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5장 인형극의 역사적 전개 양상
  • 5. 인형극의 시대별 특징과 역사적 전개 과정
  • 인형극의 역사적 전개 과정
허용호

인형극의 시대별 특징은 ‘고려시대 이전의 기반 형성과 인형극 전통의 실마리→고려시대의 제의적 인형극의 새로운 면모와 오락적 인형극의 활성화→조선시대의 제의적 인형극의 다양화와 오락적 인형극의 발전’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리는 인형극의 시대적 특성을 드러낼 수 있지만, 인형극 자체의 내재적인 전개 양상을 포착하지는 못한다. 시대별로 나타난 각종 인형극이 이전 시기의 인형극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이후 시기에는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었는지 하는 고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인형극 자체의 연결망은 사라진 채 시대만이 떠오른 형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형극을 중심에 놓고 전개 양상을 살펴보는 ‘인형극’의 역사를 기술해야 한다. 사실 이 글의 시대별 인형극 소개나 특징 정리도 인형극을 중심에 놓은 역사를 기술하기 위한 정지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시대별 기술이라는 제약을 해체한 후 인형극을 중심에 놓고 그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형극 기원에 관한 기록으로 두 유형이 전하고 있다. 하나는 한 고조가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위당했을 때 나무 인형을 이용한 계략을 써서 빠져나간 것에서 인형극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형극이 본래 상가의 음악이었다가 한나라 말에 잔치 자리에서부터 인형극이 비롯되었다는 기록이다. 두 유형은 중국 문헌인 『악부잡록』과 『통전』에 기록된 인형극 기원설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와도 관련이 있다. 한 고조 관련 기원설은 성현의 「관괴뢰잡희」와 박승임의 「괴뢰붕」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져 언급하고 있고, 조선 말기에 그려진 隈壘戲(듸각씨)圖에서는 그림과 글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상가의 음악에서 잔치 자리의 연희로 변모하면서 인형극이 비롯되었다는 설은 우리나라 인형극의 기원과도 연결된다 할 수 있다.

인형극 기원에 대한 두 유형의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언제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서 비롯되었나 하는 점이 아니라, 인형극이 인형의 실제 이용에서 비롯되었고, 제의에서 연행되다가 오락 행사에서 연행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두 기원설을 종합해 보면, 결국 인형극은 실생활에서 다양한 인형 이용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며, 처음에는 제의적 인형극이 중심을 이루다가 점차 오락적 인형극으로 전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형극의 역사는 ‘인형극 기반의 형성 단계→제의적 인형극의 단계→오락적 인형극의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제의적 인형극에서 오락적 인형극으로의 전화는 단선적인 것이 아니다. 오락적 인형극으로 전화되었다고 해서 제의적 인형극이 생명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오락적 인형극으로의 전화 이후에도 제의적 인형극은 제의적 인형극의 틀 내에서 나름의 발전을 도모한다. 오락적 인형극 역시 마찬가지다. 오락적 인형극의 틀 내에 나름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제의적 인형극 나름의 전개와 오락적 인형극 나름의 전개를 감안하는 것 이외에도, 제의적 인형극과 오락적 인형극의 상호 영향 혹은 상호 침투로 인한 인형극 의 전개 양상 역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앞서 정리한 시대별 양상을 감안하여 우리나라 인형극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정리해 볼 수 있다.313)이 글에서 인형극의 역사적 전개는 임재해, 앞의 글에서 시사받은 바가 크다. 첫째, ‘다양한 인형 이용의 시대’, 둘째, ‘섬김의 제의적 인형극 시대’, 셋째, ‘조종의 오락적 인형극 시대’, 넷째, ‘축출의 제의적 인형극 시대’, 다섯째, ‘조종의 제의적 인형극 시대’, 여섯째, ‘진열의 제의적 인형극 시대’, 일곱째, ‘진열의 오락적 인형극 시대’, 여덟째, ‘극적 연출의 오락적 인형극 시대’, 아홉째, ‘조종과 발화의 제의적 인형극 시대’ 등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조종의 오락적 인형극 시대’는 제의적 인형극에서 오락적 인형극으로의 전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진열의 제의적 인형극 시대’ 뒤에 위치해야 타당할 듯싶다. 하지만 전해지는 인형극 관련 기록에 의거하면, 셋째 자리에 위치해야 한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의적 인형극에서 오락적 인형극으로 전화되었다고 해서 제의적 인형극이 생명력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지속력과 전개 과정을 보인다는 점을 입증하는 예다. ‘조종과 발화의 제의적 인형극 시대’는 이와 관련된 자료를 조선시대까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전승되는 여러 제의적 인형극에서 이러한 양상이 포착되어서 설정한 것이다.

첫째 시기인 ‘다양한 인형 이용의 시대’는 고대부터 비롯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사당에 모셔진 신격 인형, 상·장례의 망자 인형, 망자와 함께 묻혀 지킴이 또는 봉사자 역할을 하는 토용, 전쟁에서 위장 또는 아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인형 등이 고대에서부터 만들어져 이용되었으며, 현재에도 허수아비를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나름의 목적을 위해 인형이 이용되고 있다. 사당에 모셔진 신격 인형의 경우 두 번째 시기의 제의적 인형극과 연관성이 깊다. 단순히 사당에 모셔진 것에서 적극적인 섬김의 인형극으로 전개된 것이 두 번째 시기의 제의적 인형극이다.

둘째 시기인 ‘섬김의 제의적 인형극 시대’는 적어도 삼국시대에 비롯 되어 조선시대에 자취를 남기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국가 차원의 제의나 마을 공동체 차원의 제의에서 나무, 흙, 뼈 등으로 인형을 만들어 신격으로 받들어 섬기는 연행을 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례로는 탈해왕의 뼈로 만든 신라의 동악신에 대한 제사, 나무로 만든 고구려의 고등신과 부여신에 대한 제사, 고려시대 청풍군 사람들이 목우인을 만들어 신상으로 모시던 제사, 조선시대 목멱산 사우에 모셔진 목우인에 대한 제사, 조선 전기 기우제에서 흙이나 짚으로 만든 용에 대한 경건하고 엄숙한 기원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섬김의 제의적 인형극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전남 장흥 방촌 마을의 별신제를 비롯하여 충남 홍성의 백월산 정난사 신당 제의, 경북 안동 수동 마을 국신당 제의, 충남 서천군 도둔리 각시당 제의 등에서 짚이나 나무로 만든 인형을 신격으로 받들어 섬기는 제의적 인형극이 행해진다.

셋째 시기인 ‘조종의 오락적 인형극 시대’는 고구려에서 비롯되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전기 궁중 인형극까지 이어지다가 독립적 생명력은 다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극적 연출의 오락적 인형극에 종속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의와 관련 없는 오락적 문맥에서 말이 없는 인형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 주거나 또는 일정한 동작이나 묘기에 가까운 동작들을 보여 주는 것이 ‘조종의 오락적 인형극’이다. 고구려에서 잔치 때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에서 비롯되어, 고려시대 이규보의 한시 「부답병서」와 「관롱환유작」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으며, 조선시대 성현의 한시 「관나」와 「관괴뢰잡희」를 통해 궁중 오락적 인형극이 이 전통의 맥락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이후 조종을 통한 움직임만 나타나는 오락적 인형극은 독립적인 생명력을 잃어 버리고, 이후에 나타나는 ‘극적 연출의 오락적 인형극’의 한 부분으로 종속된 것으로 보인다. 꼭두각시놀이에서 아무런 대사 없이 상좌들과 기생들의 춤과 질펀한 애정 행각이 중심이 된 피조리 거리나, 절을 지었다가 헐어 버리는 절 짓고 허는 거리가 그 예가 된다.

넷째 시기인 ‘축출의 제의적 인형극 시대’는 적어도 고려시대에 비롯되어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진다. 섬김의 제의적 인형극에 등장하는 인형은 신성화되어 모셔지는 신격이었다. 하지만 ‘축출의 제의적 인형극’에 등장하는 인형은 축출되고 없어져야 하는 잡귀들이다. 이들은 모셔지고 섬겨지는 것이 아니라 위협과 폭행을 당하며 축출되는 양상을 보인다. 축출의 제의적 인형극은 기록상으로 고려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섬김의 제의적 인형극이 존재하기 시작한 그 이전 시대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하여 섬기는 것과 축출하는 것은 동일한 인식 단계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축출의 제의적 인형극은 기록상 고려시대 나례에서의 흙으로 만든 황소 네 마리에 대한 연행에서 처음 사례가 발견된다. 흙으로 만든 황소 네 마리는 나쁜 기운을 품은 존재로 축출의 대상이 된다. 고려 고종 때 염매에 등장한 목우 역시 저주를 받아 축출되는 대상이다. 축출의 제의적 인형극은 조선시대 제웅치기와 염매라는 모습으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조선 후기 기우제 때 용 인형에게 위협과 무례한 행동으로 일관하는 용부림 연행 역시 축출의 제의적 인형극에 포함될 수 있다. 축출의 제의적 인형극은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제주도 칠성새남굿, 제주도 불찍굿, 아산 우환굿, 충청도 미친굿, 경기도 도당굿 등에서 잡귀로 간주되는 인형들에 대한 축출의 연행이 이루어진다.

다섯째 시기인 ‘조종의 제의적 인형극 시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지속된다. 신격을 섬기거나 잡귀를 축출하는 제의적 인형극에 등장하는 인형은 보통 움직임이나 말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형을 조종하여 움직임을 부여한 것이 ‘조종의 제의적 인형극’이다. 고려시대 팔관회에서 행해진 신숭겸과 김락 추모 행사에서의 연행이 문헌 기록에 나타나는 첫 ‘조종의 제의적 인형극’이다. 여기서 신숭겸 우상과 김락 우상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말을 타고 뜰을 돌아다니기까지 한다. 동적 인형이 등장하여 움직임을 보이는 조종의 제의적 인형극은 조선시대에도 지속된다. 고성 지방의 신상을 메고 마을을 돌아다니고 제사를 지내는 연행을 비롯하여, 제주도·함경도·김해 등지의 입춘날 목우 끌기 연행 등이 이에 해당한다. 조선 전기 김종직이 경험한 성모천왕 앞에서의 국사신 놀리기 역시 조종의 제의적 인형극 전통과 연결된다. 현대에도 이러한 제의적 인형극은 지속되어 충북 오티 마을 별신제, 전북 내동 마을 당산제, 충남 홍가 마을 장군제, 제주도 입춘굿놀이, 경북 마령동 별신제, 동해안 오귀굿 영혼 결혼식, 충청도 사혼제 등에서 그 전승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여섯째 시기인 ‘진열의 제의적 인형극 시대’는 고려시대에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궁중 내농작을 통해 구체화되었다가 전승이 단절되었다. ‘진열의 제의적 인형극’은 정적이고 무언인 인형들을 연출하여 세간에 익히 알려진 전형적 상황이나 장면을 진열을 통해 보여 주는 것이다. 『고려사』에 나타난 최승로의 상소문을 근거로 추론해 볼 때, 적어도 고려시대에 비롯되어 조선시대 궁중 내농작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진열의 제의적 인형극은 조선 전기 이후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진열의 오락적 인형극’에서 발전된 양상을 보이고 있어 진열의 제의적 인형극이 진열의 오락적 인형극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론된다.

일곱째 시기인 ‘진열의 오락적 인형극 시대’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지속되며 전성기를 누리다가 단절되었다. 오락적 문맥에서 정적이고 말이 없는 인형들을 연출하여 세간에 익히 알려진 전형적 상황이나 장면을 인형들의 진열을 통해 보여 주는 것이 ‘진열의 오락적 인형극’이다. 연행 양상이 진열의 제의적 인형극과 동일하며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추론된다. 조선시대 연산군 때 궁중에서 벌어진 산대잡상놀이, 봉사도에 나타난 산대잡상놀이, 『기완별록』에 묘사된 금강산놀이, 팔선녀놀이, 신선놀이, 상 산사호놀이 등이 진열의 오락적 인형극 시대를 이끈 구체적 사례들이다. 진열의 오락적 인형극은 나름의 자체적 전개 양상을 보여 주기도 한다. 꾸며진 무대나 인형들이 모두 움직이지 않는 정적 연행이 있는가 하면, 인형들은 움직이지 않지만 꾸며진 무대가 움직이는 연행, 나아가 꾸며진 무대나 인형들 모두 움직이는 동적 연행이 존재하기도 한다.

여덟째 시기인 ‘극적 연출의 오락적 인형극 시대’는 조선시대에 완성된 형태를 갖추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구려에서부터 비롯된 조종의 오락적 인형극에 목소리 연행과 일정한 이야기 구조를 덧붙인 것이 ‘극적 연출의 오락적 인형극’이다. 극적 연출의 오락적 인형극이 가능해진 것은 말하는 인형의 등장에 기인한다. 다양한 외양의 말하는 인형들이 등장하여 가정과 사회의 제반 문제를 두루 다루는 ‘극적 연출의 오락적 인형극’이 전개된다. 극적 연출의 오락적 인형극은 조선시대 박승임의 「괴뢰붕」, 나식의 「괴뢰부」, 강이천의 「남성관희자」 등에서 그 양상과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 다채로운 모습의 개성있는 인형들, 다양한 연행 내용, 진전된 연행 방식 등이 나타나 조선 후기에 극적 연출의 오락적 인형극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후 극적 연출의 오락적 인형극은 전국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다양한 연행 방식과 내용을 가진 인형극을 만들어 내는 한편 떠돌이 광대패의 인기 연행 종목의 하나로 전승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급격히 쇠퇴하여 현재 꼭두각시놀음과 서산 박첨지놀이, 발탈 등에서 그 옛 자취를 남기고 있다.

아홉째 시기인 ‘조종과 발화의 제의적 인형극 시대’를 입증하는 조선시대까지의 사례는 현재로서는 찾아볼 수 없다. 등장하는 인형이 움직일 뿐만 아니라 말까지 하는 연행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조종과 발화의 제의적 인형극’이다. 제의적 인형극 자체의 전개 양상이나 극적 연출의 오락적 인형극의 영향을 가정해 보았을 때 충분히 설정될 수 있는 유형이다. 하지만 현재 이에 해당하는 사례를 찾을 수 없다. 다만 최근까지 전승되었거나, 현 재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제의적 인형극에서 조종과 발화의 제의적 인형극에 포함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수리 마을 갯제, 내동 마을 당산제, 남해안 별신굿 비비각시 적덕이놀이, 충청도 미친굿, 충청도 개비잡이 등이 최근까지 전승되었거나 현재에도 전승되는 사례들이다. 이 사례들을 보더라도 이전 시기에 조종과 발화의 제의적 인형극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인형극은 왕조사적 시대 구분에 얽매이지 않고 나름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보이고 있다. 인형의 다양한 이용을 통해서 인형극의 기반을 형성하고, 여기서 단순히 모셔지기만 하던 신격 인형을 적극적으로 섬기고 제사를 올리는 섬김의 제의적 인형극이 나오게 된다. 인형의 다양한 이용은 오락적 인형극에도 영향을 끼쳐 조종을 통해 춤을 추거나 일정한 움직임을 보이는 조종의 오락적 인형극을 탄생시킨다. 섬김의 제의적 인형극은 축출의 제의적 인형극을 낳게 함과 동시에 조종의 제의적 인형극 시대를 연다. 조종의 제의적 인형극의 탄생에는 조종의 오락적 인형극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진열의 제의적 인형극은 정적 인형에서 동적 인형으로의 전개라는 문화사적 시각에서는 유별난 것이다. 모심에서 섬김 그리고 조종으로 이어지는 제의적 인형극의 본 가지와는 다른 가지를 형성하는 것이 진열의 제의적 인형극인데, 이것은 진열의 오락적 인형극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진열의 오락적 인형극은 그 형성에 진열의 제의적 인형극의 영향을 받았고, 전개 과정에서 조종의 오락적 인형극의 영향을 받아 동적인 인형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오락적 인형극은 조종의 오락적 인형극이 태동된 이후 나름의 전개 과정을 거치다가 마침내 극적 연출의 오락적 인형극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정적 인형에서 동적 인형으로, 말이 없는 인형에서 말하는 인형으로, 단순 삽화에서 극적 전개로 맺어지는 오락적 인형극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 제의적 인형극의 경우 단순 모심에서 적극적 섬김으로, 나아가 조종으로 나아가는 전개 과정을 보인다. 이러한 전개 과정 다음에 설정된 것이 조종과 발화의 제의적 인형극이다. 조선시대까지의 사례는 현재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제의적 인형극 나름의 전개 과정이나 극적 연출의 오락적 인형극의 영향 아래 충분히 존재했을 유형이 조종과 발화의 제의적 인형극이다.

인형극은 한 시대를 마감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시대의 인형극이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인형극이 전개됨과 동시에 이전 시대의 인형극은 그 나름대로 자체적 생명력을 유지한 채 지속적으로 전승되는 것이다. 또한 크게는 제의적 인형극 유형과 오락적 인형극 사이에, 작게는 각각의 인형극 유형 사이에 상호 영향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 역시 인형극의 역사를 살피는 데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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