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5장 인형극의 역사적 전개 양상
  • 4. 조선시대의 인형극
  • 오락적 인형극의 발전된 모습과 새로운 양상
허용호

조선시대 오락적 인형극은 궁중 및 상층과 민간을 막론하고 성행했다. 개성 있는 다양한 모습의 인형이 등장하고, 연행술 역시 발전하여 온갖 종류의 연행 방식이 나타난다. 말을 하는 인형의 본격적인 등장이나 극적 구조를 갖춘 연행 내용, 산대잡상놀이의 성행 역시 조선시대 오락적 인형극이 가지는 특성이다. 먼저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한시 「관나(觀儺)」와 「관괴뢰잡희(觀傀儡雜戲)」를 실마리로 하여 조선시대 오락적 인형극의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궁궐의 봄빛이 채붕 위에 일렁이고 / 祕殿春光泛彩棚

붉은 옷 노란 바지 입고 종횡으로 오가네 / 朱衣黃袴亂縱橫

신묘한 방울놀이는 의료의 솜씨인 듯 / 弄丸眞似宜僚巧

줄타는 모습은 비연처럼 날렵하네 / 步索還同飛燕輕

네 벽 두른 좁은 방에 인형을 놀리고 / 小室四旁藏傀儡

백 척 솟대 위에서 잔 잡고 춤추네 / 長竿百尺舞壺觥

우리 임금님 광대놀이 즐기지 않지만 / 君王不樂倡優戲

신하들과 태평성대 누리려 함이라네280)성현, 『허백당집(虛白堂集)』 권7, 「관나(觀儺)」. / 要與群臣享太平.

시 제목인 ‘관나(觀儺)’는 ‘나례를 구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독립적 인 궁중 오락 행사를 말한다.281)사진실, 『한국 연극사 연구』, 태학사, 1997, 126∼129쪽. “궁궐의 봄빛이 채붕 위에 일렁이고”라는 대목으로 보아 봄날 궁정에서 벌어진 오락 행사임을 알 수 있다. 시에서는 방울받기(弄丸), 줄타기(步索), 인형극(傀儡), 솟대타기(長竿戲) 등의 연행 상황이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이 가운데 “네 벽 두른 좁은 방에 인형을 놀리고”라는 대목이 주목된다. 이 대목은 인형극 무대에 대한 묘사로, 당시 인형극 무대가 현전하는 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의 무대와 유사한 포장 무대였음을 말해 주고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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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놀음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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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의 또 다른 한시 「관괴뢰잡희」에서는 당시 인형 조종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와 주의를 끈다.

번쩍번쩍 금빛 허리띠 붉은 옷에 빛나는데 / 煌煌金帶耀朱衣

거꾸로 매달렸다 몸 날리니 새가 나는 듯하네 / 跟絓投身條似飛

줄타기 방울받기 기술도 많은데 / 走索弄丸多巧術

나무 인형에 실 꿰여 신기한 동작 자유롭구나 / 穿絲刻木逞神機

어찌 인형극이 오로지 아름다움만 추구한 것이리오 / 宋家郭禿奚專美

한 고조는 평성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네 / 漢朝平城可解圍

공경코자 조정에서 여러 예를 베푸노라니 / 爲敬朝廷陳縟禮

중국 사신 눈이 커져서 마땅히 비난하리라282)성현, 『허백당집』 권14, 「관괴뢰잡희(觀傀儡雜戲)」. / 皇華眼大定嘲譏.

이 시는 제목 ‘괴뢰잡희’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두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괴뢰잡희를 ‘괴뢰들이 벌이는 잡희로 해석하는 경우’283)임재해, 앞의 글, 279∼280쪽.와 ‘괴뢰희와 잡희로 나누어 해석하는 경우’284)전경욱, 앞의 책, 253쪽.다. 전자의 해석을 따르면, 이 시는 인형이 금띠에 붉은 옷을 차려입고 줄에 거꾸로 매달리고 몸을 날리는가 하면 줄타기와 방울받기와 같은 다양한 재주를 부리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인형들로 하여금 줄을 타게 하고 날 수 있게 하며 방울을 받게 하는 등의 다양한 조종술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후자의 해석을 따르면, 인형극 관련 대목은 “나무 인형에 실 꿰여 신기한 동작 자유롭구나.” 정도다. 물론 이 경우에도 나무를 깎아 실로 꿰어 움직이는 줄 인형의 모습을 전해 주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관괴뢰잡희」에는 “어찌 인형극이 오로지 아름다움만 추구한 것이리오. 한 고조는 평성(平城)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네.”라는 대목이 나온다. 중국에서의 인형극 기원과 이에 근거한 인형극의 실용성을 말하는 대목이다. 당나라 단안절(段安節)의 『악부잡록(樂府雜錄)』에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괴뢰자(傀儡子)는 예로부터 전해 오기를 한 고조가 평성에서 묵특 선우(冒頓單于)에게 포위당했을 때 생겨난 것이라 한다. 평성의 한 면은 묵특 선우의 처 연지(閼氏)가 맡고 있었는데, 병력이 다른 삼 면보다 강했다. 성안은 양식이 떨어졌었다. 한 고조의 장수 진평(陳平)은 연지가 질투가 많다는 것을 알고, 기계 장치로 움직이는 나무 인형을 만들어 성 위 담 사이에서 춤을 추게 했다. 연지는 이것을 보고 산 사람들이라 생각하여, 이 성이 함락되면 묵특이 반드시 그들을 기녀로 맞아들이리라 걱정되어 마침내 군대를 후퇴시켰다. 뒤에 악가(樂家)들이 이를 놀이로 만들었는데, 그 중 가무를 인도하는 머리가 벗겨진 자는 골계희로 웃기기를 잘했다. 민간에서는 그 자를 곽랑(郭郞)이라 불렀는데, 모든 놀이마당에서 반드시 배우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285)김학주, 『중국 고대의 가무희』, 명문당, 2001, 138쪽. 「관괴뢰잡희」에서는 이러한 중국 인형극 기원 고사에 의거해서 인형극이 오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 이 아니라, 한 고조를 구해 낼 정도의 실용성도 갖추고 있다는 점286)전경욱, 앞의 책, 510쪽.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 인형극 기원 고사에 등장하는 핵심 인물인 연지와 관련된 이야기가 언급된 시가 있어 주목된다.

장치도 갖가지 번개 동작은 바쁘고 놀라울사 / 機關種種電驚忙

조화옹은 우두커니 주장함을 잃을 지경 / 造化居然失主張

성 아래 연지는 인형이 예쁜 아가씨인 줄 시기하고 / 城下閼支猜婀娜

놀이마당 포로는 헐렁한 옷소매를 비웃네 / 筵前鮑老笑琅瑭

빈정대며 놀리는 모습은 산귀처럼 매혹적이고 / 媚如山鬼揶揄態

번뜩번뜩 나대는 꼴은 다람쥐처럼 민첩하구나 / 捷似林鼯欻閃狂

무대 위에 한바탕 요란한 꿈 이야기가 / 棚上一場撩亂夢

봄바람에 흩어져 마침내는 망망하네287)박승임, 『소고집(嘯皐集)』 권1, 「괴뢰붕(傀儡棚)」. / 東風吹散竟茫茫.

인용한 것은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이 지은 한시 「괴뢰붕(傀儡棚)」이다. “장치도 갖가지 번개 동작은 바쁘고 놀라울사, 조화옹은 우두커니 주장함을 잃을 지경”에서 엿보이듯이 인형들의 재빠른 움직임에 감탄하고, 인형 조종사의 뛰어난 조종술이 두드러진 인형극임을 알 수 있다. ‘시기하고’ ‘비웃는’ 모습이나, ‘빈정대며 놀리는 모습’ 등의 표현에서는 이 인형극에 일정한 대사도 존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말을 하는 인형의 존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대목이다.

이 시에서는 “성 아래 연지는 인형이 예쁜 아가씨인 줄 시기하고, 놀이마당 포로는 헐렁한 옷소매를 비웃네”라고 인형극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 이 대목을 근거로 한다면 ‘연지(閼支)’, ‘아가씨(婀娜)’, ‘포로(鮑老)’ 등이 등장하여 인형극이 전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연지와 아가씨는 앞에서 살펴본 중국 인형극 기원 고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포로 역시 당대(唐 代) 이후 중국 연극의 배역이다.288)윤주필, 「조선 전기 연희시에 나타난 문학 사조상의 특징」, 『동양학』 25,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5, 48쪽. 그렇다면 여기서 묘사된 인형극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을 연행한 것289)박진태, 「중국 인형극의 수용과 변용 과정(1)」, 『한국 고전 희곡의 역사』, 민속원, 2001, 131∼138쪽.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괴뢰붕」의 작자 박승임이 우리 인형극에 등장하는 인형을 보고 중국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중국 인형극의 유래나 중국 인형의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시기하고 비웃고, 빈정대며 놀리는 인형들 간의 관계를 중국 문헌 속의 고사나 인물을 이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성현의 「관나」와 「관괴뢰잡희」를 통해서 조선시대 전반기 궁중 및 상층에서 행해진 오락적 인형극의 무대와 조종술을 파악할 수 있다. 이전 시대와는 달리 포장 무대라는 구체적인 인형극 무대나 줄을 통해 조종하는 조종술이 나타나고 있어 한층 발전된 인형극 양식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승임의 「괴뢰붕」을 통해서 구체적인 움직임은 물론이고 말을 통해 인형극이 전개되는 민간 오락적 인형극의 발전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인형 연행자들이 인형 조종은 물론이고 인형 목소리 연기까지 수행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괴뢰붕」에 나타나는 민간 오락적 인형극의 주목할 만한 발전은 나식(羅植, 1498∼1546)의 「괴뢰부(傀儡賦)」에서 절정을 이룬다. 「괴뢰부」에서는 조선시대 전반기에 민간에서 벌어진 오락적 인형극의 제반 양상을 거의 모두 보여 준다. 인형극 무대를 설치하는 것에서부터 인형극의 내용과 인형의 모습, 조종술 그리고 인형극을 종일 연행한 다음 마무리하는 상황까지 차례로 묘사되어 있다. 인형극에 대한 흔치 않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여러 모로 주목되는 자료다.

봄바람 불어 경관 좋은 때를 만나서 / 當春風之麗景

사방으로 트인 번화가에 채붕을 설치하네 / 結綵棚於通衢

남녀 구경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 紛士女之如雲

앞자리를 서로 다투어 환호하고 즐기네 / 競爭先而歡娛

돈과 재물은 언덕처럼 쌓이고 / 積錢財兮如陵

단지술을 내놓은 것이 마치 호수 같네290)나식, 『장음정유고(長吟亭遺稿)』, 「괴뢰부(傀儡賦)」, 21∼26구. / 置樽酒兮如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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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탱의 인형극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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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한 대목은 인형극을 준비하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날씨 좋은 봄날 번화한 거리 길목에 인형극 무대를 설치하고 있는 상황이 나타나 있다. 궁궐의 고즈넉한 정원이 아니라 번화한 거리에서 시정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인형극 연행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더구나 돈과 재물이 언덕처럼 쌓이고 단지술이 풍성하게 마련된 이 연행은 흥행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구름같이 모여든 남녀 구경꾼의 환호로 보아 이 인형극은 흥행 면에서도 성공했다. 인용한 대목에서 나타나는 인형극 연행의 주변 상황은 당시 시정에서 이러한 오락적 인형극이 많이 벌어졌음을 말해 준다.

시정의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즐기는 인형극이라면 등장하는 인 형의 외양이나 연행 방식, 내용 등이 한층 흥미롭고 다채로운 동시에 뛰어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실제 인형극 연행을 읊은 대목을 보면 그 내용이 새롭고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인형의 외양이나 연행 방식에 있어서도 한층 발전된 양상이 나타나 있다.

갑자기 한 사람 무대로 나와서는 / 奄一人之投棚

기이한 소리 획 질러 대노라니 / 劃奇聲之一呼

이윽고 기관이 스르르 작동하니 / 俄機關之自闢

재빠르게 곽랑이 번듯이 일어난다 / 儵郭郞之飜然

머리는 민둥머리 얼굴은 불그죽죽 / 頭童髡而面頳

소매는 원숭인가 길어서 너울너울 / 袖猿長而蹁躚

윗몸만 겨우 드러냈다 사라지고 / 纔半露而還沒

다시 몸을 일으켜 모습을 나타낸다 / 更挺身而復現

돌연 왔다 갔다 분분하고 / 繽往來之欻翕

이쪽 저쪽 어지럽힘 황홀하다 / 怳東西之相眩

갑자기 여러 무리들 우루루 몰려나와 / 俄群徒之競從

각기 재주를 부리며 능력을 과시한다 / 各呈才而效能

혹 깃발을 숙이며 활시위 메기다가 / 或低旗而彎弓

싸움이 나서 악을 쓰며 드잡이를 친다 / 鬨叫突而超騰

혹 팔을 휘두르며 서로 물어뜯고 / 或掉臂而相吃

가격 흥정 많다 적다 다투기도 한다 / 爭市價之少多

지아비는 아내가 업신여기자 / 夫或見驕於妻

갖은 소리 하며 봐 달라 한다 / 極百端而挑和

부인네는 남편이 내치려 하자 / 婦或見棄於夫

아이처럼 애교를 부리며 응수한다 / 擲嬌兒而相酬

가난뱅이는 송사에 이길 만해도 지는 법 / 貧屈訟於理順

욕심 사나운 관리에게 굽실대며 부탁한다 / 仰貪吏而相咻

관리는 부자에게 뇌물을 받아 들고 / 吏懷金於富人

머리를 끄덕이며 흔쾌히 수락한다 / 欣搖頭而重諾

영고성쇠에 기뻐하고 성내기도 하며 / 或喜怒於榮枯

얻고 잃음에 걱정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 或憂樂於得失

만났다 하여 웃고 노래하기도 하고 / 或歌笑於相逢

떠나보내며 흐느끼기도 한다291)나식, 『장음정유고』, 「괴뢰부」, 27∼54구. / 或泣涕於送別.

여기에 등장하는 인형을 보면, ‘민둥머리에 붉은 얼굴을 하고 긴 소매를 너울거리는 곽랑’, ‘재주를 부리며 능력을 과시하는 여러 무리’, ‘깃발을 드리우고 활을 쏘며 싸우는 이들’, ‘가격 흥정하며 다투는 인물’, ‘아내와 남편’, ‘가난뱅이와 부자’, ‘욕심 사나운 관리’ 등 그 수가 적지 않다. 구체적인 머리 모양이나 얼굴색까지 염두에 두고 인형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인형 자체를 통해 남자와 여자, 아내와 남편, 가난뱅이와 부자, 군인, 상인, 관리 등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개성적으로 인형을 제작했다.

「괴뢰부」에 등장하는 인형은 이전의 자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 역시 모두 새로운 내용들이다. 깃발을 드리우고 활을 쏘며 싸우는 모습, 팔을 휘두르고 서로 물어뜯으며 물건 값을 흥정하는 광경, 부부간의 다툼과 화해, 송사를 통해 드러나는 빈부간의 차별과 부패한 관리의 모습 등은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내용들이다. 부부간의 갈등, 전쟁, 시장판의 소란스런 흥정, 송사, 빈부 차별, 관리의 부패 등 살림살이 문제에서부터 세상살이 문제까지 가정과 사회의 제반 문제를 두루 다루고 있다. 그야말로 “영고성쇠에 기뻐하고 성내기도 하며, 얻고 잃음에 걱정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만났다 하여 웃고 노래하기도 하는가 하면, 떠나보내며 흐느끼기도 하는” 인간사의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괴뢰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형과 연행 내용뿐만이 아니다. 여러 인형을 등장시켜 새롭고 다양한 내용을 흥미롭게 만들어 나가는 인형 연행술 역시 주목할 만하다. “가격 흥정 많다 적다 다투기도 한다”, “지아비는 아내가 업신여기자 갖은 소리 하며 봐 달라 한다”, “욕심 사나운 관리에게 굽실대며 부탁한다”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들 인형이 말을 하는 인형이라는 점이다. 이는 인형 연행자의 목소리 연기를 의미한다. ‘곽랑이 번듯이 일어나 윗몸을 드러냈다가 사라지고 다시 몸을 일으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현전하는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의 막대 인형 조종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팔을 휘두르며 서로 물어뜯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손 인형 조종 방식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좀 더 섬세하고 세밀한 동작 표현이 가능한 손 인형을 이용하여 서로 격렬하게 다투고 물어뜯는 등의 표현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역시 현전 꼭두각시놀음에서 상좌들의 다툼 대목에서 이용되는 조종 방식이다. ‘깃발을 숙이며 활시위를 메기는 모습’은 주선(走線) 인형 조종 방식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고, ‘머리를 끄덕이며 흔쾌히 수락하는 모습’의 경우 줄 인형 조종 방식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방식만이 아닌 다양한 방식의 인형 조종이 이용된 것이다.

발전된 연행술,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 수많은 구경꾼과 적극적인 호응 등으로 정리할 수 있는 조선 전기 민간에서의 오락적 인형극은 조선 후기에도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년에 몹시 가뭄이 들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두려워하고 조신해야 하는데, 도하(都下)에 성대한 향락의 거조가 기존에 비하여 더함이 있어서 인형(傀儡)의 놀음이나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놀이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마땅히 조속히 금단할 것을 명하여 재앙을 만나 수성(修省)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292)『영조실록』 권38, 영조 10년 6월 7일 신해.

인용한 기록은 1734년(영조 10)에 향락 풍조를 지적하며 인형극의 금지를 요청하는 김기석(金箕錫)의 상소문이다. 가뭄이 극심한 데도 불구하고 도성 일대에 인형극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다. 인형극이 민간의 호응 속에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한시 「성시전도응령(城市全圖應令)」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상인들의 상업 활동과 연관된 인형극 연행이 심심치 않게 거리에서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거리를 한가로이 지나가노라니 / 忽若閒行過康莊

홀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들리는 듯 / 如聞嘖嘖相汝爾

사고팔기 끝나 연희 펼치기를 청하니 / 賣買旣乞請設戲

배우들의 복색이 놀랍고도 괴이하네 / 伶優之服駭且詭

우리나라 솟대타기 천하에 으뜸이라 / 東國撞桿天下無

줄타기와 거꾸로 매달림은 거미와 같네 / 步繩倒空縋如蟢

또다시 인형을 가지고 등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 別有傀儡登場手

칙사가 동쪽으로 왔다 하며 손뼉 한 번 치네 / 勅使東來掌一抵

조그만 원숭이 참으로 아녀자를 놀래켜 / 小猴眞堪嚇婦孺

제 뜻을 채워 주면 예쁘게 절하고 무릎 꿇네293)박제가, 『정유집(貞蕤集)』 시집 권3, 「성시전도응령(城市全圖應令)」. / 受人意旨工拜跪.

강이천(姜彛天, 1768∼1801)의 「남성관희자(南城觀戲子)」는 이러한 조선 후기 민간 오락적 인형극의 성행을 입증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강이천이 열 살 때인 1778년에 본 가면극과 인형극을 묘사한 것으로 18세기 전통 연희의 전승 상황을 알려 주는 소중한 자료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인형극의 내용이나 연행 방식, 인형 제작술을 바탕으로 할 때, 현전하는 꼭두각시놀음보다 한층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의 인형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 웅기중기 모여 있고 / 蔟蔟女墻頭

모든 눈 한 곳에 쏠렸더라 / 萬目一處注

멀리 바라보니 과녁판을 매단 듯 / 遙望似縣帿

푸른 차일 소나무 사이로 쳐진 데 / 靑帳張松樹

아래서는 풍악을 울려 / 衆樂奏其下

불고 켜고 두드리고 온갖 소리 / 鏗轟雜宮羽

바다가 다하니 갑자기 산이 튀어나오고 / 海盡陡山出

구름이 열려 달이 황홀히 비치듯294)강이천, 『중암고(重庵稿)』, 「남성관희자(南城觀戲子)」, 13∼20구. / 雲開怳月吐.

「남성관희자」의 13∼20구 대목이다. 작자가 남대문 밖의 집 근처에서 연희자들이 무대를 가설하고 놀이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놀이판으로 달려가니 붉은 옷을 입은 궁중 관리며, 떡 파는 백발 노파가 보인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인용한 대목에서는 인형극의 무대 구조가 묘사되고 있다. 구경꾼이 성을 쌓듯이 모여서 시선을 집중하는 곳은 소나무 사이에 쳐진 청포장(靑布帳) 무대다. 무대로 사용하는 청포장을 마치 소나무 사이에 과녁판이 걸려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 앞에서는 악사들이 자리 잡고 악기를 연주한다. 인형들은 청포장 위로 상반신을 드러내며 등장하게 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隈壘戲(듸각씨)圖’에서 이러한 포장 무대에 등장한 인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현전하는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음도 이러한 무대 구조를 이용한다.

사람 형상 가는 손가락만큼 / 人像如纖指

나무로 새겨 채색을 하였구나 / 五彩木以塑

얼굴을 바꾸어 번갈아 나오니 / 換面以迭出

어리둥절 셀 수가 없더라295)강이천, 『중암고』, 「남성관희자」, 21∼24구. / 炫煌不可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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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놀음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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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형상 가는 손가락만큼 나무로 새겨 채색을 하였구나.”라는 것으로 보아 나무로 인형을 만들고 세밀하게 채색까지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형이 번갈아 등장했다는 것은 인형의 수도 많았고, 엮어 내는 극적 내용 역시 다양했음을 말해 준다. 실제 다음의 글을 보면 인형극에 등장하는 인형이 실로 다양하다.

문득 튀어나오는데 낯짝이 안반 같은 놈 / 突出面如盤

고함 소리 사람을 겁주는데 / 大聲令人怖

머리를 흔들며 눈을 굴려 / 搖頭且轉目

왼쪽을 바라보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리다 / 右視復左顧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홀연 사라지니 / 忽去遮面扇

노기를 띠어 흉악한 놈 / 猙獰假餙怒

휘장이 휙 걷히더니 / 巾帷倏披靡

춤추는 소맷자락 어지럽게 돌아가누나 / 舞袖紛回互

홀연 사라져 자취도 없는데 / 忽然去無蹤

더벅머리 귀신의 낯바닥 나타나 / 鬅髮鬼面露

두 놈이 방망이 들고 치고받고 / 短椎兩相擊

폴짝폴짝 잠시도 서 있지 못하더니 / 跳梁未暫駐

홀연 사라져 자취도 없는데 / 忽然去無蹤

야차 놈 불쑥 저건 무언가 / 夜叉驚更遌

너풀너풀 춤추고 뛰더니 / 蹲蹲舞且躍

얼굴은 구리쇠에 눈에 도금을 한 놈이 / 面銅眼金鍍

홀연 사라져 자취도 없는데 / 忽然去無蹤

달자가 또 달려 나와 / 㺚子又奔赴

칼을 뽑아 스스로 머리를 베어 / 長劍自斬首

땅바닥에 던지고 자빠지니 / 擲地仍偃仆

홀연 사라져 자취도 없는데 / 忽然去無蹤

귀신 같은 여자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 有鬼兒乳哺

어르다가 이내 찢어발겨 / 撫弄仍破裂

까마귀 솔개 밥이 되게 던져 버리네296)강이천, 『중암고』, 「남성관희자」, 25∼48구. / 遠投烏鳶付姜彛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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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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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짝이 안반 같은 놈’, ‘노기를 띠어 흉악한 놈’, ‘더벅머리에 귀신 가면을 쓴 두 놈’, ‘얼굴은 구리쇠에 눈에 도금을 한 놈’, ‘북방 유목민인 달자(韃子)’, ‘귀신 같은 여인과 그 아이(鬼兒)’ 등 여러 인형이 등장하고 있다. ‘낯짝이 안반 같은 놈’은 현전 꼭두각시놀음의 박첨지로,297)서연호, 「18세기 후반의 꼭두각시놀음」, 『한국 전승 연희의 현장 연구』, 집문당, 1997, 154쪽. ‘얼굴은 구리쇠에 눈에 도금을 한 놈’은 홍동지를 연상시키기도298)서연호, 『꼭두각시놀음의 역사』, 연극과 인간, 2000, 82쪽. 하지만, 대부분이 처음 접하는 인형들이다. 이 인형들은 극 속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다가 퇴장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반복되는 ‘홀연 사라져 자취가 없다’는 표현은 다 양한 인물이 빈번하게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상황을 생동감 있게 나타내며, 장면 전환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인물들의 빠른 등장과 퇴장, 이에 따른 신속한 장면 전환 그리고 다양한 인물의 출현은 이 인형극이 새롭고 발전된 극적 내용을 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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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극 내용을 보면 안반 같은 낯짝을 한 놈이 고함을 지르고 분위기를 험하게 만들고, 노기를 띠어 흉악한 놈이 소맷자락 휘날리며 춤을 추기도 한다. 또 더벅머리 귀신 둘이 방망이를 들고 치고받기도 하고, 구릿빛 얼굴에 눈은 도금을 한 놈이 춤을 춘다. 그런가 하면 북방인같이 생긴 놈이 달려 나와 스스로 머리를 베고 자빠지기도 하고, 귀신 같은 여인이 아이를 안고 젖을 먹여 어르다가 찢어발겨 던져 버린다. 이러한 극적 내용은 대부분이 이전의 인형극은 물론이고 현전하는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스스로 머리를 베고 자살하는 대목과 여인이 젖을 먹이던 아이를 살해하는 대목은 내용의 극단성과 더불어 그 전후 자취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특히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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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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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관희자」에서 묘사된 인형극은 내용 못지않게 연행술 역시 주목된다. 신속한 장면 전환과 인형들의 다양한 움직임은 인형극이 조종사들의 조종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문득 튀어나오는데 낯짝이 안반 같은 놈 고함 소리 사람을 겁주는데”에서 드러나듯이 인형 연행자들이 목소리 연기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형 연행자들의 인형 조종과 목소리 연기가 모두 갖추어진 명실상부한 인형극이다. 연행술과 관련해서 특히 주목할 것은 부채를 이용한 퇴장 방식과 미세하고 난해한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조종술이다.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홀연 사라지는’ 퇴장 방식은 현전하는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이나 서산 박첨지놀이에서 박첨지가 등장하는 방식과 유사하여 흥미롭다. ‘머리를 흔들고 눈을 굴리는’ 미세한 움직임 역시 현전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 보아 적어도 이 시기에 이미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 수준의 연행술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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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첨지 등장 연행술
박첨지 등장 연행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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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관희자」에는 현전하는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의 연행술을 넘어서는 것도 있다. 북방인 같은 남자가 칼로 자신의 목을 베어 던진다든지, 여인이 젖을 먹이다가 아이를 찢어발기는 움직임은 고도의 인형 제작술과 인형 조종술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들이다. 머리가 베어지거나 몸이 찢어발겨질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마련되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상당히 진전된 수준의 인형 제작과 조종이 18세기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목 베기와 같은 연행술이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1932년 미타무라 엔교(三田村鳶魚)가 구파발 인형극의 연행자 한성준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평양 감사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홍동지가 벌거벗은 몸으로 불경스러운 짓을 했다고 해서 분노를 사게 되고, 사람들이 그를 잡아서 참수형에 처하는 장면을 실제로 보여 주었다고 한다.299)三田村鳶魚, 서연호 옮김, 「박첨지가 가르치는 인형 제작 과정」, 『꼭두각시놀이』, 열화당, 1990, 124쪽.

지금까지 살펴본 인형극은 향유층이 궁중과 민간, 혹은 상층과 하층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인형을 놀리고 재담을 하는 방식의 연행술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초기 인형극이 주로 궁중에서 인형 을 놀리고 조종하는 묘기 놀음이 중심이 되었다면, 후기 인형극은 민간에서 나름의 극적 구성을 가지고 세태를 풍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변별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형극 양상과 전혀 다른 오락적 인형극이 나타나 주목된다. 산대잡상놀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인형극 유형은 대사보다는 볼거리가 중심이 된다. 고사 속의 인물이나 전형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전형적 상황을 만들어 표현한다. 굳이 대사가 없어도 관객이 이해 가능한 상황을 잡상의 연출된 진열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왕은 대비를 위한답시고 경회루 연못에 관사(官私)의 배들을 가져다가 가로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평지와 같이 만들었다. 채붕을 설치하여 바다 가운데 있는 세 산을 상징하였는데 가운데는 ‘만세(萬歲)’, 왼쪽은 ‘영충(迎忠)’, 오른쪽은 ‘진사(鎭邪)’라 불렀다. 그 위에 전우(殿宇), 사관(寺觀), 인물의 잡상을 벌여 놓아 기교를 다하였고, 연못 가운데 비단을 잘라 꽃을 만들어 줄줄이 심고 용주(龍舟)와 화함(畵艦)을 띄워 서로 휘황하게 비추었다. 왼쪽 산에는 조정에 있는 선비들이 득의양양해 하는 형상을 만들고, 오른쪽에는 귀양 간 사람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형상을 만들었다. 왕은 스스로 시를 지어 걸고 또 문사들에게도 짓게 하였는데, 모두 세 산의 이름이 지닌 뜻을 서술한 것이었다. 날마다 즐겁게 마시며 놀다가 화초와 인물의 형상이 비를 맞아 더러워지면 곧 새것으로 바꾸었다.300)『연산군일기』 권63, 연산군 12년 9월 2일(기묘).

이는 연산군 때의 산대잡상놀이 기록이다. 바다 가운데 만든 만세산, 영충산, 진사산은 산대다. 만세산은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임금을 상징하고, 영충산은 충성스러운 마음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들이 자리하는 곳이며, 진사산은 사악함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임금을 거역하는 신하들이 자리한다.301)사진실, 『공연 문화의 전통』, 태학사, 2002, 197쪽. 영충산에는 임금의 인정을 받아 조정에 등용된 선비들의 득의양양한 형상이 꾸며지고, 노래와 춤으로 잔치를 벌이는 모양이 표현된다. 반면에 진사산에는 귀양 간 사람들의 근심되고 괴로운 모양이 꾸며진다. 의복은 남루하고 용모는 초췌하며 초가집에서 궁핍하게 살며 굶주려 쓰러져 있고 처자가 매달려 울부짖는 모양이 표현되는 것이다.302)『연산군일기』 권62, 연산군 12년 5월 1일(기묘).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부류 신하들의 표정과 동작이 잡상을 통해 산대 위에서 표현된다.

이렇게 산대 위에 진열 형식으로 표현된 잡상들은 전형성을 띠는 상황이나 세간에 잘 알려진 이야기의 한 장면을 재현한다. 그래서 정지된 상황 연출만을 가지고도 전반적인 상황을 관객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산대잡상놀이라 일컬을 수 있는 이러한 방식의 인형극은 봉사도에서도 나타난다. 봉사도는 1725년(영조 1) 청나라 사신 아극돈이 조선에 다녀가면서 각종 행사 절차 및 풍속, 풍경을 담아 그린 20장짜리 화첩이다. 산대잡상놀이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은 봉사도 제7폭이다.

아극돈의 봉사도 제7폭에 그려져 있는 기암괴석의 형상은 산대로서, 바퀴가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움직일 수 있는 산대 곧 예산대(曳山臺)다. 이는 봉사도의 내용을 담은 제화시(題畵詩)를 통해서도 입증이 된다.

상궁에서 풍악을 울려 맞고 / 上宮張樂迎

온갖 놀이에 괴뢰희를 바치니 / 百戲呈傀儡

오산(鼇山)은 땅 위를 움직이고 / 鼇山陸地行

채색 밧줄은 허공에 얽어 세웠네303)阿克敦, 黃有福·千和淑 校註, 『奉使圖』, 遼陽: 遼寧民族出版社, 1999, 16쪽. / 綵索架空起.

인용한 제화시의 “온갖 놀이에 괴뢰희를 바치니, 오산은 땅 위를 움직이고”의 대목을 보면 산대가 이동 가능한 것이었으며, 괴뢰희 곧 인형극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산대 위에 자리한 인물들이 인형임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산대 위 인물들을 아래에서부터 보면, 얹은머리에 분홍 저고 리와 다홍 치마를 입은 여인이 춤을 추고 있으며, 그 오른쪽에 연보랏빛이 감도는 회색 도포를 입은 남자가 낚싯대를 들어 던지고 있다. 산대의 중간 동굴에는 원숭이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맨 위 동굴에는 붉은 저고리 여인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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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예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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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이 자리하고 있는 장소와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과의 거리를 감안했을 때, 이 인물들이 구체적인 대사를 했던 것 같지는 않다. 대사를 들을 수 있는 물리적 거리가 확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단지 이 인물들의 모습을 보는 데 집중한다. 청각보다는 시각적 연행에 집중하는 볼거리 중심의 연행이 산대잡상놀이인 것이다. 그런데 봉사도 속 인물들은 단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구체적인 대사를 하지는 않지만 일정한 움직임을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근거는 낚시꾼이 서 있는 바위 아래쪽에 자리한 등을 구부린 두 사람이다. 춤추는 여인 아래 바퀴 안쪽에도 등을 구부린 두 사람이 있다. 이 네 사람이 인형들을 움직이는 조종사로 파악된다. 이들이 인형에게 직접 움직임을 부여했을 수도 있고, 움직이는 바 퀴의 회전을 이용하여 인형을 움직이게 했을 수도 있다.304)사진실, 앞의 책, 200∼201쪽. 물론 그 움직임은 극히 제한된 단순 동작의 반복이었을 것이다. 낚시꾼의 경우 낚싯대를 드리우는 동작을 반복하고, 춤을 추는 여인의 경우 손을 반복적으로 흔드는 정도의 움직임을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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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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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도에 나타난 산대잡상놀이는 구체적인 대사 없이 인형을 늘여 세우고 일정한 움직임만을 보이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상황을 연출하여 보여 준 것 같다. 조선 후기 민간에 널리 퍼진 민화 강태공도와 봉사도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한다면, 낚싯대를 던지는 남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강태공이고, 그 곁에서 춤추고 있는 여자는 강태공 고사(故事)와 관련된 강태공의 부인일 가능성이 높다.305)사진실, 앞의 책, 368∼370쪽. 낚시를 하며 뜻을 펼 기회를 기다린 강태공과 강태공 대신 생계를 꾸리기 위하여 품팔이를 하였다는 그의 아내와 관련된 고사는 익히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고, 민화로도 그려져 유통되기도 하였다. 또는 달기(妲己)로 변신한 구미호가 온갖 악행을 저지르자 강태공이 이를 물리쳤다는 강태공과 달기의 고사를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82 306)사진실, 앞의 책, 414쪽.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익히 알려진 강태공과 그와 관련된 인물을 등장시키고 일정한 움직임을 보여 줌으로써 관객들은 구체적인 대사를 바탕으로 한 극 연행이 전개되지 않아도 충분히 한 편의 극을 본 것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널리 알려진 내용을 포착하여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전체 양상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연행술이 이용된 것이다.

산대잡상놀이는 『기완별록(奇玩別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완별록』에는 1865년 4월 25일 고종이 경복궁 옛터에 친림한 것을 감축하는 의 미로 벌어진 여러 전통 연희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 중 금강산놀이, 팔선녀놀이, 신선놀이, 상산사호놀이 등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산대잡상놀이가 나타난다.

한 곳을 바라보니 금강산이 온다 하네

허황(虛荒)한 말이로다 산이 어이 움직이랴

틀 위에 가산(假山) 꾸며 군인들이 메어 오네

가에는 곡곡주란(曲曲朱欄) 가운데는 첩첩청산(疊疊靑山)

암석(巖石)도 의연하고 송죽(松竹)도 새로워라

산속에 절이 있고 동구(洞口) 밖에 홍문(紅門)이라

성진(性眞)이라 하는 중은 가사착복(袈裟着服) 합장(合掌)하고

팔선녀(八仙女) 바라보고 석인(石人)같이 서 있는 거동

우습다 저 화상(和尙)이 삼혼칠백(三魂七魄) 잃었도다

산봉(山峰)마다 서있는 선녀(仙女) 화안성모(花顔盛貌) 자랑하네

낭자에 가화(假花) 꽂고 화관(花冠)에 금봉차(金鳳叉)며

쌍환녹운(雙鬟綠雲) 두 귀 밑에 괴고리 흔들리네

능라의상(綾羅衣裳) 찬란하고 금수원삼(錦繡圓杉) 화려하다

깁부채와 꽃가지로 반(半)만 차면(遮面) 하락말락

선연(嬋然)히 고운 자태(姿態) 구름으로 내려온 듯

성진의 높은 도행(道行) 속절이 전혀 없내

윤회(輪回)의 괴로움을 한번 면키 어려워라

이 산 이름 금강산이 번연히 의제(擬製)로세

성진과 팔선녀가 형산(衡山)에서 만났으니

남악(南嶽)에 금강산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307)『기완별록(奇玩別錄)』,『한국 가사 자료 집성』 권1, 태학사, 1997, 121∼122쪽.

인용한 것은 금강산놀이다. ‘틀 위에 꾸민 가산’은 곧 산대를 말한다. 둘레에는 붉은 난간을 만들고 가운데에는 첩첩한 청산을 만들어 놓았다. 암석과 송죽, 절과 동구 밖 홍살문까지 꾸며 놓고 ‘금강산’이라 부르고 있다. ‘군인들이 메어 온다’는 점에서 봉사도의 산대처럼 이동이 가능한 예산대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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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도
구운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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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산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성진’과 ‘팔선녀’라 불리는 인물이다. “팔선녀 바라보고 석인같이 서 있는 거동”이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이 인물들은 일정한 모습을 한 채 정지되어 있는 인형으로 표현된 듯하다. 산봉우리마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자리한 인형들은 팔선녀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가사를 입고 합장한 채 넋을 잃고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는 인형은 성진을 형상화한 것이다.

성진과 팔선녀는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의 핵심 인물이다. 이미 줄거리와 인물의 성격이 널리 알려진 것이기에, 넋을 잃고 팔선녀를 바라보는 성진이라는 장면 연출만으로도 보는 이들은 충분히 전후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구운몽』의 핵심 인물을 등장시켜 전형적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금강산놀이의 장면 연출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민화 구운몽도와 흡사하다는 점이다.308)사진실, 앞의 책, 365∼366쪽. 성진과 팔선녀의 만남은 구운몽도의 배경으로 등장인물이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소설을 통해서, 또 그림을 통해서 이미 널리 공유된 내용을 시각화하고 입체화한 것이 금강산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널리 공유된 내용을 입체적으로 시각화한 것이기에 구체적인 대사가 필요하지 않다. 보는 이들은 대사가 없어도 충분히 서사적 줄거리를 연상하고 엮을 수 있는 것이다.

산대를 화려하게 꾸미고, 그 위에 인형을 진열하여 전형적 상황을 꾸며 내는 연출 방식은 다음의 신선놀이에서도 나타난다.

어느 패(牌) 신선놀이 배포(排布)가 방불(彷佛)하다

연봉난간(蓮-欄干) 채색판(彩色版)에 화가산(花假山) 괴석(怪石)이며

송죽기화(松竹奇花) 불로초(不老草)와 황학(黃鶴) 청학(靑鶴) 사슴이라

언연(偃然)히 앉은 신선 풍채가 단정하다

머리에 와룡관(臥龍冠)과 몸에는 학창의(鶴氅衣)라

벽오동(碧梧桐) 거문고를 술상에 빗겨 놓고

우수(右手)로 어루만져 율(律) 고르는 줄소리요

백설(白雪)같은 백우선(白羽扇)을 좌수(左手)에 쥐었으니

비(譬)건대 여동빈(呂洞嬪) 옥경(玉京)으로 향하는 듯

앞에 앉은 작은 동자 색등거리 쌍(雙)상투에

호로병(胡虜甁) 옆에 차고 풍로(風爐)에 차를 다려

유리종(琉璃鍾)에 부어 들고 꿇어앉아 드리는 양

선녀(仙女) 일인(一人) 모셨으니 자질(資質)도 요나(嫋娜)하다

화관봉잠(花冠鳳簪) 귀고리와 문라채삼(文羅彩衫) 수의상(繡衣裳)에

무빈도 산산하고 도시도 연연하다

천도(天桃)를 반(盤)에 받쳐 쌍수(雙手)로 고이 들고

고개를 반만 숙여 눈도 아니 들어 보네

요지연(瑤池宴) 마다하고 어디로 향하는고

앞으로 지나갈 때 향취(香臭)가 옹울(蓊鬱)하니

한편에 서 있는 것은 유자선(柳子仙)이 분명하다

파초선(芭蕉扇)에 상모 달아 조심하여 들었으니

티끌을 부치는지 햇빛을 가리는가

자두지족(自頭至足) 푸른 위에 의복(衣服)조차 푸르도다

머리 위에 푸른 버들 가지가지 늘어지고

푸른 얼굴 흰 눈이요 푸른 허리 홍호로(紅葫蘆)로라

전신(全身)이 다 푸른 중(中) 눈과 호로 이색(二色)지니

형상도 흉기(凶奇)하고 거지(擧止)도 해괴(駭怪)하다

귀신이 아니라도 요괴(妖怪)가 정녕(丁寧)하니

조화(造化) 신기(神奇)하고 인교(人巧)도 측량(測量) 없다.309)『기완별록』, 앞의 책, 124∼126쪽.

신선놀이에서는 “연봉난간 채색판에 화가산 괴석이며 송죽기화 불로초와 황학 청학 사슴이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괴석, 송죽기화, 불로초, 황학, 청학, 사슴 등으로 꾸며진 화려한 산대가 등장한다. 관객인 작자 앞으로 산대가 지나갈 때 선녀의 향취를 맡았다는 “앞으로 지나갈 때 향취가 옹울하니”라는 구절에서, 이 산대 역시 움직이는 예산대임을 알 수 있다.

산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신선, 동자, 선녀, 유자선 등을 형상화한 인형들이다. “유리종에 부어 들고 꿇어앉아 드리는 양”이라 표현된 동자와 “고개를 반만 숙여 눈도 아니 들어 보네.”라고 표현된 선녀의 형상에서 이들이 일정한 동작에서 멈추어져 있는 인형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신선, 동자, 선녀, 유자선 등을 형상화한 인형들은 관객인 작자가 “조화 신기하고 인교도 측량 없다.”고 할 정도로 세밀하고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신선은 와룡관과 학창의를 입고 술상 앞에 앉아 오른손으로는 벽오동 거문고의 줄을 고르고 왼손으로는 백우선을 들고 있다. 동자는 색등거리를 입고 상투를 쌍으로 틀었으며 호로병을 차고 풍로에 차를 다려 신선에게 올리고 있다. 선녀는 화관봉잠과 귀고리, 문라채삼의 비단옷을 입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천도를 바치고 있다. 유자선은 파초선에 상모를 달아 들고 서 있는데, 흰 눈과 허리에 찬 붉은 호로병만 제외하고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푸르게 표현되었다. 네 인물 모두 작자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개성적으로 만들어졌다.

인물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각각의 형상을 세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개성을 분명하게 드러낸 탓도 있지만, 동시에 몇 가지 표현만으로도 충분히 그 인물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었기에 가능하다. “비건대 여동빈 옥경으로 향하는 듯”이라는 구절과 “요지연 마다하고 어디로 향하는고”라는 구절을 감안해 보면, 신선놀이에서 인형들의 진열을 통해 연출한 것은 당대에 널리 알려진 신선 관련 고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선과 관련된 이야기나 요지연 관련 고사는 당대에 구술 전승이나 소설 그리고 그림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널리 알려진 신선들의 전형적인 모습과 이들이 만들어 낸 상황을 입체적이고도 시각적인 산대잡상놀이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신선과 같은 인물들과 그들의 전형적인 상황을 입체적 시각화를 통해 연출하는 방식은 다음의 상산사호(商山四晧)놀이에서도 나타난다.

또 어느 곳 신선패(神仙牌)는 상산사호놀이라네

홍안백수(紅顔白首) 네 노인이 바둑 두는 거조(擧措)로다

한 노인은 흑사건(黑沙巾)에 황의(黃衣)를 입었으며

백기(白碁)를 손에 들어 정정(丁丁)히 낙자(落子)하고

한 노인은 쓴 것 없이 태상노군(太上老君) 머리 같고

홍의(紅衣)를 입었으니 백수(白鬚)를 흩날리며

흑기(黑碁)를 손에 들어 판에 반만 드리우고

비슷이 기대앉아 잠심(潛心)히 수(數)를 보며

한 노인은 황건(黃巾) 쓰고 청의(靑衣)를 입었으니

훈수(訓手)하다가 핀잔 듣고 무안히 물러 앉아

무릎 안고 눈을 감아 사몽비몽(似夢非夢) 조는 듯

한 노인은 청사건(靑沙巾)에 백의(白衣)를 입었으니

호로(葫蘆) 달린 청려장(靑藜杖)에 몸을 실어 의지하여

한 손은 등에 지고 바둑 두는 구경하며

선녀는 술 권하고 동자는 차 다리니

좌우에 서있는 동자 생황(笙篁) 불며 적(笛)도 불며

날개 벌린 저 쌍학(雙鶴)은 우줄우줄 춤추는 듯

간 데마다 유자선이 신선 틈에 아니 빠져

파리채 손에 쥐고 서있는 모양이 가소로다.310)『기완별록』, 앞의 책, 126∼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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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사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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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느 곳 신선패는 상산사호놀이라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대목은 상산사호의 고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상산사호란 중국 진나라 말기 전란을 피해 상산에 숨어 산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등의 네 노인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한나라 혜제(惠帝)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상산사호놀이에서는 ‘흑사건에 황의를 입고 백기를 판에 내려놓은 신선’, ‘홍의를 입고 흰 수염을 날리며 흑기를 들고 수를 읽는 신선’, ‘황건 쓰고 청의를 입고 졸고 있는 신선’, ‘청사건에 백의를 입고 청려장에 몸을 의지하여 바둑을 구경하고 있는 신선’ 등으로 상산사호가 형상화되어 있다. 더불어 술을 권하는 선녀, 차를 다리는 동자, 좌우에서 생황과 피리를 부는 동자, 유자선, 날개를 벌린 쌍학 등도 함께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을 진열해 놓고 연출해 놓은 장면은 민화 상산사호도와 흡사하다.311)사진실, 앞의 책, 367∼368쪽. 시중에 널리 유통되어 알려진 상산사호도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해 놓은 것이 상산사호놀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산놀이, 신선놀이, 상산사호놀이 등은 익히 알려 진 인물과 상황을 정교하게 만든 산대와 인형을 통해 형상화해 내고 있다. 여기서 산대 자체가 움직이면서 이동하는 연행 방식은 나타나지만, 인형 자체의 움직임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산대 위에 자리하여 일정한 상황을 연출하는 인형들이라고 하여 전혀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다. 봉사도의 인형들처럼 인형이 일정한 동작을 반복하는 연행 방식도 이용되었음을 다음의 팔선녀놀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느 패(牌) 팔선녀는 재력(財力)만 허비하고

의상(衣裳)도 다름 없고 치장(治粧) 별함 없다

여복(女服) 위에 긴 등거리 모양다리 바이 없네

올려 세운 난간판(欄干板)에 네 귀 연화(蓮花) 고이하랴

대나무 기둥 가가(假家) 위에 남사앙장(藍紗仰帳) 덮었으며

오색면주(五色綿紬) 얽어서 치고 좌우에 양각등(羊角燈)과

홍살문에 북을 달고 성진(性眞)이가 법고(法鼓) 치네

저 성진이 거동 보소 장삼(長衫) 소매 젖혀 메고

두 손에 북채 쥐고 어지러이 두드릴 제

대가리는 요령(搖鈴) 같고 검은 수염 흩날리네

번화(繁華)한 의사(意思)로되 소견(所見)에 눈이 설다

아무리 의빙(依憑)인들 저런 성진 누가 보았나.312)『기완별록』, 앞의 책, 124쪽.

팔선녀놀이 역시 금강산놀이나 신선놀이에서처럼 산대를 만들고 그 위에 인형을 진열하고 있다. 산대는 난간판을 세우고 네 귀퉁이에 연꽃을 장식하였으며, 그 위로 대나무 기둥을 세우고 가가를 지어 푸른 비단 장막을 덮었다. 장막은 오색 명주를 길게 이어 장식하였으며 좌우에는 양각등을 달았고, 홍살문을 꾸며 법고도 달아 놓았다. 인형을 통해 형상화된 인물은 성진과 팔선녀다. 금강산놀이처럼 소설 『구운몽』을 근간으로 하여 연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력만 허비하고 의상도 다름 없고 치장 별함 없다.”는 구절이나, “번화한 의사로되 소견에 눈이 설다 아무리 의빙인들 저런 성진 누가 보았나.”는 구절에서 보듯이 다른 산대잡상놀이에 비해 연출 수준이 변변치 못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팔선녀놀이가 주목되는 것은 산대 위에 자리한 인형의 움직임 때문이다. “두 손에 북채 쥐고 어지러이 두드릴 제 대가리는 요령 같고 검은 수염 흩날리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성진으로 형상화된 인형은 일정한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다. 성진이 머리를 방울처럼 흔들며 검은 수염을 날리면서 법고를 치는 움직임이 포착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성진을 형상화한 인형은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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