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2장 궁정 연회의 전통과 정재의 역사적 전개
  • 4. 정재의 역사적 전개 양상
  • 조선시대 정재의 전개 양상
  • 궁중 정재의 부흥기
사진실

순조대는 흔히 ‘궁중 정재의 황금기’로 불린다. 비록 1801년(순조 원년)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으로 국내가 소란해져 악정(樂政)이 중단되기도 하고, 1809년(순조 9) 대왕대비의 회갑에 음악만 연주되고 정재는 거행되지 않았지만, 1827년(순조 27) 왕의 명령으로 효명 세자(孝明世子)가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작하게 되면서 이 시기에 많은 궁중 정재가 창작되었다. 효명 세자의 집정 기간은 약 4년간이었지만, 효명 세자가 만든 정재의 창사와, 그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던 해에 장악원 전악에 오른 김창하(金昌河)가 그에 맞는 정재를 안무함으로써 단기간에 무려 30여 개의 정재가 창작되었다. 정재 창작과 관련하여 김창하에 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장악원 기록인 『전악선생안(典樂先生案)』과 조선의 마지막 세습 악인이었던 함화진의 『악인열전(樂人列傳)』126)이 책은 정식으로 출판되기 전에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으므로, 김창하와 관련된 『악인열전』의 내용을 성경린의 저서에서 살펴볼 수 있다. “김창하 선생은 순조조 악사로 김종남(金宗南)의 숙부이며, 김영제(金寧濟)의 종증조다. 선생은 특별히 무용에 천재가 비상했다. 문조조(文祖朝, 익종) 동궁대리시에 총애를 받아 악인 중 우량자로 악단을 조직하고 궁중에 주야로 입직케 하여 시시로 어전 주악케 했으니, 이 악단을 구후관(九猴官)이라 하고 선생을 구후감관(九猴監官)이라 칭했다. 이때 순조 대왕은 보령 11세에 보위에 등극하사 보주(寶籌) 41세에 당하시었으므로, 동궁으로 계신 문조께서 원래 효성이 지극하신지라 부왕 전하께오서 등보조(登寶祚)하옵신 지 흡만(洽滿) 30년이요, 겸하여 망오순(望五旬)에 당하시므로 축하진연(祝賀進宴) 겸 양노연(養老宴)을 설행하실새 다수한 정재를 창작하심에 당하여, 선생은 문조를 보좌하여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보상무(寶相舞)·춘앵전(春鶯囀)·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외에 다수한 정재를 창작했다.”(성경린, 『한국의 무용』,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6, 171∼172쪽).에서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효명 세자와 김창하의 노력으로 궁중 정재는 순조 때를 고비로 정리되고 증폭되어 이 시기에 창작된 20여 종의 정재를 포함하여 모두 50여 종에 이르게 되었고, 예술적인 무용으로서도 손색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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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진찬도병의 여령 정재
무신진찬도병의 여령 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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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는 궁중의 연회를 의궤 자료로 다수 남기고 있는데, 『무자진작의궤(戊子進爵儀軌)』(1828), 『기축진찬의궤(己丑進饌儀軌)』(1829), 『무신진찬의궤(戊申進饌儀軌)』(1848), 『무진진찬의궤(戊辰進饌儀軌)』(1868), 『정축진찬의궤(丁丑進饌儀軌)』(1877) 등에 이전 시기에 보이지 않던 정재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궁중에서 공연된 당악 정재는 『고려사』에 전하는 헌선도·수연장·오양선·포구락·연화대무와 조선 초에 창작된 몽금척·하황은·육화대가 있었다. 한편 당악 정재의 죽간자와 구호를 도입한 당악 정재 양식의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제수창(帝壽昌)·최화무(催花舞) 등도 공연되었다. 이 가운데 최화무는 송나라 태종이 친제(親製)한 소석조(小石調) 중 ‘구최화발(九催花發)’에서 연유하여 창작된 것으로서,127)계사본(癸巳本)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1893) ; 이홍구·손경순 옮김, 『조선 궁중 무용(國譯呈才舞圖笏記)』, 열화당, 2000, 162쪽. 보허자령과 향당교주(鄕唐交奏)에 맞추어 춘다. 1828년(순조 28) 『무자진작의궤』에는 죽간자 없이 무원(舞員) 여섯 명이 일렬로 늘어서서 북쪽을 향하여 춘다고 했으나, 1829년(순조 29) 『기축진찬의궤』의 권수(卷首) 무도(舞圖)와 1893년(고종 30) 『정재무도홀기』에는 죽간자 두 명, 중무(中舞) 한 명, 협무(挾舞) 네 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1년 사이에 춤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128)하황은의 창사도 1743년(영조 19)에 재창작하였고, 장생보연지무와 연백복지무의 창사도 1887년(고종 24) 『정해진찬의궤(丁亥進饌儀軌)』에 개제(改製)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 시기에 궁중 정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공연될 때마다 얼마간의 변화를 주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현상은 무고(舞鼓)에서도 발견된다.

한편 향악 정재는 『고려사』에 전하는 무고·아박무·무애무, 조선 초에 창작된 봉래의·향발무·학무·처용무 등이 공연되었고,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검기무(劍器舞)·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관동무(關東舞)·만수무(萬壽舞)·망선문(望仙門)·무산향(無山香)·박접무(撲蝶 舞)·보상무(補相舞)·사선무(四仙舞)·선유락(船遊樂)·침향춘(沈香春)·영지무(影池舞)·첨수무(尖袖舞)·첩승무(疊勝舞)·춘광호(春光好)·춘대옥촉(春臺玉燭)·춘앵전(春鶯囀)·향령무(響鈴舞)·경풍도(慶豐圖)·헌천화(獻天化) 등이 향악 정재의 형식을 빌려 새롭게 창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공연된 궁중 정재는 이전 시기에 비하여 형식적 측면에서 향악과 당악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 헌천화·경풍도·만수무의 경우는 비록 향악 정재라고는 하지만, 죽간자나 한문으로 된 구호와 치어가 없고 무구(舞具)만 다소 다를 뿐, 춤의 절차와 선도(仙桃)를 임금에게 올리며 만수무강을 빈다는 점에서 당악 정재인 헌선도와 비슷하다. 또 보상무의 경우는 포구락의 유희무적 성격과 공연 형식이 유사한데, 다만 포구문(抛毬門) 대신 보상반(寶相盤)을 사용한다는 점만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현상에서 이 시기에는 선상기에 의한 정재 공연 외에도 ‘당악의 향악화’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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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을묘정리의궤』의 봉수당진찬도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봉수당진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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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앵전과 무산향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독무(獨舞)라는 점에서 주목 된다. 이 두 정재는 1828년(순조 28) 진작에서 처음 보이는데, 춘앵전의 춤사위를 이전의 정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무산향은 작은 무대 격인 대모반(玳瑁盤)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 시기 다른 정재와도 구별된다.

선유락은 조선 후기의 파연(罷宴)에서 거의 빠짐없이 공연되던 정재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와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를 통하여 1795년(정조 19) 봉수당(奉壽堂) 내진찬(內進饌)에서 최초로 공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유락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중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에 보인다. 조선 후기에 이러한 선유락을 궁정에서 공연하게 된 계기는 당시 궁중에서 선유락을 공연했던 여기가 평안도의 평양·안주·성천 등지에서 올라온 선상기였음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129)김종수, 「18세기 이후 내연(內宴)의 악가무(樂歌舞) 차비(差備) 고찰」, 『한국 음악사 학보』 20, 한국음악사학회, 1998, 77∼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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