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5장 인형극의 역사적 전개 양상
  • 2. 고려시대 이전의 인형극
  • 인형의 다양한 이용 양상과 인형극 기반의 형성
허용호

인형극이 성립하려면 먼저 인형을 제작하고 이용하는 문화 기반이 형성되어야 한다. 상고시대부터 남북국 시대에 이르는 동안 인형을 다양하게 이용한 사실이 나타난다.

『북사』에는 “고구려는 항상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음사(淫祠)가 많았다. 신묘(神廟)가 두 곳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扶餘神)이라 하여 나무를 조각하여 부인상을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고등신(高登神)인데, 이 사람이 시조로서 부여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두 곳에 모두 관사(官司)를 설치하고 사람을 보내 지키게 하였다. 부인상은 하백의 딸이며 고등신은 주몽을 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225)『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祭祀).

이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부여신’과 ‘고등신’으로 불리는 나무 인형을 만들어 모셨음을 알 수 있다. 부인 형상의 부여신은 하백의 딸이며, 고등신은 주몽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 사람들은 시조 동명성왕과 그의 어머니 유화 부인을 신격화하여 모시는 신묘를 각각 짓고 그 안에 나무로 깎은 인형을 모셔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신격으로 인식되는 인형은 신라에서도 만들어져 모셨다. 탈해왕의 뼈로 만든 인형을 동악신(東岳神)으로 모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보인다.

탈해가 세상을 떠난 후 27대 문무왕 때 조로(調露) 2년 경진(680) 3월 15일 신유 밤에 문무왕의 꿈에 험상궂게 생긴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탈해인데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라.” 하므로, 왕은 그 말을 좇았다고 하며 그러한 까닭으로 지금까지 나라에서 제사 지냄이 계속되어 왔으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 한다.226)『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1, 탈해왕.

인형은 모셔지는 신격으로만 이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장례에서 망자를 의미하는 인형이 이용되기도 했다.

장사를 지낼 때 큰 나무 곽(槨)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장(丈)쯤 된다. 한쪽 끝을 열어서 문을 삼는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시체를 임시로 매장하여 가죽과 살이 모두 썩게 한 다음, 뼈만 추려 곽 속에 안치한다. 한 가족의 유골을 하나의 곽에 보관한다.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본떠 나무를 깎아 넣는데, 죽은 사람의 수대로 만든다.227)『후한서』, 권85, 동이열전75, 동옥저(東沃沮).

동옥저의 장례 때 죽은 사람의 모양을 본떠 나무 인형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나타난다. 설총이 아버지 원효의 인형을 만든 것 역시 인형이 장례에 이용된 경우다.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설총은 그의 유골을 부수어 생전의 모습대로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극도의 슬픈 뜻을 나타냈다. 설총이 그때 곁에서 예배를 올리자 소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으므로, 지금도 여전히 돌아본 채로 있다.228)『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5, 원효불기(元曉不羈).

확대보기
노래하고 연주하는 토용
노래하고 연주하는 토용
팝업창 닫기

장례에 죽은 사람을 의미하는 인형만 이용된 것은 아니다. 신라와 남북국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토용(土俑)들은 죽은 사람이 저승에서의 영화와 행복을 누리도록 함께 묻었던 것들이다.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인물 형상은 죽은 사람을 위한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무술을 하는 자세를 취하거나 무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형상은 죽은 사람의 지킴이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229)임재해, 「꼭두각시놀음의 역사적 전개와 발전 양상」, 『구비 문학 연구』 5, 한국구비문학회, 1998, 259쪽.

고려시대 이전에 인형을 이용한 사례는 전쟁에서도 나타난다. 무서운 사자 형상의 나무 인형을 만들어 상대편을 굴복시킨 기사가 보인다.

신라 지증왕 13년(512)에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于山國)을 합치려 하였으나, 그 나라 사람이 어리석고 사나워서 위력으로 항복받기 어려우므로 꾀로써 굴복시키기로 했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배에 나누어 실어 그 나라의 바닷가에 가서 속여 말했다.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 밟아 죽이겠다.” 그 나라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항복했다.230)『삼국사기』 권44, 열전4, 이사부(異斯夫).

전쟁에서 인형은 고구려 대무신왕 때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게 하고 무기를 쥐어 병영 안팎에 세워 적을 속이게 한”231)『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 경우와 같이 위장용으로도 이용하였다. 김유신은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난을 평정할 때, 아군의 떨어진 사기를 북돋우고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방편으로 인형을 이용하였다.

허수아비(偶人)를 만들어 거기에 불을 붙여서 연에 실어서 띄워 보냈다. 이에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어젯밤에 별이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내게 하여 적들로 하여금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게 하였다.232)『삼국사기』 권41, 열전1, 김유신 상.

위협용 목우 사자, 위장용 우인 병사, 하늘에 올려 보낸 우인 등의 예로 보아 전쟁에도 인형이 다양하게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셔지는 신격, 장례의 대상인 죽은 사람, 죽은 사람의 봉사자, 죽은 사람의 지킴이 등으로 이용된 제의용 인형과 더불어 전쟁에 쓰인 전쟁용 인형도 있었다. 때로는 제의와 전쟁의 성격이 어우러진 복합적 성격의 풀 인형 오방신상(五方神像)이 이용되기도 했다.

그때 정주에서 사람이 달려와서 보고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당나라 군사가 우리 국경까지 와서 바다 위를 순회하고 있습니다.” 왕이 명랑 법사를 불러 물었다. “일이 이토록 급박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채백(彩帛)으로 절을 임시로 만들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백으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며 명랑을 우두머리로 한 유가(瑜珈)의 명승(明僧) 열두 명이 문두루(文豆婁)의 비밀법을 지었다.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접전하기 전에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233)『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文虎王) 법민(法敏).

고려시대 이전에도 인형은 이미 국가 제의에서 개인적인 제의까지, 장례 대상에서 죽은 사람을 위한 봉사자나 지킴이까지, 초월적인 신격에서 위장용 병사까지, 짚과 같은 일상적 재료에서 죽은 사람의 뼈와 같은 특수한 재료까지, 움직임이 없는 정적 인형에서 일정한 움직임을 보이는 동적 인형까지 다채롭게 존재하였다. 이것은 인형극이 성립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확대보기
경주 용강동 고분 출토 토용
경주 용강동 고분 출토 토용
팝업창 닫기

이러한 사실은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다양한 형상의 토용과 토우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경주 황성동 고분의 미소짓는 여인과 거북 몸체에 용의 머리와 꼬리를 하고 있는 상상의 동물, 경주 노동동 고분과 월성동 고분에서 발굴된 뱀과 개구리의 형상,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발굴된 홀(笏)을 잡고 관복을 착용한 남자, 예복을 입은 여인 등에서 인형극 등장인물로 활용 가능한 풍부한 자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토용과 토우의 자세나 형태에서는 인형극의 줄거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커다란 유방을 드러낸 여성, 임신한 배와 음부를 강조한 임산부, 발기된 남근을 그대로 드러낸 남성, 성교하는 남녀 등의 경우에는 성적 갈등과 성희를 포괄하는 성적인 이미지가 나타난다. 역사(力士)의 모습을 표현한 토우에서는 괴물을 물리치는 영웅담을 떠올릴 수 있다.234)서연호, 『꼭두각시놀음의 역사』, 연극과 인간, 2000, 42∼43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