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4장 전통 연희 집단의 계통과 활동
  • 4. 조선시대의 연희 담당층
  • 북방인 계통의 연희자
박전열

고려시대에는 양수척·거란족·달단 등 북방인들이 있어서 도살·수렵·유기장·잡희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기생도 이들 가운데서 나왔다. 조선시대에도 수척들은 계속해서 도살·수렵·유기장·잡희를 담당했다. 재인과 백정은 양수척의 계통이며, 조선 예종 때까지도 연희와 도살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성균관에서 소를 도살하는 백정이 필요했을 때 양수척 등 북방인들에게 그 일을 맡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들은 잡희를 놀 수 있는 연희자이기도 했다.197)이상 연희자로서의 북방 유목민과 반인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논의는 전경욱, 「본산대놀이와 북방 문화」, 『민속학 연구』 8, 국립민속박물관, 2001, 8, 183∼211쪽 참조.

서울에는 조선 전기부터 나례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례가 있을 때 지방의 재인청에서 동원되던 재인들과 구별된다. 조선 전기의 여러 기록에 경중우인(京中優人), 경중남녀재인(京中男女才人) 등의 용어가 보이고, 우인 또는 재인이 서울의 사대문 안에 살았다는 내용도 발견된다.198)사진실, 『조선시대 서울 지역 연극의 공연 상황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36∼53쪽. 조선 전기에는 관나(觀儺)라는 소규모의 정기적인 공연이 궁궐에서 거행되었다. 관나는 의금부가 경중우인 즉 서울에 사는 연희자와 경기도의 재인들을 동원해 거행하는 소규모의 궁중 행사였다. 이때 참가한 재인을 관나 재인(觀儺才人)이라고 불렀다.

지방의 재인들이 서울의 사대문 밖에 모여 사는 것도 사회 문제가 되었던 시기에 서울의 성문 안에 경중우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연희자들이 살았다는 사실은 이들이 상당한 특권을 누렸음을 의미한다.

경중우인의 일부로 주목되는 것이 반인(泮人)이다. 성균관에는 조선 초기부터 문묘 제향(文廟祭享)에 필요한 쇠고기를 조달하기 위해 도사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백정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원래 안향이 기증한 사노비들 또는 후에 임금들이 여러 차례 하사하여 추가된 노비들 가운데 반드시 백정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199)『고려사』 권134, 열전47, 신우 8년 4월조에 “서해도 안렴사 이무(李茂)가 포로한 반란 화척(禾尺) 30여 명과 노획한 말 100필을 바쳤으며, 각 도 안렴사와 수령들도 각기 노획한 반란 화척을 바쳤다. 이들을 수군에 가두고 국문한 후 그 중 반란 수모자(首謀者)만을 죽이고 또 수모자의 처자들을 노비로 편입하고 말들을 관가에 몰수했으며, 기타의 화척들은 모두 석방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 기록에서 반란을 일으킨 화척들의 처자를 노비로 편입시켰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화척은 바로 조선시대의 백정과 동일 계통의 사람들이다. 현방(懸房)은 17세기 중반부터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현방은 반인이라 불리는 성균관 전복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므로 현방 전복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전복이란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로, 문묘를 지키고 유생 부양에 필요한 잡무를 처리했으며, 관인(館人)이나 반인으로도 불렸다. 이들은 잡역을 수행하기 쉽도록 동소문(東小門) 성균관 앞 관동(館洞)에 거주했으므로, 이곳은 반촌(泮村)으로 불렸다. 그러나 성균관의 도사가 현방이라는 이름으로 시전화하면서 현방은 반촌뿐 아니라 도성 근처의 여러 곳에 분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방을 운영하는 반인들도 각 현방 근처에 흩어져 생활하게 되었다.200)최은정, 「18세기 현방의 상업 활동과 운영-우육(牛肉) 판매 활동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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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학계첩(太學契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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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학자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는 본산대놀이의 연희자가 반인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제시했다.201)秋葉隆, 「山臺戲」, 『朝鮮民俗誌』, 東京: 六三書院, 1954, 172쪽. 반인들이 산대도감 또는 나례도감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말은 이들이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 동원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산대희가 폐지되자 반인들이 그들 연희의 흥행에 전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애오개 본산대놀이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1785년(정조 9) 왕명으로 성균관에서 편찬한 『태학지(太學志)』에 반인과 나례도감의 관련을 보여 주는 기록이 발견된다. 중국 사신이 올 때 조정에서는 나례도감을 설치하고 창우들을 모아 산붕을 배설해 맞이했다. 그런데 반인들이 반촌 내에서 산붕을 설치하고 연희를 연행한 기록도 나타남에 따라서 중국 사신 영접을 위하여 나례도감에서 창우들을 모을 때, 산붕 설치를 반인들이 맡았을 뿐 아니라 당시의 중요한 연희 담당 계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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