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4장 전통 연희 집단의 계통과 활동
  • 3. 고려시대의 연희 담당층
  • 서역 계통의 연희자
박전열

서역인들은 당나라 이전부터 중국에 들어와 연희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부터 서역 계통 연희자가 발견되고 있다. 각저총의 벽화에 그려진 씨름꾼 중 한 사람은 그 모습이 분명히 서역 계통의 외국인이고, 안악 3호분(동수묘)의 벽화 중 후실의 무악도(舞樂圖)에도 외국 출신으로 보이는 춤꾼이 그려진 점으로 보아 서역인들이 고구려에 와서 산악·백희를 연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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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저총 씨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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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는 의종(재위 1147∼1170) 때 법가위장(法駕衛仗)과 연등위장(燃燈衛仗)을 규정한 기록이 있다.169)『고려사』 권72, 지26, 여복1, 의위(儀衛), 법가위장. 법가위장의 말미에는 “안국기(安國伎) 1부(部), 잡기(雜伎) 1부 각 40명이 좌우로 갈라서 며, 고창기(高昌伎) 1부 16명은 왼쪽에 서고, 천축기(天竺伎) 1부 18명은 오른쪽에 서며, 연락기(宴樂伎) 1부 40명이 좌우로 갈라선다.”는 내용이 있으며, 연등위장의 말미에는 “인가교방악관(引駕敎坊樂官) 100명이 좌우로 갈라서며, 안국기·잡기 각각 40명이 좌우로 갈라선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까지도 서역악인 안국기·고창기·천축기가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서역악이 잡기와 함께 열거되어 있고, 인원도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이 시기 서역악에 속하는 음악과 연희가 매우 다채로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서역악을 연행하려면 서역 출신 음악인과 연희자도 있었을 터인데, 고려 가요 「쌍화점」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 가요 「쌍화점」에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 가고신댄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여이다. 이 말이 이 점(店) 밖에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조고맛감 삿기광대 네 말이라 호리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 시의 서술자는 여성인데 쌍화점·삼장사·우물·술집에 가니 회회아비, 사주(社主), 용, 술집아비가 각각 자기 손목을 잡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문을 낼 만한 주체로 삿기광대, 삿기상좌, 드레박, 싀구박을 들고 있다. 그런데 회회아비가 사주와 삿기상좌의 관계처럼 삿기광대와 짝을 이루는 어른 광대인지, 만두집(쌍화점) 주인인지, 만두집의 손님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의 존재는 이미 고려시대에 서역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이병기는 “쌍화점이라는 말은 쌍화떡 파는 점이란 말인데, 어른 광대인 회회아비가 쌍화점을 경영함으로 하여 …….”라고 하여, 회회아비를 어른 광대 즉 연희자로 보았다. 그렇다면 이미 고려시대에 서역 계통 연희자가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170)이병기, 「시용향악보의 한 고찰」, 『고려 가요 연구』, 국문학연구총서 2, 백문사, 1979, 20쪽.

또한 『고려사』에는 1283년(충렬왕 9)에 “원나라의 연희자(倡優) 남녀들이 왔는데, 왕이 그들에게 쌀 3석을 주었다. …… 대전에서 연회가 있었는데 원나라의 연희자들이 백희를 연행했다.”는 내용도 보인다.171)『고려사』 권29, 세가29, 충렬왕 9년 8월.

고려 말 이색이 지은 한시 「구나행」에 “金天之精有古月 或黑或黃目靑 熒(금천지정유고월 혹흑혹황목청형)”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금천(金天)은 서쪽 하늘을 말하며, ‘고월(古月)’은 ‘호(胡)’의 파자(破字)로 서호(西胡) 즉 서역이다. 그러므로 “서방에서 온 저 호인(胡人)들은, 검기도 하고 누렇기도 한 얼굴에 눈은 파란색이네.”라고 풀이할 수 있다. 결국 눈이 파란 서역인이 직접 가면희를 했거나 아니면 연희자가 서역인의 형상을 한 가면을 쓰고 놀이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내용을 흔히 ‘서역의 호인희’라고 한다.

회회(回回)는 고대 서역 일대에서 활약하던 부족인 회흘(回紇) 또는 회골(回鶻)의 전성어(轉聲語)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본래 회흘은 터키 족 계통에 속한 흉노의 후예인 위구르 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재 중국의 신장성(新疆省)은 위구르 족 자치구로서, 이곳부터가 우리가 말하는 서역이다. 원나라 때에 이르러 회회는 허시(河西)로부터 파미르 고원 서쪽 카스피 해까지의 광활한 지역에 사는 여러 종족을 가리켰는데, 이들은 색목인(色目人)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원나라 때부터 회회는 이슬람교도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결국 넓은 의미의 회회는 위구르를 포함하여 서역의 이슬람교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원나라의 판도 안에 있던 서역인들이 고려에 많이 들어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72)박용운, 『고려시대사』, 일지사, 1991, 605쪽. 고려 말에 이르러 서역의 이슬람교도들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서역의 이슬람교도 색목인들은 원 제국에서 몽고인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를 누리면서 원 제국의 내정은 물론이고, 원정(遠征)을 비롯한 대외 관계에서 두뇌 구실을 했다. 이슬람교도들은 원 제국의 고려 경략(經略)에 동참하여 사신이나 역관, 서기, 근위병, 시종 무관 등 여러 가지 직분으로 고려에 공식적으로 파견되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우리나라 연희자는 본래 중국의 배우 환술자류(幻術者流)인데, 고려 말 노국 대장 공주가 올 때 따라온 것이라고 전한다.”는173)이수광, 『지봉유설』 권18, 기예부, 잡기(雜技). 내용이 보인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중국에 서는 한대 이후 계속 서역 출신 연희자들이 많이 활동하므로, 여기서 말하는 원나라의 배우 환술자 중에는 서역 계통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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