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6장 가면극의 역사적 전개 양상
  • 2. 우리나라 가면극의 역사적 전개
  •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역사적 전개
  • 조선시대
전경욱

조선의 건국과 함께 성리학이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팔관회, 연등회는 자취를 감추었고, 수륙재, 우란분재 같은 불교 행사도 약화되었으며, 왕을 위해 수희나 궁중 연회에서 대규모의 연희를 동원하는 것 또한 어렵게 되었다.

그 대신에 나례, 중국 사신 영접 행사, 문희연, 수륙재, 우란분재, 관아 행사, 읍치 제의(邑治祭儀), 동제(洞祭), 그리고 각종 궁중 행사에서 연희를 연행했다.

성현의 한시 「관나희」는 나례에서 방울받기, 줄타기, 인형극, 솟대타기 등이 연행되었음을 전해 준다. 역시 성현의 한시 「관괴뢰잡희」는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서 땅재주(또는 솟대타기), 줄타기, 방울받기, 인형극 등의 연희가 있었음을 전해 준다. 김구(金絿, 1488∼1534)의 한시 「이 밀양의 잔치에서 우희를 관람하고 짓다(李密陽宅讌席觀優戲作)」(1525)에 사대부가의 잔치에서 연행된 가면희가 보인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전문 연희자가 크게 네 부류로 나뉘고, 그들의 놀이도 분화되어 나타난다. 『문종실록』에는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채붕을 설치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보인다.322)『문종실록』 권2, 문종 즉위년 6월 10일 임오. 그런데 이때 나(儺)를 쓰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이제 섣달 그믐날의 구나 의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나례에 동반되었던 잡희, 즉 나희를 가리키며, 이것이 중국 사신 영접에도 사용된 사실을 알려 준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동원된 놀이꾼들의 부류와 그들의 연희를 구별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라에 국상이 있어서)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아서 함부로 떠들고 희학할 수 없다고 한다면, 광대와 서인(西人)의 주질(注叱), 농령(弄鈴), 근두(斤頭) 등과 같은 규식(規式)이 있는 놀이는 예전대로 하고, 수척(水尺)과 승광대(僧廣大) 등의 웃고 희학(戲謔)하는 놀이는 늘여 세워서 수만 채우는 것이 가하다. 음악은 마땅히 예전대로 하고, 금지하는 것이 불가하다.323)『문종실록』 권2, 문종 즉위년 6월 10일 임오.

이 기록에 따르면, 광대와 서인은 주질(줄타기), 농령(방울받기), 근두(땅재주) 등의 규식이 있는 놀이를 담당했고, 수척과 승광대는 웃고 희학하는 놀이를 담당했다. 악공(樂工)은 음악을 담당했다.

광대가 담당한 규식이 있는 놀이는 전문적 놀이꾼들만이 연행할 수 있는 곡예에 해당하는데, 이는 산악·백희 계통의 연희다.

수척은 화척(禾尺), 재인(才人), 달단(韃靼), 백정(白丁), 재백정(才白丁), 신백정(新白丁) 등으로도 불렸다. 그러므로 수척은 바로 백정을 말한다. 백정은 조선시대 이전에는 양수척(楊水尺)이라고 불렸다. 양수척은 후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떠돌아다니면서 천업에 종사하던 무리로, 북방인이나 귀화인의 후예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백정은 1423년(세종 5) 그 이전의 재인과 화척을 통틀어 가리킨 것이다. 이들은 도살업, 육류 판매업, 고리 제조업(柳器製造業), 잡희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469년(예종 1)에 양성지가 올린 상소문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양수척은 전조(前朝, 고려)의 초기에 있었는데 강화도로 옮겨 갔을 때도 있었습니다. 재인과 백정은 충렬왕 때도 있었고 공민왕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멀리는 500∼600년 전(고려 초기)에 있었고, 가까워도 수백 년 아래 (충렬왕 때와 공민왕 때)로는 떨어지지 않는데도,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풍습과 짐승을 도살하는 일을 지금껏 고치지 않고 있습니다.324)『예종실록』 권6, 예종 1년 6월 29일 신사.

이 기록은 재인과 백정이 양수척의 계통이며, 예종 때까지도 계속 놀이와 도살에 종사하고 있었음을 전해 준다.

또한 『중종실록』의 “정재인(呈才人)·백정 등은 본시 일정한 재산이 없는 사람들로서 오로지 우희(優戲)를 직업으로 하여 여염을 횡행하며 양식을 구걸한다고 하나 …….”라는 기록도,325)『중종실록』 권95, 중종 36년 5월 14일 기해. 조선 전기에 백정들이 소를 잡을 뿐 아니라 연희에도 종사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서울에서 가면극인 산대놀이를 놀았던 반인(泮人)들은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들로서 조선 전기부터 소를 도살해 문묘 제향(文廟祭享)에 응했고, 조선 후기에는 현방(懸房)이라 불리는 푸줏간을 운영하면서 서울의 쇠고기 유통을 독점했던 사람들이었다. 조선이 건국되어 성균관의 문묘 제향을 위해 소를 도살하는 백정이 필요했을 때, 귀화한 북방인의 후예에게 그 일을 맡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인은 이들이 반궁(泮宮), 즉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였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성균관의 노비는 계속 증가하여 숙종 때에는 4,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 반인 모두가 북방 유목민의 후예는 아니었고, 그들 중 일부가 북방 유목민의 후예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학자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는 본산대놀이 연희자가 반인이라는 의견을 처음 제시하였다.

산대희의 연희자는 궁중에서 천한 일을 하던 하층민으로 반인(泮人, panin)이라 칭했는데, 상인(常人)과의 교혼(交婚)은 금지되었다. 그들은 산대도감 또는 나례도감에 예속되어 궁중으로부터 쌀이나 콩 등을 지급받아 왔으나, 인조 12년 상주(上奏)에 의해 궁중에서 산대희가 폐지됨으로써, 그 이후에는 그들 자신이 연희의 흥행에 전력하게 되었고 커다란 무대를 만 드는 것도 없어지게 되었다. 특히 서쪽 교외의 아현리(阿峴里)에 사는 연희자들이 많았는데, 이른바 아현(애오개) 산대의 이름이 유명했다.326)秋葉隆, 「山臺戲」, 『朝鮮民俗誌』, 東京: 六三書院, 1954, 172쪽.

이 기록은 서울 근교에서 놀던 가면극인 본산대놀이의 성립에 대해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반인들이 산대도감 또는 나례도감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말은 이들이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785년(정조 9)에 왕명으로 성균관에서 편찬한 『태학지(太學志)』에서 반인과 전통 연희의 관련을 보여 주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가) 1703년(숙종 29)에 유생이 영접도감(迎接都監)에서 주관하는 잡희를 보는 것을 금하고, 범한 자는 3년 동안 과거 응시를 정지시키라 명했다. 매번 북사(北使, 북방 사신)가 올 때를 당해 조정에서 나례도감을 설치해 창우(倡優)들을 모아 산붕(山棚)을 배설해 맞이했다. 이에 이르러 대사성 김진규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거리에서 도성 사람들이 물결처럼 달려가는 것을 보았는데 사자(士子)가 또한 많이 가서 보니 선비가 자중치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마땅히 금제(禁制)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므로 그리하라는 어명이 있었다.327)『태학지(太學志)』 권7, 교화(敎化), 벽이(闢異).

(나) 1736년(영조 12)에 임금이 유사에게 성균관 입직관(入直官)의 죄를 다스리고, 태학의 두 장의(掌議)를 모두 과거 응시를 정지시키라고 명했다. 이때 반인들이 산붕을 설치해 반촌(泮村) 내에서 연희를 베푸니 임금이 듣고 이 명령이 있었다.328)『태학지』 권7, 교화, 벽이.

(가)에 따르면, 중국 사신이 올 때 조정에서는 나례도감을 설치하고 창우들을 모아 산붕을 배설해 맞이하였다. 그런데 (나)에 따르면, 반인들이 반촌 내에서 산붕을 설치하고 연희를 연행한 것으로 보인다. 산붕은 작은 산 대로서 예산대라고도 불렀다. 작은 산대인 산붕을 설치하고 그 앞에서 여러 가지 연희를 펼쳤다. 그러므로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한 나례도감에서 창우들을 모을 때 당연히 산붕을 설치하고 놀던 반인들도 동원했을 것이다.

한편 (가)와 동일한 내용을 다룬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에서는 “성균관 근처에서 반인의 무리가 설붕(設棚)하고 잡희를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고,329)『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형전(刑典), 금제(禁制). 『영조실록』에서는 “반인이 성묘(聖廟, 문묘) 가까운 곳에 설붕하고, 거재유생(居齋儒生)이 가서 관람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라고 기록하고 있다.330)『영조실록』 권41, 영조 12년 2월 22일 병술.

그런데 동일한 사건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는 “지난달 20일경 반인의 무리가 마침 북방 사신들을 위해 베풀었던 산붕놀이를 멈추는 때를 만나(실제로 『영조실록』 1월 24일조를 보면, 청나라 사신이 왔기 때문에 임금이 모화관에 나아가 맞이하는 내용이 있다), 각자 돈을 모아 산붕희(山棚戲)의 도구를 빌려 이틀간 성묘(문묘)의 뒤에 산붕을 설치하고 기이한 재주를 두루 보여 주었고, 음란한 악을 크게 베풀었는데 성균관의 유생들도 뛰어가서 구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라고 하며,331)『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권45, 영조 12년 2월 20일 갑신. 반인들이 중국 사신 영접 시에 설치하는 산붕을 빌려 연희를 베푼 것으로 나타난다.

이상에서 살펴본 기록에 따르면, 반인들이 산붕을 설치하여 연희를 공연했고, 그것을 본 유생들의 대표인 태학의 두 장의(掌議)는 모두 과거 응시 자격이 정지되었으며, 잡희를 금지하지 못한 성균관 관원은 벌을 받았다. 『승정원일기』에는 이에 대해 상소를 올려 벌을 받은 자들을 구명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구명을 위한 상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처벌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들보다 후대의 기록인 『태학지』와 형법책인 『신보수교집록』에 반인들이 직접 산붕을 설치하고 논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 중국 사신 영접 행사의 연희 장면을 전해 주는 아극돈의 봉사도가 발견되었다. 아극돈은 1717∼1725년 사이에 네 차례나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1725년(영조 1)에 조선에 관한 풍물과 자신에 대한 영접 행사를 묘사한 20폭짜리 화첩을 완성했다. 이 가운데 제7폭은 서울의 모화관(慕華館) 마당에서 사신을 위해 공연한 연희들을 묘사하고 있다. 객사 바로 앞에서는 한 연희자가 대접돌리기를 하고 있다. 마당 가운데서는 두 명의 연희자가 땅재주인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고, 이들 양옆에서 각각 두 명씩 모두 네 명의 연희자가 탈춤을 추고 있다. 마당의 왼쪽에서는 줄타기를 하고 있고, 마당의 오른쪽에는 산거(山車)·산붕(山棚)·윤거(輪車)·예산대(曳山臺)·예산붕(曳山棚)·헌가산대(軒架山臺) 등으로도 불렸던 소규모의 산대가 보인다. 바로 이러한 산대 앞에서 공연하던 연희들을 ‘산대희’라고 불렀는데, 연희 종목은 모두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특히 가면을 쓴 네 사람이 춤을 추고 있는데, 서울 근교의 가면극을 산대놀이라고 한 이유를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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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도 제7폭
봉사도 제7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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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의 『경도잡지』에서는 나례도감에 속한 연희들을 소개하고 있다. 나례도감에 속했다는 것은 나례나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서 공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록에서는 인형극 또는 산대잡상놀이와 가면극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가면극의 성립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연극에는 산희(山戲)와 야희(野戲) 두 부류가 있는데, 나례도감에 소속된다. 산희는 다락(棚)을 매고 포장을 치고 하는데, 사자·호랑이·만석중(曼碩僧) 등의 춤을 춘다. 야희는 당녀(唐女)와 소매(小梅)로 분장하고 논다.332)유득공, 『경도잡지(京都雜志)』 권1, 풍속, 성기(聲伎).

산희는 가설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인형극이거나, 산대를 만들고 그 위에서 잡상(雜像)을 놀리는 산대잡상놀이이거나, 소형 산대인 산붕 앞에서 공연하는 사자춤, 호랑이춤, 만석중춤일 것이다. 야희의 소매와 당녀는 현재 양주 별산대놀이와 송파 산대놀이 등에 나오는 점으로 보아 이미 유득공의 『경도잡지』가 저술된 18세기 중엽은 본산대놀이가 성립되어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산악·백희로부터 가면극으로의 발전을 의미한다. 본산대놀이 가면극은 나례도감에 속했던 연희자들, 즉 나례나 중국 사신 영접 행사 등에 동원되어 산악·백희 계통의 연희를 담당했던 연희자들 가운데 한 부류인 반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강이천의 한시 「남성관희자」는 그가 열 살 때인 1778년 남대문 밖에서 꼭두각시놀이와 가면극을 보고 지은 것인데, 현전하는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과 그 내용이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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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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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본산대놀이의 연희자는 반인들이었으나, 반주 음악을 담당한 악사들은 총융청(摠戎廳)의 공인(工人)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인은 전문 음악 연주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1860년대 형성된 판소리계 소설 『무숙이 타령』에 “산대놀이하는 때는 총융청 공인 등대하고”라는 내용이 있다. 별산대놀이와 해서(海西) 탈춤에는 가면극의 연희자와 별도로 음악 반주를 담당하는 악사들이 있었다. 그래서 가면극을 공연할 때에는 악사들을 초청해야만 했다. 양주 별산대놀이는 원래 양주 관아의 악공들이 반주를 맡았으나, 관아가 없어진 후에는 무속인(巫俗人) 집안의 화랭이들이 반주를 맡았다. 봉산 탈춤은 원래 관아의 악공이 반주자였으나, 관아가 없어진 후에는 가창 마을 재인촌의 재인들이 반주를 맡았다. 강령 탈춤은 강천리 재인촌의 재인들이 반주자였다. 마찬가지로 서울의 본산대놀이도 연희자는 반인들이었지만 반주 악사는 따로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무숙이 타령』에서는 산대놀음의 악사를 총융청의 공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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