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2장 궁정 연회의 전통과 정재의 역사적 전개
  • 4. 정재의 역사적 전개 양상
  • 고려시대 정재의 전개 양상
  • 팔관회와 연등회의 정재 연행
사진실

12세기에 송나라에서 대성아악이 유입되기 이전까지는 좌부(左部)에서 당악을 관장하였고, 우부(右部)에서 향악을 관장하여 이를 양부악(兩部樂)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정재와 관련된 여기는 대악서와 관현방에 소속되어 있었다. 대악서 소속의 여기와 악공은 왕의 전용이었으나, 국가적인 행사에서는 관현방 소속의 여기, 악공과 함께 연향에 참가하여 연주하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90)송방송,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한국사』 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458쪽.

고려시대에 여기들이 당악 정재와 향악 정재를 연행할 때는 차이가 있었다. 당악 정재에서는 죽간자(竹竿子) 두 사람이 가무희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구호(口號)를 반주 없이 외우고, 무원(舞員)들이 춤을 추는 도중에 반주 없이 창사(唱詞)를 노래하였다. 그러나 향악 정재에서는 죽간자의 구호 없이 가무희를 시작할 때 무원들이 배(拜)를 하고, 무원들의 창사가 없었다.

궁중 정재는 국가 기관에서 관장했던 만큼 법도를 중시하는 궁중 문화의 하나였으므로 엄격한 질서와 규례를 중시하였다. 그래서 궁중 정재는 다른 어떠한 연희보다 도입부(起), 연결부(承), 중요부(轉), 종결부(結)의 엄격한 격식을 갖추고 있는 과정이 특징이다. 한편 내용에서는 대부분 왕의 수복(壽福)을 기리고 왕실의 번영을 송축하는 것이어서 개인의 감정이나 정서보다는 왕실을 존중하는 왕권 국가의 특징을 반영하였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궁중 정재는 연회와 연등회, 팔관회에서 연행되었다.

공민왕 15년(1366) 12월 갑인일에 대신들이 하남왕(河南王)의 사신 곽영석(郭永錫)을 접대하는 연회에서 향당악(鄕唐樂)을 연주하게 하였다. 이는 사신이 우리나라의 음악을 들려 달라고 청했기 때문이다. 16년 정월 병오일에 휘의 공주(徽懿公主) 혼전(魂殿)에 책명받은 것을 알리는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초헌에 태평년(太平年)의 곡을 주악하였고, 아헌(亞獻)에는 수룡음(水龍吟)의 곡을 주악하였고, 종헌(終獻)에는 억취소(憶吹簫)의 곡을 주악하였다. 21년 정월 을묘일에 왕이 인희전(仁熙殿)에 나가서 제사를 거행했는데 향당악을 주악하였다.91)『고려사』 권71, 지25, 악2, 용속악절도.

앞의 인용문은 사신을 영접하는 연회와 인희전에서 제사를 거행할 때 향당악을 연행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에서 주목되는 점은 우리나라의 음악을 들려 달라는 청이 있어 연주한 것이 향당악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중국에서 ‘당악’을 받아들였으나 고려에서 그것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용한 대로 『고려사』의 상원연등회의에 따르면, 상원연등회에서 헌선도가 연행되었고, 『고려사』의 속악을 사용하는 절차에 따르면 팔관회 때 포구락이 연행되었다.

이러한 궁중 정재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약간 변화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홀치(忽赤), 응방(鷹坊)이 궁내에서 서로 앞을 다투어 연회를 차리는데 금을 오려서 꽃을 만들며 명주실을 조여 가지고 봉황새를 만드니 그 사치스러운 것이 한정 없어 이루 말로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 또 성악(聲樂)을 쓸 때에는 항간의 속된 것을 물리치고, 교방에서 법식대로 하는 곡조를 쓰도록 하는 것이 전국 사람들의 희망입니다.92)『고려사』 권106, 열전19, 심양.

앞의 인용문은 충렬왕 때 심양이 감찰시사(監察侍史)로 임명되었을 때 이승휴 등과 함께 왕에게 직소한 내용이다. 여기에는 연행하는 연회의 규모를 축소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로 보아 당시의 연회가 매우 호화스럽고 규모도 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악을 사용함에 있어 ‘속된 것’을 물리치고 교방에서 법식대로 하는 곡조를 쓰자는 말에서, 충렬왕대인 1300년을 전후로 하여 당시 궁중 정재의 곡조에 정해진 것 이외에 새롭게 창작된 것 내지 궁중이 아닌 민간에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창사(唱詞)가 사용되어 궁중 정재의 구성이 변모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한편 1259년(고종 46)에 고려가 몽고의 침입을 받아 굴복한 이후부터 1356년(공민왕 5) 배원(排元) 정책이 단행될 때까지 약 100년 동안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 아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나라 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왕가나 귀족 계급에서 호적(胡笛)·호무(胡舞)·호가(胡歌)를 잠시 즐겼고,93)『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10책에는 호무(胡舞)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되어 있고, 조선 초기 권근의 『양촌집(陽村集)』 권5에는 ‘종형(從兄)의 개성댁(開城宅)에서 호가(胡歌)를 듣고 즐거워서 그 뜻을 풀이하다’라는 시가 실려 있다. 태평소가 원나라에서 들어왔으며, 대취타의 내취(內吹)를 몽고어를 사용하여 ‘조라치(照羅赤)’라고 하는 점 등을 볼 때 고려시대에 원나라 음악의 영향이 있었던 것은 확인되지만, 그 영향이 그리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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