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6장 가면극의 역사적 전개 양상
  • 2. 우리나라 가면극의 역사적 전개
  •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역사적 전개
  • 고려시대
전경욱

고려의 건국으로 팔관회의 연희 공연이 더욱 성대했고, 불교의 성행으로 연등회·수륙재·우란분재 등 불교 행사에 각종 연희가 동원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궁중 나례(宮中儺禮)를 도입함으로써 궁중 나례에서의 연희가 시작되었고, 왕을 위해 배를 50척이나 동원해 벌이는 대규모의 수희(水戲)나 궁중 연회가 벌어졌는데 이때 각종 연희가 공연되었다.

불교 제전인 연등회와 토속신에 제사를 지내는 팔관회에서는 채산 또는 채붕이라고 하는 무대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 앞에서 가무백희를 연행했 다. 그리고 나례에서는 방상씨(方相氏), 창사(唱師), 십이지신(十二支神), 처용(處容) 등이 가면을 썼고, 산악·백희 계통의 연희가 공연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이 연희들을 백희, 잡희 또는 산대잡극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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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상씨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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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4년(고종 31)에는 궁중 연회에서 가면을 쓰고 공연하는 연희가 있었다.

정해일에 왕이 간소한 연회를 배설하였다. 이날 최이가 가면을 쓴 놀이꾼들이 하는 잡희(雜戲)를 바쳤다. 왕이 그들에게 은병 한 개씩 주고, 또 기생들에게는 각각 비단 두 필씩 주었다.318)『고려사』 권23, 세가23, 고종 31년 2월.

이 기록에 따르면, 궁중의 간소한 연회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잡희를 공연했다. 이 잡희는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이거나 연극적 놀이였을 것이다.

또한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말로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자를 광대(廣大)라고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319)『고려사』 권124, 열전37, 전영보.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 전문적으로 가면을 쓰고 노는 가면극이 있었고, 그 연희자를 ‘광대’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나례는 섣달 그믐날 궁중과 민간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일정한 도구를 가지고 주문(呪文)을 외우며 귀신을 쫓는 동작을 하면서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던 의식이다. 고려 말에는 점차 나례에서 구역 의식(驅疫儀式)보다 잡희부(雜戲部)가 확대되면서 나례가 잡희인 나례희(儺禮戲), 즉 나희로 인식되어 갔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져 본래의 말이 전도될 정도였다.

고려 말에 이색이 지은 한시 「구나행」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320)이색, 『목은집(牧隱集)』 권21, 「구나행(驅儺行)」. 전반부(1∼14구)는 십이지신과 진자(侲子)들이 역귀(疫鬼)를 쫓는 의식을 묘사 하는 내용이고, 후반부(15∼28구)는 구나 의식(驅儺儀式)이 끝난 후 연희자들이 각종 잡희를 연행하는 내용이다.

오방귀 춤추고 사자가 뛰놀며 / 舞五方鬼踊白澤

불을 뿜어내기도 하고 칼을 삼키기도 하네 / 吐出回祿呑靑萍

서방에서 온 저 호인(胡人)들은 / 金天之精有古月

검기도 하고 누렇기도 한 얼굴에 눈은 파란색이네 / 或黑或黃目靑熒

그 중 한 노인이 등은 구부정하면서도 키가 큰데 / 其中老者傴而長

여러 사람들 모두 남극성이 아닐까 놀라고 감탄하네 / 衆共驚嗟南極星

강남의 장사꾼은 무어라 지껄이며 / 江南賈客語侏離

진퇴의 가볍고 빠르기가 바람결의 반딧불 같네 / 進退輕捷風中螢

신라의 처용은 칠보 장식을 했는데 / 新羅處容帶七寶

머리 위의 꽃가지에선 향기가 넘치네 / 花枝壓頭香露零

긴 소매 날리며 태평무를 추는데 / 低回長袖舞太平

불그레하게 취한 얼굴은 아직도 다 깨지 않은 듯 / 醉臉爛赤猶未醒

누런 개는 방아 찧고 용은 여의주를 다투며 / 黃犬踏碓龍爭珠

온갖 짐승 더풀더풀 춤추니 요임금 시절 궁정 같네 / 蹌蹌百獸如堯庭.

「구나행」 가운데 이 부분은 나례에서 구역(驅疫)이 끝난 뒤에 행해진 연희들을 보고 읊은 것으로 나희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오방귀무(五方鬼舞), 사자춤, 불 토해 내기(吐火), 칼 삼키기(呑刀), 서역의 호인희(胡人戲), 줄타기, 처용무,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 등을 묘사했는데, 이는 대부분 산악·백희, 산대잡극, 잡희 등으로 부르던 연희들이다.

또한 이색은 한시 「동대문에서 대궐 문 앞까지의 산대잡극은 전에 보지 못하던 바라(自東大門至闕門前山臺雜劇前所未見也)」에서 “산대의 모양은 봉래산과 같았고, 바다에서 온 선인이 과일을 드리는 춤을 추었고, 북과 징 소리에 맞추어 처용무를 추었으며, 긴 장대 위에서 솟대타기를 했고, 폭죽놀이가 있었다.”면서 이러한 연희들을 산대잡극이라고 불렀다.321)이색, 『목은집』 권33, 「자동대문지궐문전산대잡극전소미견야(自東大門至闕門前山臺雜劇前所未見也)」. 결국 산대잡극이라는 명칭은 산대 앞에서 연행했던 연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의 여러 기록에 소개된 우희는 골계희로서 길거리, 궁중 연회, 사냥터, 절에서의 연회 등 다양한 곳에서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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