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2장 궁정 연회의 전통과 정재의 역사적 전개
  • 4. 정재의 역사적 전개 양상
  • 조선시대 정재의 전개 양상
  • 궁중 정재와 민간 연희의 교섭 양상
사진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궁중 정재는 지방 관아 등 민간으로 소통되고, 민간 연희의 일부도 궁중 정재로 편입되었다. 궁중 정재의 연희 주체는 기녀들이었는데, 궁중 정재를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선상기들의 상경과 귀향은 궁중 정재의 민간화 및 지방 공연 예술의 활성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130)궁중 정재와 민간 연희의 교섭 양상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정은경, 「조선시대 궁중 정재와 민간 연희의 교섭 양상」,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참조.

문헌상으로 지방에서 관기들이 연행한 것으로 확인된 정재들은 헌선도·포구락·연화대·무고·아박·처용무·학무·몽금척·향발·검무·항장무·사자무·관동무·선유락 등이다. 물론 궁중을 벗어난 정재는 일정한 변화를 거쳐 각 지방의 교방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허봉(許篈)이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1574년(선조 7)에 명나라에 다녀와 기록한 『조천기(朝天記)』에는 평양에서 본 포구락·향발·무동·무고가 기록되어 있다. 궁중에서 정재를 연행했던 관기들의 귀향과 함께 궁중 정재가 평양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감사가 연회 자리를 펴고 흰 과녁을 능라도(綾羅島)에 걸고서 영군관으로 하여금 짝을 지어 활을 쏘게 하였으며, 찬(饌)을 갖추어 상을 차렸는데, 포구·향발·무동·무고의 재주는 시끄럽고 떠들썩하기가 어제보다 더욱 심하였다.131)허봉, 『하곡집(荷谷集)』, 「조천기」 상, 갑술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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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광정연회도 세부
연광정연회도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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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감영의 화려한 정재는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평안감사향연도 가운데 부벽루연회도와 연광정연회도에 잘 묘사되어 있다. 부벽루연회도에는 평양 감영의 관기들이 벌이는 오방처용무·포구락·헌선도, 두 명의 쌍검무와 무고가 그려져 있다. 쌍검무를 제외하면 모두 궁중에서 연행했던 정재들이다. 연광정연회도에는 연광정 위와 아래에 모두 두 마리의 사자가 보이고, 그 아래에 다시 청학(靑鶴)과 황학 (黃鶴)이 나란히 서 있으며, 작은 채선(彩船)과 두 송이 연꽃이 보인다. 그러므로 연광정에서는 학무·연화대·사자무·선유락이 연행되었을 것이다.

평안도 성천에도 정재가 있었는데, 성천 지역 정재는 『악부(樂府)』에 실려 있는 「선루별곡(仙樓別曲)」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132)성무경, 「『교방가요』를 통해 본 19세기 중·후반 지방의 관변 풍류」, 『시조학 논총』 17, 한국시조학회, 200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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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루
강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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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패(拍佩) 소리 세 번 나니 능파무(凌波舞)가 시작일다. 던지느니 용(龍)의 알은 포구락이 절묘하다. 쌍쌍 얼너 아박이오 쟁쟁 소리 향발이라. 화룡(畵龍) 고리 북채는 웅장할사 축춤이며 주립패영(朱笠貝纓) 호풍신(好風神)은 헌거할손 무동이로다. 요지(瑤池) 반도(蟠桃) 드릴 적에 선관옥녀(仙官玉女) 어여쁘다. 각색형용(各色形容) 오방춤은 처용탈이 기괴하다. 협수(夾袖) 전립(戰笠) 연풍대는 번개 같은 검무로다. 성금성금 학춤이오 설렁설렁 사자(獅子)로다. 나군옥안(羅裙玉顔) 둘러서서 방포일성(放砲一聲) 배따라기 반입강풍(半入江風) 반입운(半入雲)하니 천상선락(天上仙樂)이 그지없다.

선루는 강선루(降仙樓)로, 평안도 성천읍 서쪽 비류강(沸流江)에 있는 누각의 이름이다. 「선루별곡」에 나타난 정재는 능파무·포구락·아박·향발·무고·무동·헌선도·오방처용무·검무·학무·사자무·선유락이다. 선유락과 사자무를 제외하면 1800년대에 성천에서 궁중 정재들이 연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선유락은 평양 지역에서 성립된 배따라기곡이 궁중으로 올라간 작품이다. 사자무는 성천 지역에서 시작되어 궁중 정재로 유입되는데, 이보다 앞선 시기인 김홍도의 연광정연회도에도 두 마리의 사자가 보인다.

1848년(헌종 14) 연행사의 일원이었던 이우준(李遇駿)이 쓴 『몽유연행록(夢遊燕行錄)』에서는 평안도 안주와 의주에서 본 정재를 소개하고 있다. 안주의 백상루(百祥樓)에서 베푼 기악(妓樂)에서는 포구락·발도가·항장무가 연행되었다. 발도가는 바로 선유락을 말한다. 의주 부윤 이유원(李裕元)이 관아에서 베푼 연회에서는 무고·포구락·발도가·항장무·승무 등이 연행되었다.

이와 같이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는 16세기 후반부터 궁중 정재가 전파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연행사 일행이 경유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임금의 명을 받아 먼 길을 가야 하는 사신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연향악이 발달하였다. 이를 위해 배따라기곡(선유락)·항장무·사자무·승무처럼 각 감영에서 독자적으로 연행하는 정재들도 개발했지만, 한편으로는 궁중 연향에 선상되었다가 돌아온 선상기들이 궁중 정재를 연행하기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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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계첩(耆社契帖)의 기사사연도(耆社賜宴圖) 세부
기사계첩(耆社契帖)의 기사사연도(耆社賜宴圖)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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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지역에 궁중 정재가 전파되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은 1867년(고종 4)에 진주 목사로 부임한 정현석(鄭顯奭)이 진주 교방에서 연행했던 노래와 정재를 모아 1872년(고종 9)에 편찬한 『교방가요(敎坊歌謠)』다. 이 책에는 육화대·연화대·헌선도·무고·포구락·검무·선악·항장무의 창사와 춤추는 순서와 모습이 그림으로 실려 있다. 또 수연장·오양선·수보록·근천정·수명명·하황은·성택·곡파·보태평·봉래의·교방가요·하성명·학무 등의 명칭을 명시하고 있고, 뒷부분에는 아박무·향발무·황창무·처용무·승무를 기술하였다.

한편, 지방의 관아 외에도 개인의 연회, 문희연, 기로연 등에서 정재가 연행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623년(인조 원년)에 이원익(李元翼, 1547∼1634)에게 하사된 궤장하사연의 장면을 그린 사궤장연겸기로회도(賜几杖宴兼耆老會圖)에는 오방처용무가 그려져 있다. 물론 궤장 하사를 기념하여 그린 것이므로, 국왕이 하사한 일등악(一等樂)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궁중 정재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궁중’이라는 특정 공간에서 왕실과 종친들이 관람하던 궁중 정재가 개인의 가택에서 개인을 위하여 연행되었다는 점이다. 공식적으로 궁중 정재가 일반 사가(私家)로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궁중 정재가 민간화해 가는 명확한 근거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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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락연도(湛樂宴圖)의 처용무
담락연도(湛樂宴圖)의 처용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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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먼저 연행되다가 궁중으로 유입된 연희는 검무·항장무·선유락·사자무·관동무 등인데, 궁중 정재에 포함되면서 일정한 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조선시대의 검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홍석기(洪錫箕, 1606∼1680)의 한시 「대랑의 검무를 보다(觀大娘舞劍)」이다. 이 시는 홍석기가 벼슬을 사직하고 청주에 머물 때 검무를 보고 지은 것으로, 두보(杜甫)의 「공손대랑의 제자가 검무 추는 것을 보고(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라는 시를 구체적으로 부연한 첨가시다.133)윤광봉, 『한국 연희시 연구』, 박이정, 1997, 76∼77쪽. 아리따운 아가씨가 서릿발 같은 칼날을 번쩍이며 검무를 추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연꽃무늬 보배로운 칼날이 비단옷을 비추니 / 蓮花寶鍔照羅紈

덧없이 오르내리는 모습 그리기 어려워라 / 變化低昻畵得難

비단 자리 휘두르는 무지개 세 자쯤 끌고 / 虹繞錦筵三尺掣

붉은 소매에 따르는 우레를 만인이 본다 / 雷隨紅袖萬人觀

교룡의 그림자 푸른 구름과 합쳐지고 / 蛟龍動影靑雲合

서릿발 같은 번쩍임에 한낮이 차갑구나 / 霜雪回光白日寒

아리따운 아가씨 장사 같은 줄 어찌 알리 / 安得蛾眉如壯士

푸른 서슬 당장에 오랑캐를 베일 듯해라 / 直將秋水斬樓蘭

최덕중(崔德中)의 『연행록』(1712)에도 평북 선천에서 두 동기(童妓)의 검무를 보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은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에서 정주에서 본 검무를 소개하였는데, 열세 살 난 기생이 검무를 추는 모습을 세상이 변한 세태로 파악하였다.

계사년 3월 18일 을미(乙未). …… 밤에 가학(駕鶴)이 어린 기생 초옥(楚玉)과 검무를 추었는데, 초옥은 더욱 절묘하였으며, 나이는 13세라 하였다. 검무는 우리들이 어렸을 때에는 보지 못하던 것으로, 수십 년 동안에 점차 성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팔도에 두루 퍼졌다. 기생이 있는 고을은 모두 그 복색을 갖추어 놓고 풍악을 울릴 때는 반드시 먼저 기생을 바쳤다. 이와 같은 어린아이들도 그 춤을 능히 추게 되었으니 자못 세변이었다.134)김창업,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계사년 3월 18일.

지방 관아에서 검무를 추기 시작한 시기는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창업이 선천·의주·정주·영변 등지에서 검무를 보았다는 기록과 이보다 앞선 1711년에 임수간(任守幹, 1665∼1721)이 통신 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쓴 『동사일기(東使日記)』의 경상도 의성과 부산에서 본 검무에 대한 기록은 1712년에 검무가 팔도에 두루 퍼졌다고 한 사 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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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시도의 검무
태평성시도의 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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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여기가 검무를 추는 모습은 단원 김홍도의 부벽루연회도와 혜원 신윤복(1758∼?)의 검무, 18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태평성시도, 19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신관도임연회도에도 나타나 있다. 특히 신윤복의 검무와 태평성시도에 묘사된 검무는 지방의 관아가 아닌 개인의 연회와 도성 안의 야외에서 연행된 것으로, 양반들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까지도 주변에서 검무를 관람하고 있어 검무가 전국적으로 계층을 초월하여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민간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검무가 궁중 정재로 편입된 것이 확인되는 최초의 기록은 1795년(정조 19) 봉수당 진찬 등의 행사를 기록하고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다. 이 책에는 두 기녀가 군관 복장을 하고 각각 두 개의 검을 가지고 서로 마주 보며 춤을 추는 광경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기록에도 검무가 연희 종목의 하나로 연행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후 1828년(순조 29) 『기축진찬의궤』에 따르면, 자경전 내진찬과 야진찬, 익일회작에서 두 명의 여기가 쌍검무를 추었다. 1868년(고종 5)의 무진년 진찬에서는 검기무를 네 명의 여기가 추고 있으며, 의궤 자료를 통해 검무가 진연, 진찬 때마다 빠지지 않고 공연 종목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검무는 조선 후기로 오면서 홍문연(鴻門宴) 고사와 결합하여 극 형식의 항장무로 성립되는데, 김정중(金正中)의 『연행록』(1792)에 용천에서 행해진 항장무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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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진찬도병의 여령 정재
무신진찬도병의 여령 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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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년 11월 9일 맑음. …… 이날 저녁에 세 사신 일행이 청류당 안에 모여 앉아 횃불을 높이 달고 뜰에서 여악을 구경하였다. 그 중에 난심(蘭心)이라는 부기(府妓)가 있어 나이 열일곱으로 항장무를 추어서 유객을 즐겁게 하니, 관서 42고을에서 용천의 검무를 일컫는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검무시(劍舞詩)를 지어서 난심에게 주었다.135)김정중, 『연행록』, 신해년 11월 9일.

이우준의 『몽유연행록』(1848)과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燕轅直指)』(1832)에도 각각 안주·의주와 선천의 항장무가 기록되어 있고, 정현석의 『교방가요』에도 검무가 수록되어 오늘날까지 진주 검무로 전승되고 있다. 19세기 사행 일기인 『연원일록』(1889)에도 선천에서 본 항장무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안주의 항장무와 비교하면서 선천의 연희가 더 뛰어났음을 지적하고 있다. 선천의 항장무는 다른 지방의 항장무보다 뛰어났으므로, 항장무가 궁중 정재로 편입되었을 때 ‘선천의 무극’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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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의 봉수당진찬도 세부(124쪽)
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의 봉수당진찬도 세부(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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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장무가 궁중 정재로 유입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1873년(고종 10)의 『계유진작의궤』다. 그러나 당시 공연되었던 정재 목록에는 빠져 있고, 상전(賞典) 부분에 항장무를 추었던 여기들에게 포목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항장무라는 명칭은 검기무(劍器舞)·건무(巾舞)·공막무(公莫舞) 등과 혼용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136)김은정, 「선천의 항장무를 보고」, 『문헌과 해석』 18, 문헌과 해석사, 2002, 264∼265쪽.

1700년을 전후로 전국적으로 확산된 지방 관아의 검무는 18세기 후반 무렵 항우와 유방의 홍문연 고사와 결합하여 극적·예술적 요소가 가미된 지방 관아 특유의 항장무로 성립되었다. 이후 선천을 비롯한 평안도 지역에서 경기(京妓)로 충원된 여기들이 궁중의 연회에서 연행함으로써 항장무가 궁중 정재로 편입된 듯하다.

선유락은 조선 후기의 파연에서 거의 빠짐없이 공연되던 정재로,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능행도를 통하여 1795년(정조 19) 봉수당 내진찬에서 공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선유락의 원형인 배따라기곡에 대한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대악부(大樂府) 가운데 이른바 배따라기곡이 있으니, 방언으로 ‘배가 떠난다’는 뜻이다. 그 곡조가 몹시 구슬퍼서 애끊는 듯하다. 자리 위에 그림 배를 놓고, 동기(童妓) 한 쌍을 뽑아서 소교(小校, 군교를 따라서 죄인을 잡는 사령)로 꾸미되 붉은 옷을 입히고, 주립(朱笠)·패영(貝纓)에 호수(虎鬚)와 백우전(白羽箭)을 꽂고, 왼손에는 활시위를 잡고 오른손에는 채찍을 쥐고, 먼저 군례(軍禮)를 마치고 첫 곡조를 부르면 뜰 가운데에서 북과 나팔이 울리고, 배 좌우의 여러 기생들이 채색 비단에 수놓은 치마를 입은 채 일제히 어부사를 부르며 음악이 반주되고, 이어서 둘째 곡조, 셋째 곡조를 부르되 처음 격식과 같이 한 뒤에 또 동기가 소교로 꾸며 배 위에 서서 발선하는 포를 놓으라고 창한다. 이내 닻을 거두고 돛을 올리는데 여 러 기생들이 일제히 축복의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에 “닻 들자 배 떠난다. 이제 가면 언제 오리. 만경창파에 가는 듯 돌아오소.” 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눈물질 때다.137)박지원, 『열하일기』,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월 5일조.

박지원이 소개한 배따라기곡은 자리 위에 그림배(畵船)를 놓고 기생들이 어부사와 배따라기를 부르며 행하는 연희로 선유락의 내용과 일치한다. 정현석의 『교방가요』에 실린 선악(船樂)과 『정재무도홀기』에 실린 선유락의 공연 내용과 비교하여 배따라기곡이 선유락의 원형임을 확인할 수 있다.138)사진실, 「배따라기곡에서 선유락까지」, 앞의 책, 257∼280쪽.

조선 후기에 선유락을 궁정에서 공연하게 된 계기는 평안도의 평양·안주·성천 등지에서 올라온 선상기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139)김종수, 「18세기 이후 내연의 악가무 차비 고찰」, 『한국 음악사 학보』 20, 한국음악사학회, 1998, 77∼86쪽.

선상기들이 지방에서 공연했던 배따라기곡과 궁중에서 공연했던 선유락은 차이가 있었다. 원래 멀리 뱃길로 사행(使行)을 떠나는 임을 보내는 여인의 정서가 집약된 배따라기 노래의 비장미 대신, 궁중 정재 선유락은 뱃놀이의 풍류를 자랑하는 화려한 볼거리로 성립되었다. 궁중 정재 선유락에서는 배가 떠나는 장면에서 배따라기 노래가 제거됨으로써, 기녀들이 배를 끌고 돌면서 춤추는 절정의 장면이 비장미가 아니라 뱃놀이의 풍류로 연결된다.140)사진실, 앞의 글, 281∼285쪽.

민간의 연희가 궁중 정재화한 또 다른 예로는 사자무가 있다. 『국연정재창사초록(國嚥呈才唱詞抄錄)』에 의하면, 사자무는 본래 성천의 잡극으로서 1887년(고종 24)에 비로소 궁중에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141)장사훈, 『한국 전통 무용 연구』, 일지사, 1977, 330쪽.

1795년(정조 9) 『화성성역의궤』의 낙성연도에 사자무와 호랑이춤이 보인다. 무대 위에서 쌍무고와 포구락 정재가 연행되고 있는 가운데, 무대 아래에서 세 명의 몰이꾼이 사자무와 호랑이춤을 놀리고 있다. 평안감사향연도 중 연광정연회도에도 두 마리의 가짜 사자가 등장하는 사자무를 확인할 수 있고, 「선루별곡」에도 사자무가 보인다.

사자무가 최초로 궁중에서 연행되었음을 전해 주는 기록은 1887년(고 종 24)의 『정해진찬의궤』다. 그러나 『정해진찬의궤』의 정재 악장 목록에는 사자무가 수록되어 있지 않고, 보상 내용을 적어 놓은 상전(賞典) 마지막 부분에 사자무 재인(才人) 이양식 등 네 명, 예비 차비 김재득에게는 모두 첩을 준다는 기록에서 사자무가 연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1902년(광무 6) 『임인진연의궤』에도 상전 부분에 사자무를 연행하고 상을 받은 사람은 재인 최복동 등 네 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사자무를 연행했던 주체가 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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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진찬도병의 여령 정재
무신진찬도병의 여령 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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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무(關東舞)는 1848년(헌종 14) 『무신진찬의궤』에 처음 보인다. 검무·항장무·사자무·선유락 등을 지방 관리들이 앞장서서 민간 연희로 정착시켰거나 창작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관동무는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창작한 이후에 생겨난 연희로, 헌종대에 궁중으로 유입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최영년의 『해동죽지(海東竹枝)』에 의하면, 관동무는 송강 정철이 최초 로 연출한 놀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석주(金錫胄, 1634∼1684)의 『식암집(息庵集)』에 따르면, 인조대와 숙종대 사이에 이미 「관동별곡」을 부르며 춤을 추는 관동무가 있었다.

이날 공의 집에서 두 기생이 일어나 춤을 추면서 일제히 「관동별곡」을 불렀는데, 박자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이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송옹(松翁)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은 뜻이 깊어서 속된 기생들에겐 해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이 이른바 “세상에서 오직 여인만이 안다.” 했음은 또한 부질없는 말이다. 그런데 이 상서(李尙書) 집의 어린 기생이 홀로 능히 이 곡조를 부를 수 있었다. 내가 가곡을 듣고 느끼는 바 있어 앞의 시운(詩韻)을 빌려 시를 지어 동리 공에게 올리고 화답을 구하였다.142)김석주, 『식암집』 권4, 「동리이상서은상수석경차광성태운박찬(東里李尙書殷相壽席敬次光珹台韻博粲)」.

이때 「관동별곡」에 맞추어 춘 춤이 관동무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관동별곡」의 박자에 맞추어 추었으므로 이 춤을 관동무로 볼 수 있고, 관동무는 두 명의 기생이 일어나 추는 춤임을 알 수 있다. 이후 관동무는 전하지 않다가 신응조(申應朝)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 곡조를 아는 강릉의 노기(老妓)를 찾아냄으로써 다시 연희가 부활되었다.

송강 정 상공 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백성들이 풍속에 어두운 것을 보고 「관동별곡」을 짓고 여러 기생을 시켜 놀이를 연출함으로써 민중으로 하여금 보도록 하니 풍속이 화하고 안락해졌다. 이후 계전 신 상공 응조가 부임하여 그 곡조가 폐하여진 것을 보고 그 곡조를 아는 사람을 탐문해 보니 강릉에 살고 있는 늙은 기생 한 사람이 알고 있었다. 그녀를 불러 다시 그 놀이를 베풂으로써 백성의 풍속을 창달시켰다고 한다. 지금은 아는 이가 없고 다만 「관동별곡」이라고만 일컫는다.143)최영년, 『해동죽지』 중편, 관동곡(關東曲).

여러 기록을 통하여 궁중으로 유입되기 전의 관동무는 소수의 기녀들이 전승했던 연희였음이 확인된다. 강원도 관찰사였던 정철의 작품으로 강릉기(江陵妓)들의 연희였던 「관동별곡」 창과 관동무는 민간에서 먼저 연행되다가 궁중 정재로 유입된 것이다.

그런데 1848년(헌종 14) 통명전의 야진찬(夜進饌)에서 연행된 관동무는 『식암집』의 기록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때의 진찬을 병풍으로 그린 무신진찬도병(戊申進饌圖屛)에 묘사된 관동무에서는 여기 네 쌍이 소매를 길게 늘어뜨리고 서로 마주 보면서 춤을 추고 있다.

이를 통해서 지방의 연희가 궁중으로 유입될 때는 궁중 정재의 양식에 맞게 변형되어 수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지방 관아나 민간의 연희들이 궁중 정재로 유입될 때는 민간의 양식 그대로가 아니라 변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연회의 규모나 격조 그리고 정재 향유자의 사회적 지위 면에서 월등히 앞서는 궁중에서 정재가 연행되기 때문에, 민간이나 지방 관아에서 연행되던 양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다.144)조선시대 정재의 전개 양상에 대해서는 전경욱, 앞의 책, 288∼30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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