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3장 판소리의 전개와 변모
  • 2. 판소리의 전개 양상
  • 판소리의 성장(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
유영대

판소리가 성장하던 19세기 초반에 민중 의식은 더욱 성장하여 판소리를 통해 지배 체제를 풍자하고, 신분 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며, 경제적 궁핍의 부당성을 폭로하였다. 19세기 초반의 명창으로 권삼득, 고수관,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등이 있다. 이 시기의 명창들은 자신이 개발한 독창적인 더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신의 후배와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판소리를 노래하는 방법도 더욱 세련되었다. 특히 전체적인 내용을 무미하게 낭송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을 확대, 부연하여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연행 형태를 띠어 부분이 발전하는 현상도 일반화되었다.

이 시기 판소리는 이야기 전부를 전체적으로 통일되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과 부분을 강조하여 장면화한 후 그 장면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해당 부분이 갖는 의미를 확대하고 강화하며 질서화하여 보여 주게 되므로 판소리 광대에게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통일성’이 아니라 각 부분의 상황을 개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더늠이 부분적으로 확대, 발전되면서 전체 내용과는 맞지 않는 모순을 범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부분의 독자성’이나 ‘장면 극대화’는 이 시기 판소리의 작시 기법이자 연행 문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특히 중요한 사항으로 청중이 양반으로까지 확대되어 양반들도 판소리를 즐겨 들었으며, 판소리를 듣고 시를 쓰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예컨대 유진한(柳振漢)은 1754년에 춘향가를 듣고 감동하여 한시로 「가사춘향가이백구(歌詞春香歌二百句)」(만화본 춘향가)를 지었다.

판소리 성장기의 중요한 특징으로 양반층이 청중으로 편입된 점을 들 수 있다. 만화본 춘향가를 통해 양반들이 판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양반층의 판소리 향유는 더욱 광범위해진다. 과거에 급제하면 유가(遊街)를 하고, 문희연(聞喜宴)을 베풀었는데, 이때 광대들을 불러 놀이를 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풍속이었다. 송만재(宋晩載)는 1843년 아들이 과거에 급제했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광대를 부를 수 없게 되자 「관우희(觀優戲)」라는 한시를 지어 문희연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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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객재담(歌客才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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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들도 과거 시험에 맞추어 서울로 몰려와서 자신의 예술을 팔았던 것으로 보아 판소리가 양반층의 청중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양반들이 판소리를 감상하는 수준도 대단히 높았다. 신위는 고수관의 판소리를 들은 후 그 감회를 관극시(觀劇詩)로 남겨서 당시의 정황을 전해 주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거칠던 판소리 사설이 전아한 형태로 변모되어 가기도 하고, 양반들의 가치 규준을 인정하는 내용도 불리게 되었다. 판소리의 사회적 기반이 여전히 민중에게 있었고 발랄하고 건강한 정서가 담겨 있었지만, 양반들이 중요한 청중으로 등장하면서 사설과 창곡에서 변화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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