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5장 인형극의 역사적 전개 양상
  • 2. 고려시대 이전의 인형극
  • 제의적 인형극의 전승과 오락적 인형극의 성행
허용호

앞에서 동악신이라 불린 뼈로 만든 인형의 존재를 확인했다. 신라 탈해왕의 뼈로 만든 이 인형은 “나라에서 제사 지냄이 계속되어 왔으니”라는 기록에서 확인되듯이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었다. 이처럼 신격화하여 제의의 대상으로 섬김을 받은 인형은 부여신과 고등신이라 불린 나무 인형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는 항상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라는 구절을 보면, 나무로 만든 부여신과 고등신을 제의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10월 제천 의식에서 신격화된 건국 시조를 대상으로 한 제의적 인형극이 벌어졌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는 다음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동명왕 14년 8월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세상을 떠나니, 동부여 왕인 금와(金蛙)는 태후가 죽었을 때와 같은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고 신묘(神廟)를 세워 주었다. 태조왕 69년 10월에 부여에 가서 태후 사당에 제사 지냈다. 신대왕(新大王) 4년 가을 9월에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 지냈다. 고국천왕 원년 가을 9월, 동천왕 2년 봄 2월, 중천왕 13년 가을 9월, 고국원왕 2년 봄 2월, 안장왕 3년 여름 4월, 평원왕 2년 봄 2월, 건무왕 2년 여름 4월에 모두 위와 같이 제사 지냈다. 고국양왕 9년 봄 3월에는 사직을 세웠다.235)『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

인형을 대상으로 제의를 지냈다는 기록은 『삼국지』에도 보인다.

나라 동쪽에 큰 굴이 있었는데, 이를 수혈(隧穴)이라고 하였다. 매년 10월 국중 대회 때에 이 수혈에 있는 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 위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데, 나무로 다듬은 수신을 신좌에 모셔 놓고 지낸다.236)『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전, 고구려.

제천 의식이나 국중 대회 때 나라를 세운 시조신이나 수신을 모시고 일정한 제의적 연행을 벌인 사실이 나타난다. 물론 이 인형들을 움직이고 대사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로 보아 인형이 말을 하고 움직이는 본격적인 인형극은 아니었다.

이 시대에는 인형을 자신들의 기원을 들어주고 부족의 안위를 지켜 주는 초월적 역량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였다. 이처럼 인형이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생활에 밀접하게 관여함으로써 이때부터 이미 다양한 모습의 인형이 만들어진 것이 확인되는데, 이는 인형극의 성립과 발달에 매우 중요한 바탕이 된다.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 마을에서 현재에도 벌어지는 별신굿에서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말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허수아비 한 쌍에게 절을 하고 기원을 하며 제사를 올린다. 마을 사람들은 한 쌍의 허수아비를 토지신 할아버지와 토지신 할머니라 여기며 마을의 길흉화복을 관장한 다고 믿는다. 그래서 인형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빌고 각 집안의 평안을 기원한다. 마을 사람들은 인형으로 구체화된 토지신 할아버지와 토지신 할머니가 마을의 온갖 재앙을 몰고 갈 것이라고 믿는다. 인형 자체의 움직임이나 말은 전혀 없지만 별신굿에 참여하여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인형은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초월적 역량을 발휘하는 주체로 인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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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촌 마을 별신굿
방촌 마을 별신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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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는 동명성왕과 유화 부인이라 여기는 인형을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제의적 인형극이 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락적 인형극 역시 성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나라 두우가 801년에 편찬한 『통전(通典)』과 송나라 진양이 12세기 초에 편찬한 『악서(樂書)』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산악잡희(散樂雜戲)에는 환술(幻術)이 많고, 그 모두가 서역에서 나온 것이다. 환인(幻人)이 중국에 이르자 비로소 그것이 익숙하게 되었는데, 한나라 안제(安帝) 때 천축에서 헌납한 기예이다. …… 가무희에는 대 면(大面), 발두(撥頭), 답요랑(踏搖娘), 굴뢰자(窟礧子) 등이 있다. 원종(元宗)은 그러한 가무희를 정성(正聲)이 아니라고 해서 궁중에 두지 않고 교방에 두었다. …… 굴뢰자는 괴뢰자(魁儡子)라고도 한다. 우인(偶人)이 연희로 만들었는데 가무가 능란하다. 본래는 상가의 음악(喪樂)이었는데, 한나라 말의 가회(嘉會)에서부터 인형극이 되었다. 북제의 후주인 고위는 이것을 몹시 좋아했다. 고구려에도 역시 인형극이 있는데, 현재 민간에서 성행하고 있다.237)두우, 『통전(通典)』, 굴뢰자(窟礧子).

굴뢰자는 괴뢰자라고 하고, 또한 괴뢰자(傀儡子)라고도 한다. 대개 연희로서 하는 인형극으로 그 가무는 즐겁다. 본래는 상가(喪家)의 음악이었다. 인형사가 목왕(穆王)에게 헌납한 기예에서 비롯되었다. 고구려에도 이것이 있었다. 한말에 이르러 가회에서 공연되었다. 제나라의 후주인 고위는 이것을 몹시 좋아했다. 진실로 그 즐거운 내용은 상실되었다.238)진양, 『악서(樂書)』 권185, 우인희(偶人戲).

앞의 두 기록 모두 즐거운 잔치 자리인 가회에서 벌어지는 중국 인형극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구려 인형극을 빼놓지 않고 있다. 고구려의 오락적 인형극은 그만큼 널리 알려졌다. 고구려의 오락적 인형극에 대한 언급은 송나라 마단림(馬端臨)이 13세기 후반에 편찬한 『문헌통고(文獻通考)』 「동이부(東夷部)」 동부여조의 “괴뢰와 월조(越調)·이빈곡(夷賓曲)은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멸한 후에 진상한 것”이라는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군 이적이 진상품으로 황제에게 바칠 정도로 고구려 인형극은 수준이 높고 독창적이었다. 적어도 고구려에서는 제의가 아닌 흥겨운 잔치에서 오락적 인형극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출 수 있도록 인형을 만들어 놀리는 조종술 역시 크게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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