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4장 전통 연희 집단의 계통과 활동
  • 4. 조선시대의 연희 담당층
  • 세습무계의 연희자
박전열

조선 후기에 재인청의 재인은 흔히 광대라고도 불렸는데, 한강 이남의 세습무권(世襲巫圈)에서는 대부분 무계(巫系) 출신의 무부였다. 조선 후기의 재인은 그 기능에 따라 광대, 재인, 무동, 공인으로 나눌 수 있다. 광대는 다시 그 기능에 따라 판소리를 부르는 소리광대와 줄광대, 어릿광대, 고사광대, 선증애꾼(선굿창부) 등이 있었다.202)이보형, 「창우 집단의 광대소리 연구」, 『한국 전통 음악 논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0, 84쪽. 이보형은 재인의 집단을 창우(倡優) 집단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경기·충청·전라도에 재인청(才人廳)이 있었다. 재인청은 신청(神廳)·악사청(樂師廳)·광대청(廣大廳)·화랑청(花郞廳)이라고도 불렸다. 재인청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84년에서 1920년 사이에 있었던 사실은 「경기도창재도청안(京畿道唱才都廳案)」, 「경기재인청선생안(京畿才人廳先生案)」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각 도(道)마다 도청(都廳)이 있었는데, 그 장(長)을 대방(大房)이라고 했으며, 대방 밑에는 두 사람의 도산주(都山主)가 있었다. 한 도를 좌우로 나누고, 좌도 도산주와 우도 도산주를 두어 관할했다. 산주는 대방을 보좌하며 중요 사항을 의논했다. 그 밑으로 집강(執綱) 네 명, 공원(公員) 네 명, 장무(掌務) 두 명이 있었는데, 집강과 공원은 간사에 해당하며 장무는 서무에 해당했다. 군 재인청의 장은 청수(廳首)라 했고, 그 밑에 공원과 장무가 있었다. 계원은 세습 무당 당골에 한하며, 전적으로 무악(巫樂, 굿음악)을 연주하는 화랑, 줄타기와 물구나무서기 등의 곡예를 하면서도 무악을 연주하는 재인, 가무 예인이며 무악을 연주하는 광대를 포함했다.203)아키바 다카시, 최길성 옮김, 『조선 무속의 현지 연구』, 계명대학교 출판부, 1987, 183∼185쪽.

1827년 작성된 「팔도재인등등장(八道才人等等狀)」의 끝 부분에 염계달, 송흥록, 고수관 등 판소리 명창의 이름이 적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판소리 광대들도 재인청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204)이혜구, 『한국 음악 연구』, 국민음악연구회, 1957, 356∼357쪽.

1824년 5월에 작성된 「완문등장팔도재인(完文等狀八道才人)」에 따르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사신이 올 때 산대희를 거행하기 위해 설치된 각 도 의 재인도청(才人都廳)을 통합할 목적으로 갑신년에 각 도의 소임(所任)들이 서울에 모여 행방회(行房會)를 열고 전국적인 규모로 개조했다고 한다. 그동안 중국 사신 영접이 있을 때마다 각 도 단위로 무질서하게 서울로 올라와 시행했으므로, 이를 통제하려고 전국적인 기구를 재조직한 것이었다.205)김동욱, 『한국 가요의 연구』, 을유문화사, 1961, 301∼302쪽.

1488년(성종 19) 3월에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의 동월이 자신을 영접하는 산대희를 보고 지은 『조선부』에 따르면,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에 평양·황주와 서울의 광화문에서 산대를 가설하고 그 앞에서 잡희를 공연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가 본 산대희의 내용은 불 토해 내기, 만연어룡지희, 무동, 땅재주, 솟대타기, 각종 동물의 가장물 등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연희였다.

문희연(聞喜宴)에서는 송만재의 한시 「관우희」에 재인들이 산붕을 설치하고, 영산회상, 가곡, 십이가사, 어룡만연지희, 불 토해 내기, 포구락, 사자무, 처용무, 유자희, 요요기, 판소리 단가, 판소리, 땅재주, 검무(황창무), 줄타기, 솟대타기, 홍패고사 등을 연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1944년 청수골(현재의 강남구 청담동)의 도당굿을 조사했던 음악학자 이혜구는 도당굿의 연희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저녁에 무당이 굿을 하기에 앞서, 도당 앞마당에서 줄타기를 하는 재인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어 도당굿에서 줄타기와 같은 연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206)이혜구, 앞의 책, 164∼165쪽.

경기 도당굿의 악사이자 선굿소리 명창이었던 이용우(1908∼1984)의 제보에 따르면, 4월 초파일에 벌이는 난장 축제에서는 마을의 광장이 공연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207)이보형, 「판소리 공연 문화의 변동이 판소리에 끼친 영향」, 『한국학연구』 7,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5, 271쪽.

재인청에 속한 재인들은 평소에는 자기 고장에 있다가 나례와 중국 사신 영접을 위하여 산대희를 거행할 때나 과거 급제자의 잔치인 삼일유가, 문희연 등이 있을 때 서울에 올라와서 공연에 참가했다. 그러나 인조와 영조 이후 나례와 중국 사신 영접 때의 산대희 공연이 중단되자 민간에서의 공연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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