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4장 전통 연희 집단의 계통과 활동
  • 2. 삼국시대의 연희 담당층
  • 불교를 배경으로 하는 연희자
박전열

종교적 성격의 연희 담당층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삼국유사』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있다. 신라의 승려 또는 반승반속(半僧半俗)의 신분인 재가승(在家僧)으로서 연희에 관련되거나 종사하는 경우에 주목하게 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는 우인이 놀리던 큰 박을 본떠 연희 도구를 만든 후 무애라고 이름짓고, 이것을 가지고 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어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교화시켰다고 한다. 결국 무애희(無㝵戲)는 전문 연희자인 우인들의 연희 도구를 활용해서 만든 무애를 사용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던 연희인데, 대중에게 불교를 포교하기 위한 방편으로 연행되었다. 그런데 원효가 불교의 계를 범하여 요석 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후, 속인의 옷을 입고 이 연희를 하며 돌아다녔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때의 원효는 바로 재승의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다.

다음 인용문들은 삼국시대에 원효 외에도 재승 계통 연희자들이 활약하고 있었음을 전해 준다.

(가) (대덕 경흥이) 갑자기 병이 나서 한 달이나 되었는데, 한 여승(女僧)이 와서 보고 화엄경 가운데 착한 벗이 병을 치료해 준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스님의 병은 근심으로 생긴 것이니 즐겁게 웃으면 나을 것입니다.” 하고, 십일상(十一相)의 면모(面貌)를 만들어 각각 우스꽝스러운 춤(俳諧之舞)을 추게 하니 뾰족하기도 하고 깎은 듯도 하여, 그 변하는 모습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모두 너무 웃어서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에 경흥의 병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깨끗이 나았다. 여승은 마침내 문을 나가 남항사(삼랑사 남쪽에 있음)에 들어가 숨어 버렸는데, 가졌던 지팡이만 장정 한 불화(佛畵) 십일면보살상의 앞에 있었다.152)『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 경흥우성(憬興遇聖).

(나)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살았는데, 피리를 잘 불었다. 일찍이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며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 가기를 멈추었다. 이로 인하여 그 길을 월명리(月明里)라 했다.153)『삼국유사』 권5, 감통,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다) 법민왕이 하루는 차득공을 불러 “네가 재상이 되어 백관을 고루 다스리고 사해를 태평케 하라.”고 말했다. 공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만일 소신을 재상으로 삼으신다면 신은 나라 안을 몰래 다니면서 백성의 부역이 괴로운가 수월한가, 조세가 가벼운가 무거운가, 관리들이 청렴한가 흐린가를 살펴본 후에 직책을 맡겠습니다.”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그래서 공은 승복을 입고 비파를 들고 거사의 모습을 한 다음, 서울을 나와 아슬라주·우수주·북원경을 지나 무진주에 이르러 촌락을 순행했다.154)『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문무왕 법민(法敏).

(가)는 신라 승려 경흥이 병이 났을 때 여승이 십일상의 면모를 만들어 각각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게 하니 그 변하는 모습을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고, 모두 너무 웃어서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는 내용이다. 관음보살의 화신인 이 여승은 바로 인형희의 연희자로서 역시 재승의 면모를 보여 준다.

(나)는 피리의 명수였던 승려 월명사에 얽힌 이야기로, ‘재승’ 월명사의 면목을 살펴볼 수 있다.

(다)는 668년의 일로, 차득공이 승복을 입은 채 비파를 들고 거사로 변장하여 민간을 순행하였다는 이야기다. 당시 승복 차림에 비파를 연주하면서 민간을 돌아다니는 거사들이 있었기에, 이러한 변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서의 거사는 바로 불교적 색채를 띤 떠돌이 연희자다.155)윤광봉, 『유랑 예인과 꼭두각시놀음』, 밀알, 1994, 21∼22쪽 ; 박전열, 「내방자 설화의 비교 연구」, 『일본학보』 26, 한국일본학회, 1991. 이들의 구체적인 연희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일본에서 헤이안(平安)시대(794∼1192)부터 활동한 비파 법사(琵琶法師)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비파 법사는 비파를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길거리 연희자였다.

이 밖에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평왕대의 승려 담수(淡水)는 날현인 (捺絃引)을 만들었다고 한다.156)『삼국사기』 권32, 잡지(雜志)1. 이상의 예를 통해서 신라시대에 연희와 악기 연주를 잘하는 승려(재승)들이 존재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157)전경욱, 『한국의 전통 연희』, 학고재, 2004, 126∼128쪽.

현재는 신라의 승려들이 연희를 행했던 기록만 남아 있지만, 고구려나 백제의 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백제인 미마지가 오(吳)나라에서 배워 612년 일본에 전했다는 가면극인 기악(伎樂)의 존재를 통해 짐작할 때, 백제에도 기악 같은 불교 연희를 담당하는 재승들이 있었던 듯하다. 기악의 내용은 13세기(1233) 일본의 악사 집안에 전해지던 문헌인 『교훈초(敎訓抄)』에 소개되어 있는데, 절에서 불사 공양의 무곡으로 연출되던 교훈극으로서 가면을 착용하는 묵극이었다.158)이혜구, 「산대극과 기악」, 『한국 음악 연구』, 국민음악연구사, 1957.

미마지라는 이름이 우리나라 사료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미마지의 출신지가 백제라는 점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 그러나 그의 신분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악사 출신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미마지는 사서의 판본에 따라 ‘味麻之’ 또는 ‘未摩之’로 표기된다. 그 이름 자체의 의미는 고승 또는 예술가로 풀이된다. 즉, 아악의 고서인 『교훈초』에는 이를 ‘未麻之’라고 했다. 백제의 인명이 아니라 제3국인의 인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티베트 불교어, 즉 고범어(古梵語)이며, ‘mimasi’란 불사인(不死人)이라는 말로 예술가를 가리키는 보통 명사─서양에서 쓰는 유명한 말 “Ars Longa Vita Brevia(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와 같은 뜻─라고 하며, 고승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도 한다. 또한 부처의 뜻을 깨달아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인 활불(活佛)이며, 이는 곧 고승(高僧)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159)田邊相雄, 『日本音樂史』, 東京: 電氣大學出版部, 1963, 74쪽. 이러한 견해는 미마지의 신분이 불교와 관련되어 있는 연희자임을 알게 해준다.

미마지의 백제에서의 신분이나 활동 상황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기에 연희자로서의 활동 내역을 알 수 없지만 불교인이자 연희자로서 일본에 기악을 전파하고 그곳에서 후손을 낳고 여생을 보낸 사실은 여러 가지 기록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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