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4장 전통 연희 집단의 계통과 활동
  • 3. 고려시대의 연희 담당층
  • 재승 계통의 연희자
박전열

고려에서는 불교 국가답게 불탄일·우란분재·연등회·수륙재 등 여러 불교 행사에서 성대한 연희가 베풀어졌다. 재승 계통의 연희자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활동하고 있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이들의 활약이 더욱 컸을 것이다. 이 시기에 중국과 일본에서도 재승 출신 연희자들이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164)전경욱, 「재승 계통의 연희자」, 『민속학 연구』 11, 국립민속박물관, 2002.

『고려사』에 따르면, 1056년(문종 10)에는 불교에 속한 무리이면서도 장사를 하고 기생들과 뒤섞여 놀며 속인의 복장을 하고 절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공연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165)『고려사』 권7, 세가7, 문종 10년 9월. 이들은 승적에 이 름을 올려놓고 승려 행세를 했지만, 실제로는 속인과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하는 짓은 조선시대의 사장(社長)·사당(社堂)·거사(居士)와 흡사하다.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물건을 매매하고, 잡인들과 어울려 술주정을 하며, 놀음청에 뒤섞여(기생들과 시끄럽게 섞여서) 우란분을 모독하고 있다.”는 말을 통해 재승 계통 연희자들이 우란분재에서 기생들과 함께 공연하면서 색정적인 행위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재승 계통 연희자들이 우란분재뿐만 아니라 연등회·수륙재·불탄일 등의 불교 행사에서도 연희를 공연했을 것이다.

(가) 고종 32년(1245) 4월 8일에 최이가 연등회를 하면서 채붕(綵棚)을 가설하고 기악(伎樂)과 온갖 잡희를 연출시켜 밤새도록 즐겁게 놀게 하니 도읍 안의 남녀노소 구경꾼이 담을 이루었다.166)『고려사』 권129, 열전42, 최충헌.

(나) 예종 11년(1116) 계묘일에 왕이 천수사에 가서 재(齋)를 베풀어 낙성식을 거행했다. 이때 3일 동안이나 채붕과 기악이 길에까지 미쳤다.167)『고려사』 권14, 세가14, 예종 11년 3월.

(다) 예종 13년(1118) 정묘일에 안화사 중수 공사가 준공되었으므로 5일 동안 재를 베풀어 낙성식을 거행했다. 경오일에 왕이 친히 가서 낙성식을 구경하는데, 장막이 잇대지고 기악이 울렸으며 남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168)『고려사』 권14, 세가14, 예종 13년 4월.

(가)에 따르면, 연등회 때 채붕을 가설하고 기악과 온갖 잡희를 공연했는데, 이는 대단히 큰 규모의 연희였음을 의미한다. 4월 8일의 연등회는 석가탄신일을 축하하는 불교 행사였으므로,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다양한 불교 연희가 연행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재승과 재승 계통의 연희자들이 불교 연희와 잡희 등을 공연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나)와 (다)는 불교 사원의 낙성식에서 기악을 연행한 사실을 전해 준다. 이 기악을 연행한 연희자 가운데도 재승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우란분재·수륙재·연등회·낙성식 등에서 기 악과 잡희가 연행되었다. 불교 연희인 기악은 절에 소속되어 있던 재승과 재승 계통 연희자들이 연행했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문종 때의 기록에 따르면, 일반 연희자들뿐만 아니라 재승 계통의 연희자들도 잡희를 연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신라의 원효가 연희했다는 무애희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전승되었다. 고려 말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에 무애희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이를 보면 원효의 무애희가 고려 후기에도 연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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