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3장 판소리의 전개와 변모
  • 2. 판소리의 전개 양상
  • 일제강점기의 판소리와 창극
유영대

19세기 후반부터 나타난 판소리 사설과 창곡에서의 변화는 20세기 초반에 이르면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 20세기 들어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19세기 말까지 판소리를 지탱해 준 양반층이 해체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예들은 일제의 식민 지배 문화 정책에 이끌려 일본의 통속 예술에 경도되면서 지금까지 후원자 역할을 자임하던 판소리와 판소리 명창을 방기하였 다. 더욱이 판소리는 일제강점기가 진행되면서 급격하게 밀려오는 식민주의 문화 정책으로 말미암아 지지 기반을 상실해 갔다.

이 때문에 광대들은 판소리를 지탱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민중에게 다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광대들은 지금까지 구가해 왔던 우아한 예술을 버리고 민중 취향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쉽고도 골계적인 사설의 회복과 계면조 전통으로의 회귀였다. 20세기 전반기의 판소리가 계면조로 많이 흘러간 것은 판소리 대상 청중의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그동안 양반의 문화와 취향에 익숙해 있던 고급 광대에게는 굴욕적인 것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였다.

그 후로 이와 같은 양상이 지속되면서 한편으로 악화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 일환으로 우리의 전통 문화에 대한 조직적인 압살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판소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판소리나 진국명산과 같은 단가마저도 애국심을 고양시킨다는 명목으로 금지시켰으며, 심지어는 일본어로 부르게 했다는 증언도 있다. 게다가 판소리가 창극이라는 형태로 성급하게 무대화되면서 어설픈 신파의 영향을 받아 기형적인 형태로 변화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판소리는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등 뛰어난 판소리 명창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판소리 자체의 위상이 심하게 손상되고 약화되었다.

20세기 초반 무렵부터 새로운 판소리에 대한 기대로 판소리가 창작되었다. 기존의 판소리 열두 마당 외에 새로 만들어진 판소리를 창작 판소리라고 한다면, 최초의 창작 판소리는 원각사에서 김창환이 1904년에 공연하였다는 최병두 타령이라고 할 수 있다. 최병두 타령은 강원도 관찰사 정 아무개라는 사람이 그 고을 양민 최병두를 잡아다가 곤장으로 때려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는 실화를 토대로 만든 판소리이자 창극이다. 이인직은 이 작품을 신소설 『은세계』로 각색하였다.

반일의 정서를 노래한 창작 판소리 열사가는 해방을 전후하여 창작되 고 수용되었다. 열사가는 지금도 호남 지역에서는 쉽게 들을 수 있는 판소리의 하나로,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의미를 지닌 예술 형태로 존재해 왔다. 열사가에 포함된 인물로는 이준,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등이 있으며, 일제에 대하여 폭력적 저항을 했던 인물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고 기리는 내용이다. 대체로 일제 지배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항일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열사가를 창작하여 보급시킨 인물로는 박동실 명창이 대표적이다. 특히 심청가에 능했던 박동실은 이념적 성격이 강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직후 그에게 열사가를 배운 사람으로는 한승호를 들 수 있으며, 해방 후에 이 노래가 유행처럼 번져서 수많은 창자들이 해방 직후의 반일 정서를 노래하였다. 그 후 김연수 명창은 이은상의 사설을 토대로 이순신전을 만들어서 열사가의 범주를 확대시켰다. 이순신전이 열사가에 포함되면서, 일제에 저항한 애국열사가라는 열사가의 범주는 이순신 등 역사적 인물의 행적을 노래하는 역사가로 의미가 확대되기도 하였다. 명창 한승호, 김동준, 이성근, 송영석, 안숙선, 정순임 등이 열사가를 잘 불렀다.

열사가는 대체로 비분강개의 톤으로 진행되며 골계적 아름다움은 비교적 드물다. 안중근 열사가는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권총으로 쏘는 장면이 엇모리 장단으로 경쾌하게 노래되며, 그가 죽을 무렵 어머니와 상봉하는 대목은 진계면으로 불러 비장함이 극치에 이른다. 판소리로서의 곰삭은 형태는 보여 주지 않으나 나름대로의 이념적 지향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준 열사가, 윤봉길 열사가, 유관순 열사가 등의 작품은 일제 침략을 비분강개의 톤으로 노래하여 적개심을 고취하고 있다. 창작 판소리의 미의식은 대부분 이렇듯 거칠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슬픔을 과장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판소리가 지닌 골계를 포함한 다양한 미의식을 포괄하고 있지는 못하다.

한편, 이 시기 판소리의 변모는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판소 리가 가지는 시대적 의의가 소멸되고 한낱 골동적인 것으로 존재하다가 창극(唱劇)으로 변화한 것이다. 창극은 연극처럼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각기 맡은 배역에 따라 연기를 하면서 판소리를 하는 음악극이다. 판소리는 일정한 음조로 읊조리듯 노래하는 서사 무가와는 달리 다양한 음조와 배우의 역할이 강조되기 때문에 그 사설은 강한 서정성과 희곡적 특징을 가진다. 등장 인물 간의 대화·독백·행동 등에서 광대들은 어차피 배우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쉽게 분창(分唱)하여 무대를 얻게 되었다. 창극은 판소리가 가지고 있는 인물 묘사의 다양한 특성 때문에 여러 사람이 등장하여 공연하는 연극으로 쉽게 변화하였다.

확대보기
일제강점기의 창극 공연 장면
일제강점기의 창극 공연 장면
팝업창 닫기

최초의 창극은 1902년 가을, 고종의 즉위 40년을 경축하는 행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신식 극장인 원각사에서 김창환이 전국의 남녀 명창과 함께 공연한 춘향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행사는 두 번 연기된 끝에 유야무야되었고, 1903년 가을 강용환에 의해 춘향전이 공연되었다. 무대 천장에 전등을 밝히고 흰 포장을 둘러친 다음 여러 창자들이 포장 앞에 둘러서서 각자 맡은 배역의 소리를 하였다.

원각사가 해체된 후 명창들은 협률사를 구성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창극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1933년에 조선 성악 연구회가 결성되고 창극은 새롭게 변화하였다. 1935년에 공연된 정정렬 편극의 춘향전은 무대를 제대로 갖추고 새로운 대사를 대거 삽입하여 연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후 조선 성악 연구회는 직속으로 ‘창극좌’를 두어 여러 편의 창극을 히트시켰다.

창극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하여 보여 주는 연극으로 일정하게 정체성을 확립했다. 창극은 창극 고유의 입지가 있으며 관중들은 창극을 일종의 연극과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창극에 참여한 명창들은 뛰어난 소리와 너름새로 판을 휘어잡으며 연극의 맥락에 흡수되었고, 판소리와는 다른 것으로 그 위상을 확보했다. 다만 창극이 빠른 시간에 무대를 확보하면서 우리에게 전통적으로 있어 온, 말 놓는 방식이나 동작을 지칭하는 ‘버슴새’를 충분히 살펴서 적용하지 않았으며, 성급하게 신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창극에 관한 비판적 입장은 “창극은 판소리여야 한다.”라는 주장과 “창극은 연극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굳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창극이 주로 판소리 오대가를 중심으로 판소리의 효과를 높이고자 단순히 역할을 분담하여 노래하고 연기하는 정도로 인식되었다. 정노식은 ‘창극’이라는 단어를 주로 판소리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지만, 일반적으로 두 장르는 다른 범주로 인식되었다. 지금도 유성기 음반으로 남아 있는 빅터판 춘향가나 폴리돌판 심청가는 창극의 원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초창기에 창극 대본을 만들었던 정정렬, 김연수, 임방울, 박동실은 모두 창극과 판소리를 병존하는 별개의 장르로 인식하였다.

내용의 조악성과는 별개로 1940∼1950년대 전반기에 창극은 협률사나 창극단의 형태로, 혹은 여성 국극처럼 속화된 형태로 왕성하게 공연되었다. 일제가 전통 문화 말살 정책을 집요하게 시도한 끝 무렵임에도 불구하고 창극이라는 전통적인 양식이 새로이 유입되는 문화와 병존하면서 존재할 수 있었다. 창극을 제외한 다른 볼거리가 그다지 없었다는 점도 창극의 번성에 일정 부분 기여하였다. 1950년대까지는 연극, 영화, 라디오 등 문화 행위나 그것을 전달해 주는 매개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새롭게 창작된 창극 작품들이 크게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유행가와 팝송의 붐이 일었고, 본격적인 연극이나 영화 등 다채로운 대중 문화의 충격으로 창극은 급격하게 설 자리를 잃어 갔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