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4장 전통 연희 집단의 계통과 활동
  • 3. 고려시대의 연희 담당층
  • 북방인 계통의 수척
박전열

우리나라의 백정(白丁)인 수척(水尺)은 원래 양수척(楊水尺)과 달단(韃靼)을 비롯한 북방인의 후예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백정은 1423년(세종 5)에 그 이전의 재인과 화척을 통칭한 것이다.174)『세종실록』 권22, 세종 5년 10월 8일 을묘. 『세조실록』에는 “백정을 화척이나 재인 혹은 달단이라 부르는데,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다. …… 본래 우리 민족이 아니다.”라고 하여,175)『세조실록』 권3, 세조 2년 3월 28일 정유. 이들이 본래 우리 민족이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 『성종실록』에는 “우리나라의 재인과 백정은 그 선조가 호종(胡種)이다.”라고 하여,176)『성종실록』 권252, 성종 22년 4월 23일 무진. 재인과 백정이 호종, 즉 북방인의 후예임을 밝히고 있다.

『고려사』에 “화척은 곧 양수척이다.”라는177)『고려사』 권134, 열전47, 신우 8년 4월. 내용이 있고, 『중종실록』에도 “우리나라에는 특별한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사냥과 고리버들 제품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아 편호(編戶)의 백성과 다르다. 이를 백정이라고 부르는데 곧 전조(前朝, 고려)의 양수척이다.”178)『중종실록』 권12, 중종 5년 8월 4일 정해.라는 내용이 보인다. 특히 『중종실록』의 “정재인(呈才人)·백정 등은 본시 일정한 생업이 없는 사람들로서 오로지 배우의 잡희를 직업으로 하여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식량을 구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겁탈을 자행한다.”179)『중종실록』 권95, 중종 36년 5월 14일 기해.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전기에 백정들은 소를 잡을 뿐 아니라 연희에도 종사했다.

1469년(예종 1)에 양성지가 올린 상소문에는 재인과 백정은 양수척의 후예인데, 당시까지도 고려시대의 양수척이 하던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풍습과 짐승을 도살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였다.180)『예종실록』 권6, 예종 1년 6월 29일 신사.

북방인들은 부단히 한반도로 흘러 들어왔다. 삼국통일 당시의 나당(羅唐) 전쟁에 많은 거란인과 말갈인이 당나라 군사와 함께 신라를 공격해 왔 던 사실과 신라의 흑금서당(黑衿誓幢)이 말갈인으로 구성된 것을 『삼국사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후백제를 공격하던 고려 태조 왕건의 군병 속에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등의 번군(蕃軍)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도 여진·거란인이 귀화하거나 포로가 되어 왔으며, 거란의 귀화인과 포로들을 수용하는 거란장(契丹場)도 있었다.181)강만길, 「왕조 전기 백정의 성격」, 『조선시대 상공업사 연구』, 한길사, 1984, 311쪽.

양수척은 그들이 유기장(柳器匠)과 창우(倡優)를 업으로 삼은 데서 비롯된 명칭인 듯하다. 양수척의 ‘양’은 유기장의 유(柳, 고리)에서 나온 것이고, ‘수척’은 북송인(北宋人) 손목(孫穆)의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창우를 수작이라 한다(倡曰水作).”고 한 수작(水作·水尺), 즉 창우를 가리키는 말로 보이기 때문이다.182)진단학회 편, 『한국사』(중세편), 을유문화사, 1961, 346쪽.

달단은 본래 만주 싱안링(興安嶺) 서쪽 기슭이나 인산(陰山) 산맥 부근에 살던 몽고족의 한 부족인 타타르(Tatar)의 칭호였으나, 몽고 지방 또는 몽고족 전체를 가리키기도 했다. 달단은 고려와 몽고 사이에 벌어진 장기간의 전란과 한 세기 동안의 몽고 간섭기를 통해 고려에 남게 된 몽고인의 유종이었다.183)이준구, 「조선시대 백정의 전신 양수척, 재인·화척, 달단-그 내력과 삶의 모습을 중심으로-」, 『조선사 연구』 9, 조선사연구회, 2000, 2쪽, 20쪽.

고려는 이러한 북방 유목민을 정착시키면서 거란장처럼 한곳에 모여 살게 하고 천민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박은용은 평안남도 용강군의 말뫼를 예로 들어 북한 지역에 존재하던 천민 마을인 재인촌에 대해 소개했다. 말뫼에는 30호 정도의 재인들이 살고 있었고, 재인들의 생계는 버들가지로 만드는 키, 고리 등을 비롯하여 체, 바디, 부채 등의 수공업 제품을 팔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리재인’이란 말도 흔히 듣게 되었다. 이는 그들의 혈통이 양수척과 관계있다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184)박은용, 「재인들의 처지와 재인청에 대하여」, 『력사과학』 6, 조선역사편찬위원회, 1967.

이와 같이 말뫼의 재인들은 키·고리·체·바디·부채 등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주업은 음악 연주였다. 박은용은 그들의 혈통이 양수척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조선의 취락(朝鮮の聚落)』에서는 구백정 부락인 황해도 은율군 차우동(車隅洞)은 1933년 무렵 21호 132명이 사는 마을이었는데, “본 부락민은 체(篩) 혹은 바디(筬, 베나 천을 짜는 기계의 부속품)의 제조업이 주된 직업이되, 그 외에 가무예자(歌舞藝者) 등 23명이 있다. 돌로 만든 제조품은 그다지 수송하는 지역도 없고, 판매 경로는 지극히 미진하여 다만 시골을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일에 그친다.”라고 소개했다. 구백정 마을의 사람 중 23명은 가무예자라고 했는데, 이는 바로 재인을 가리키는 듯하다. 백정은 이미 세종 때부터 재인과 화척(소를 도살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재인이 사는 마을을 구백정 부락이라고 표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보형의 조사에 따르면, 황해도의 재인촌 사람들은 삼현 육각의 악기 연주는 물론 줄타기와 땅재주 등의 기예도 연행했다고 한다.185)이보형, 「제5편 민속 예술」, 『한국 민속 종합 조사 보고서』(황해·평안남북편), 문화재관리국, 1980, 246쪽, 261∼262쪽.

남한 지역의 재인들은 주로 세습무계 출신이었지만, 강신무(降神巫)의 분포 지역에 속하여 세습무가 없는 북한에서는 북방인의 후예들이 재인으로 활동하였다.

『고려사』 「최충헌전」의 기록에 따르면, 양수척은 원래 고리버들 제품의 제조와 수렵 등을 생업으로 삼았다.

양수척은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제어하기 어려웠던 유종으로 본래 관적(貫籍)도 부역도 없었다. 수초(水草)를 따라 유랑 생활을 하면서 일정한 거주 없이, 다만 사냥을 일삼고 또 고리(柳器)를 엮어 이를 판매하여 생업을 삼았다. 대개 기생은 근본이 유기장(柳器匠) 집에서 나왔다.186)『고려사』 권129, 열전42, 최충헌.

고려시대에 양수척의 집안에서 기생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원래 이들이 떠돌아다니며 잡희와 매춘을 했기 때문이다.

일본 헤이안시대 말기(12세기 초)의 기록인 오오에노 마사후사(大江匡房)의 『괴뢰자기(傀儡子記)』에서 괴뢰자라는 유랑 예인 집단을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의 양수척과 매우 흡사하다. 괴뢰자는 수초를 따라 유랑했고, 남 자들은 활과 말로 수렵 생활을 했으며, 쌍칼을 던졌다가 받기, 일곱 개의 방울받기, 인형극, 환술 등의 연희도 행했다. 여자들은 춤과 노래로 공연하고 몸을 팔았다. 우리나라에도 유랑 예인 집단은 매우 많았고, 그 무리들을 패거리(黨·族·輩·牌)로 칭하는 것은 일본의 경우와 동일하다. 그들은 마을마다 집집마다 악기를 울리면서 찾아가 각종 연희를 공연하거나, 주민들이 원하는 비나리를 베풀어 주었으며, 여성 연희자의 경우는 남성 관객들이 원하는 성적 요구를 들어주고 식사와 숙박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생존해 온 무리들이었다.187)서연호, 『꼭두각시놀음의 역사와 원리』, 연극과 인간, 2001, 85∼87쪽.

여기서 우리나라의 양수척이 북방인으로서 수초를 따라 유랑하며 사냥을 일삼고 여러 가지 연희를 연행한 것이나, 일본의 괴뢰자 집단이 북방인의 풍습과 매우 유사하게 수초를 따라 이동하며 사냥을 하고 여러 가지 연희를 연행한 것이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188)柳田國男, 「巫女考」, 『柳田國男全集』 11, 筑摩書房, 1990, 402∼405쪽. 일본에서는 이미 스기야마 지로(杉山二郞) 등 여러 학자들이 일본의 쿠구츠시(傀儡子)와 우리나라의 양수척이 동일 계통의 사람들임을 지적한 바 있다.189)杉山二郞, 『遊民の系譜』, 東京: 靑土社, 1988, 184∼185쪽 ; 喜田貞吉, 「朝鮮の白丁と我が傀儡子」, 『史林』 9卷 9號, 大正 7年(1918) 7月.

한편 『고려사』 「최충헌전」에 “비단으로 된 채붕들과 호한(胡漢) 잡희는 지극히 사치스럽고 이상한 구경거리였다.”고 하여, 1217년(고종 4) 왕을 위한 축수의 연회에서 북방인인 호한이 전문 연희자로서 연희를 공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고려사』에 예종이 1117년 8월 남경에 왔을 때, 귀순한 거란 사람들로 남경 기내에 사는 자들이 거란의 가무와 잡희를 연행하면서 왕을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궁정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연희를 행할 정도로 북방인 출신의 연희자가 많았다.

이상에서 고려시대에는 양수척·거란족·달단 등 북방인들이 있었고, 이들은 도살·수렵·유기장·잡희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기생도 이들 가운데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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