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2장 궁정 연회의 전통과 정재의 역사적 전개
  • 4. 정재의 역사적 전개 양상
  • 조선시대 정재의 전개 양상
  • 궁중 정재의 정착기
사진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억불 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국시로 삼고 치국의 근본을 예악에 두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궁중 정재는 이러한 시대적·정치적 배경 아래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왕의 업적을 과시하고자 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연행되었다. 이를 토대로 질서 있고 조화로운 국가 안정과 태평을 유지하고자 했던 강한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다.

이 시기에는 고려시대부터 전승된 당악 5대곡(大曲)을 그대로 답습하는 한편, 새 왕조의 임금을 송축하기 위한 노래와 그에 맞춘 새로운 정재가 창작되었다. 1393년(태조 2) 7월에 정도전이 납씨곡(納氏曲), 정동방곡(靖東方曲), 무공(武功),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등 새로운 음악을 지어 임금에게 바쳤던 것을 악공에게 배워 익히게 하였다. 1395년(태조 4) 10월에는 성균박사가 제생을 거느리고 천감(天監)·화산(華山)·신묘(新廟) 등 가요 3편을, 1402년(태종 2)에는 하륜(河崙)이 근천정(覲天庭)·수명명(受明命) 등 악장 2편을 지었다. 그리고 제4대 세종부터 제9대 성종대에 이르는 동안 아악, 당악, 향악과 악기, 악곡, 악보 등을 정리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한국 전통 음악의 기초를 세웠다. 특히 세종 때에는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악기의 개조와 악률 연구에 전념하게 하여 조선의 독자적인 궁정 음악 기초를 확립하게 함으로써 아악이 국립 음악 기관의 좌방에 소속되어 기존의 당악을 우방으로 밀어내었다. 음악이 창제되고 정리되자 이에 맞추어 화려하고 우아한 궁중 정재가 안무되었다. 그 후 성종은 이를 계승하여 예악을 크게 일으켰다. 예조 판서 성현, 장악 주부 신말평(申末平), 전악 박곤(朴棍)·김복근(金福根) 등에게 명하여 예악 사업을 종합 집대성하게 하여 1493년(성종 24)에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이 시기에 창작 또는 재현된 정재는 무려 36종에 달하는데, 몽금척·수보록은 태조대에 창작되었고, 근천정·수명명은 태종대에 창작되었으며, 하황은(荷皇恩)·하성명(賀聖明)·성택(聖澤)은 세종대에 창작되었다. 『악학궤범』의 「시용당악정재도설(時用唐樂呈才圖說)」에는 고려시대부터 연행되었던 당악 정재 5대곡인 헌선도·수연장·오양선·포구락·연화대, 금척·수보록·근천정·수명명·하황은·하성명·성택과 같은 창작된 당악 정재, 그리고 송사(宋詞) 대곡(大曲)을 복원한 육화대(六花隊)·곡파(曲破) 등이 보인다. 당악 정재의 반주 악곡은 회팔선인자(會八仙引子)·보허자령(步虛子令)·헌천수만(獻天壽慢)과 같은 송나라 교방악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모두 고려시대 당악 정재에서 연주되던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 가운데 금척은 태조 때 정도전이 만든 당악 정재로서, 몽금척이라고도 한다.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을 받들고 하늘에서 내려와 ‘태조가 문무를 겸하고 있으며, 태조에게 민원(民願)이 속(屬)함’을 이르면서 금척을 주었다는 내용을 무용화한 것이다. 이러한 창작 배경은 금척에서 최자령(嗺子令) 연주 후 금척을 받든 사람의 치어와 금척사(金尺詞)에 나타난다.

수보록은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 한 사람이 지리산 석벽에서 이서(異書)를 얻어 바친 일이 있었는데, 임신년(壬申年)에 태조가 등극할 때 그 책에 써 있던 말이 들어맞은 것을 찬양한 무악이다.

근천정은 1402년(태종 2) 하륜이 수명명과 함께 지어 올린 것으로,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중국 조정에 들어가 황제의 오해를 풀고 돌아온 것을 온 나라 사람들이 기뻐한다는 내용이다.

하황은은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것으로, 세종이 명나라 황제에게 왕의 인준을 받아 온 백성이 기뻐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총 9회 정도의 공연 기록이 나타난다. 하황은·수명명·근천정은 주로 사신연(使臣宴)에 사용된 당악이며,106)『세종실록』 권5, 세종 1년 8월 19일 신묘조에 “(사신연에) 향악을 쓰지 말고, 오로지 근천정·수명명·하황은만 쓰되, 창기·공인은 모두 서서 연주한다.”고 되어 있어 향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성택과 하성명도 사신연에서 연출되었다.

육화대와 곡파는 이 시기에 재구성하여 연행한 정재로 추정되며, 『고려사』 「악지」에 무보(舞譜)가 전하지 않고, 『악학궤범』에 춤의 절차만 전하고 있다.

한편 『악학궤범』 「시용향악정재도설(時用鄕樂呈才圖說)」에는 고려시대부터 전승된 무고·무애·아박, 세종대에 창작된 보태평(保太平)·정대업·봉래의, 기록상 1449년(세종 31) 10월 경술조에 최초로 보이는 향발, 그리고 학무·학연화대처용무합설·교방가요 문덕곡 등이 보인다. 이들의 반주 음악은 여민락령·치화평·정대업 등 창작된 당악곡과 소포구락 등 의 송나라 교방악, 그리고 보허자령과 같은 송나라 사악(詞樂) 등이다. 창사(唱詞)로 불린 노래들은 용비어천가, 동동, 처용가 등 우리나라 고유의 것이거나 관음찬(觀音讚), 미타찬(彌陀讚)과 같은 것들이다.107)송방송, 「조선 초기의 문화 Ⅱ」, 『한국사』 27, 국사편찬위원회, 1996, 424∼428쪽.

이 가운데 정대업과 보태평은 회례악무(會禮樂舞)로 창작되었으나, 1464년(세조 10)부터는 제례악(祭禮樂)으로 사용되어 쓰임의 변화를 보인 정재들이다. 보태평은 문무(文舞)로 초헌(初獻)에, 정대업은 무무(武舞)로 아헌(亞獻)과 종헌(終獻) 때에 추었다. 특히 정대업은 당나라의 칠덕무(七德舞)를 모방한 것으로 궁시(弓矢)와 창검(槍劍)으로 치고 찌르는 형용을 나타내고, 원진(圓陣)·곡진(曲陣)·직진(直陣)·예진(銳陣)·방진(方陣) 등 여러 가지 진(陣)의 형태를 연출하였다.

봉래의는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추는 춤으로서, 향악 정재임에도 죽간자와 구호(口號) 등 당악 정재의 형식을 부분적으로 도입하여 연출하였다. 후대로 갈수록 죽간자나 구호·치어의 유무로는 형식상 향악 정재와 당악 정재 사이의 구분이 더욱 모호해지는데, 봉래의에서 두 양식의 구분이 사라지는 초기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향발무는 향발이라는 악기를 들고 추는 향악 정재로서, 오양선의 창사가 사용되고 있어 당악 정재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이 시기에 창작된 정재들은 내용이 사대적이고 왕가의 번영을 송축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창작된 정재임에도 불구하고 죽간자와 구호, 한문으로 된 치사(致詞) 등 당악 정재의 형식을 도입하고, 음악까지도 당악 일변도라는 점을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엄격한 형식을 갖춘 무대 예술, 인본·덕치·천인합일·사대사상 등의 이념에 충실한 내용, 창작 주체가 전문 예술인이 아닌 당대 세도가 내지 권력층이었다는 점 등 모든 측면에서 정재의 목적성과 정치적 성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궁중 정재를 ‘전략적으로 정치성을 띤 예술’이라고만 단정하기는 어렵다. 정대업과 보태평·봉래의·문덕곡 등 조선 초기에 창작된 것을 제외하면, 고려시대부터 연행되었던 아박·무고·학무·향발무 등에서는 정치적인 색깔보다는 오히려 연희성이나 공연 예술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당악의 향악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당악이 좌방을 아악에 내주고 우방의 향악과 통합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악이 향악과 교섭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당악기와 향악기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연주되지 않고, 향악과 당악 연주에 모두 사용된 당악기가 여덟 종에 이르렀다는 점도 당악의 향악화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108)송방송, 「조선 초기의 문화 Ⅱ」, 『한국사』 27, 국사편찬위원회, 1996, 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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