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3장 판소리의 전개와 변모
  • 2. 판소리의 전개 양상
  • 판소리의 형성(17∼18세기)
유영대

판소리의 기원을 살펴보는 견해는 상당히 다양하다. 판소리가 설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김태준의 견해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마당의 음악에서 비롯되었다는 정노식의 견해도 20세기 전반에 제시되었다. 한편 판소리에서 문장체 소설이 비롯되었다는 견해와 문장체 소설에서 판소리가 발생하였다는 견해가 대립적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정노식의 견해를 좀 더 치밀하게 논증한 서대석의 서사 무가(敍事巫歌) 기원설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다. 무당의 굿이나 무가에서 판소리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판소리 광대가 대개 무당의 남편으로 굿판에서 장단을 맞추거나 창악 잡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판소리의 초기 생성 과정은 무가의 굿과 관련이 있을 법하다. 이와 함께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戲) 기원설과 중국 강창 문학(講唱文學) 영향설, 그리고 최근 우희(優戲) 영향설147)전경욱, 『한국의 전통 연희』, 학고재, 2004.도 판소리 기원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주장들이다.

판소리 광대가 늘어나고 전국 방방곡곡을 무대로 삼게 된 것은 조선 후기 민중들의 삶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지주 제도가 확대되면서 소작농 과 지주의 구분이 더욱 심화되었고, 토지 소유가 집적되면서 대부분의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농촌에는 고리대금이 성행하여 민중들의 삶은 더욱 황폐화되었다. 그리하여 심한 흉년이라도 들게 되면 농민들이 농토를 떠나는 이농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선 후기 유랑 예인 집단의 증가 원인을 분석한 김흥규는 농토에서 이탈한 농민들의 수효가 증가하면서 도적이 되거나 사찰 등에 기탁하여 정역(丁役)을 면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가진 예능 기술과 곡예를 수단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결론지었다. 이들은 일정한 거처 없이 내륙 지방의 장터, 임금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광산촌, 세곡을 수납하던 창촌(倉村)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조선 후기 유랑 예인 집단의 모습은 변강쇠가에 중이나 초라니패·풍각쟁이패·각설이패·사당패·판소리패 등의 모습으로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탈춤 미얄 과장도 유랑민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민중 예술은 유랑 예인 집단의 증가와 활발한 활동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초기 판소리의 향유 기반이 민중이었으므로 그 사설이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만하다. 청중이 민중이었던 만큼 청중의 정서에 맞는 거칠면서도 건강한 골계담(滑稽談)이 판소리 사설로 채용되었고, 곡조도 단순했을 것이다. 판소리 광대는 소리로써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노래에 세련미를 더할 필요가 있었다. 깊은 산속의 암자에서 10년씩 소리 공부를 하고 폭포수와 소리 싸움을 했다는 것은 광대로서 거쳐야만 했던 수련 과정이기도 하였다. 더늠을 개발하고, 너름새를 고안하고, 청중을 사로잡을 방법을 연구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명창에게 정착된 사설은 그의 제자에게 전수되었다.

판소리는 17세기경에 형상화된 음악성이 강조되는 시간 예술이며, 동화적 내용의 사설이 연극과 결합하여 이루어진 연행 예술이다. 애당초 판소리라는 예술 양식의 연행 행위는 판놀음의 다양한 레퍼토리 가운데서 특히 창우(倡優)가 맡아서 부르는 비교적 긴 노래였다. 그런데 18세기경에 이 르러서 판소리는 판놀음의 여러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로 존재하는 종속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예술 형태가 되었다. 창자와 고수라는 아주 간단한 구성원으로 하나의 팀을 이룰 수 있었다는 형태적인 단순성도 있지만, 좀 더 중요한 것은 판소리가 가진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나서 판소리 공연만으로도 충분히 흥행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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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굴과 폭포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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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가 판놀음의 부속적인 양식에서 완성도 높은 개별적 양식의 예술 작품으로 격상되고, 다양한 계층의 청중들을 상대로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되자 갈수록 더 많은 창우와 광대가 필요하게 되었다. 한편 많은 광대 지망생이 생기게 되면서 소리 수련의 기본적인 텍스트로 창본(唱本)이 성립하게 되었다.

18세기경의 명창으로는 최선달(崔先達)과 하한담(河漢潭)을 들 수 있다. 우춘대(禹春大)는 이들보다 약간 후대의 명창인 듯하다. 이들은 대부분 무 부(巫夫)의 조직을 통하여 등장하였으며, 호남의 음악과 각 지역의 판소리 형태를 결합시키는 소임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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