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5장 인형극의 역사적 전개 양상
  • 3. 고려시대의 인형극
  • 제의적 인형극의 새로운 면모
허용호

제의에서 벌어지는 인형 연행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진다. 우선 제의 속에서 정적이고 말이 없는 인형을 모셔 놓고 섬기는 연행 방식이 지속되고 있음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다음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풍군 사람들이 목우(木偶)를 신이라 하여 매년 5, 6월 사이에 객헌(客軒)에 받들고 크게 제사를 지내자 온 경내가 모여들어 폐단이 된 지 오래였다.239)『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청풍군, 명신 김연수.

인형 연행은 다음에 인용한 대목에서 나타나듯이 궁중 나례에서도 행해졌다.

정종 6년(1040) 11월 무인일에 왕이 “짐이 즉위한 이래로 생명을 아끼는 마음을 덕으로 삼아, 새와 짐승과 곤충까지도 모두 사랑의 은혜를 베풀고자 했다. 그런데 연말의 나례에 다섯 마리의 닭을 잡아서 역기(疫氣)를 쫓으니 짐은 그것을 몹시 애통하게 여긴다. 앞으로는 다른 물건으로 닭을 대용하도록 하라.”라는 조서를 내리니, 사천대(司天臺)에서 “『서상지(瑞祥志)』의 기록에 계동월(季冬月)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크게 나례하고, 한편 토우(土牛)를 잡아 나쁜 기운을 보낸다 했습니다. 바라옵건대 황토우(黃土牛) 네 마리를 만들되 각각 길이 1척(尺), 높이 5촌(寸)으로 하여 닭을 잡는 대신으로 사용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이 건의를 받아들여 이후 그대로 시행하였다.240)『고려사』 권64, 지18, 예6, 군례(軍禮),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

인용한 대목은 고려시대 나례에 관한 첫 번째 공식 기록이다. 여기서 사용한 흙으로 만든 황소 인형(黃土牛) 네 마리는 나쁜 기운을 한 몸에 품고 가는 희생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섣달 그믐날 궁중과 관아, 민가 등에서 벌어진 고려 전기의 나례는 가면을 쓴 사람들이 일정한 도구를 가지고 주문을 외면서 귀신을 쫓는 동작을 함으로써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는 의식이었다.241)전경욱, 『한국의 전통 연희』, 학고재, 2004, 185쪽. 따라서 나례에 쓰인 황소 인형은 말을 하거나 어떤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악귀 구축이라는 나례 참여자들의 기원과 움직임을 한몸에 받고 쫓기어 가는 대상물로 인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형이 연행자들 또는 연행 참여자들의 기원과 움직임을 한몸에 받는 경우는 다음의 기우제 관련 기록에서도 추론해 볼 수 있다.

5월 경진일에 남성(南省) 뜰 한가운데에 토룡(土龍)을 만들고 무격(巫覡) 을 모아 비를 빌었다.242)『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12년 5월 경진.

갑자일에 도성청(都省廳)에 토룡을 만들고 무당을 모아 비를 빌었다.243)『고려사』 권54, 지8, 오행2, 금(金).

이 두 기록만 놓고 본다면 흙으로 만든 용(土龍)이 비가 내리기를 비는 무당들의 기원 대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당들이 단순하게 기원만 했던 것 같지는 않다. 무악에 맞춘 무당들의 노래와 춤이 함께 행해졌을 것이다. 무악에 맞춘 노래와 춤으로 용을 자극하고 이를 통해 용이 승천하여 비를 내리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형에게 가해지는 연행자들의 일정한 행위는 다음 사례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연행자가 인형에게 직접 행위를 가하는 연행 방식이 이용되는 것이다.

고종 45년(1258)에 홍복원이 무당에게 은밀히 나무 인형을 만들어 손을 묶고 이마에는 못을 박아 땅에 묻거나 또는 우물에 넣어 저주케 하였다.244)『고려사』 권130, 열전43, 홍복원(洪福源).

이 기록은 무속에서 저주를 행하는 제의적 인형극의 사례다. 염매(魘魅·厭魅), 염승(厭勝), 무고(巫蠱) 등으로 불리며, 나무나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공격함으로써 타인에게 병이나 죽음을 초래하게 한다. 주로 연행자인 무당이 인형을 대상으로 일방적인 저주와 폭력을 가하는 연행 방식이 이용된다.

인형들은 고려시대 국가 행사였던 연등회와 팔관회에서도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과다한 경비와 노력이 투여되는 폐단이 지적될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봄에 연등을 열고 겨울에 팔관을 개최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널리 징발하니 노역이 심히 번다하므로, 원하건대 이를 줄여서 백성들의 힘에 여유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 여러 가지 우인(偶人)을 만드는 노력과 비용이 많이 드는데 한 번 사용하고는 부수어 버리니 말도 안 됩니다. 우인은 흉사의 의례(凶禮)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데, 중국의 사신들이 일찍이 와서 보고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이렇게 함을 허락하지 마십시오.245)『고려사』 권93, 열전6, 최승로(崔承老).

그런데 이 기록만으로는 연등회와 팔관회에 등장한 인형들의 연행 방식을 알 수 없다. 인간 연행자들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고 말을 하는 조종 인형인지, 기계 장치에 의해 일정한 움직임을 보이는 기계 인형 혹은 기관 인형인지, 단순한 장식 인형인지 또는 어떤 전형적인 내용을 집중적으로 연출한 진열 인형인지 모호하다. 그런데 이러한 인형 성격의 모호함을 극복하는 동시에, 이전 시기 제의적 인형극의 양상과도 구별되는 특징을 보여 주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예종 15년(1120) 10월, 서경에서 팔관회를 개최했을 때 왕이 잡희(雜戲)를 관람했다. 그때 태조의 공신인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의 우상이 있는 것을 보고 왕이 감동하여 시가를 남겼다.246)『고려사』 권14, 세가14, 예종 15년 10월 신사.

김락과 신숭겸은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에서 왕건이 위기에 몰렸을 때 대신하여 죽은 공신들이다. 그래서 고려 태조 때부터 팔관회에서 그 공을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다. 이 내용 역시 예종 때 벌어진 추모 행사를 기록한 것이다. 김락과 신숭겸의 추모 행사와 관련한 기록은 『고려사』뿐만 아니라,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과 『평산신씨고려태사장절공유사(平山申氏高麗太師壯節公遺事)』에서도 보인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태조가 두 공신을 추모하는 행사를 벌이다가 두 사람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풀(草)로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했더니, 두 공신이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기도 했다고 한다. 『평산신씨고려태사장절공유사』에는 “두 사람의 가상(假像)이 있어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자색 옷을 입고 홀(笏)을 잡고 금인(金印)을 차고 말을 타고 뛰면서 뜰을 돌아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본다면 팔관회에 등장한 두 공신 인형은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동적 인형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아 술을 받아먹으며 춤을 추고 말을 타고 뜰을 돌아다니는 명실상부한 동적 인형이다. 아마 두 공신의 전공(戰功)을 드러내는 내용이 연행되었을 것이고, 인형으로 형상화된 두 공신이 추모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진 제의적 인형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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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 마을 장군제의 대장군 인형
홍가 마을 장군제의 대장군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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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의적 인형극에 등장하는 인형들이 일정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고려시대 이전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면모다. 이러한 제의적 인형 연행 방식은 최근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행해지지 않지만,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매정리 내동 마을 당산제에서는 당산 할아버지와 당산 할머니로 모셔지는 허수아비 한 쌍이 소를 타고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말이나 소를 타지는 않지만 제의적 인형극에서 일정한 움직임을 보이는 동적 인형의 사례는 현재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오티 마을 별신제에서 요사귀 인형과 몽달귀 인형,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가회리 홍가 마을 장군제에서의 대장군 인형 등이 그 예가 된다. 적어도 고려시대에 비롯된 제의에서의 동적 인형 전통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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