하였던 공연 텍스트를 변개하여 서사성과 재현성을 강화시켰다.78)사진실, 「개화기 한국 연극의 근대적 발전 양상 연구」,『한국 연극 연구』 3, 한국연극사학회, 2000, 49쪽 ;「정재·탈춤·판소리의 갈림길」, 앞의 책 참조. 정재의 표현 방식은 제시, 상징, 가탁의 단계를 거쳐 재현으로 진보되고 있었다.79)정재의 형상화 방식에 대해서는 사진실, 「진연과 정재의 공연 미학과 예악론」, 앞의 책, 328∼334쪽 참조.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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