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6장 가면극의 역사적 전개 양상
  • 2. 우리나라 가면극의 역사적 전개
  •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의 역사적 전개
전경욱

상고시대 우리의 자생적 연희의 흔적은 암각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고인돌 암각화를 보면 영일 인비리와 칠포리, 경주 안심리, 함안 도항리, 여수 오림동의 고인돌 뚜껑돌에 석검·석촉·사람·동심원 등이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암각화를 통해서 피장자의 생전 지위와 그의 죽음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지극한 추모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또한 그의 장례를 위한 집단적인 연희를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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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의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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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대곡리 반구대의 암각화는 거대한 바위에 각종 동물과 물고기, 인물 등이 200여 점이나 조각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선사 시대 조각품이다. 호랑이·사슴·고래와 같은 동물들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가 하면, 사람이 벌거벗고 춤추는 모습과 화살을 가지고 사냥하는 모습이 묘사된 것도 있다. 가면은 두 개가 있다. 이 암각화들은 수렵을 떠나기 전의 진지한 기원과 모의 연행 그리고 수확을 하고 돌아와서의 감사 제사와 마을 사람들의 즐거운 연희가 충분히 연상되는 장소이자 그림이다.

고대 국가 시대에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등 국중 대회(國中大會)가 있었다. 국중 대회는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굿을 하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춘 행사이면서, 국가 단합을 위한 정치적인 기능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현재의 마을굿은 바로 나라굿인 국중 대회와 동일한 목적과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나라굿의 유풍임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부여에서는 정월에 지내는 제천 행사에서 연일 크게 모여서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333)『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전, 부여. ‘영고(迎鼓)’라는 명칭을 통해 북을 치고 풍악을 울리면서 신을 맞이하는 절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월에 많은 사람이 모여 연일 노래하고 춤추었다는 내용은 바로 오늘날 대개 정월 대보름에 당집에서 마을의 수호신에게 제사 지내고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풍물을 울리고 노는 마을굿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제천 의식에서 굿·놀이·연극의 복합체인 원시 종합 예술이 싹튼 것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마한조에 기록된 바와 같이 5월에 씨를 뿌린 후와 10월에 농사일을 마친 후에 행한 제천 의식도 요즈음 강릉 단오제를 비롯해 여러 마을에서 단오 때 풍악을 울리고 노래와 춤으로 마을의 수호신에게 제사 지내는 마을굿을 거행하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우리나라의 마을굿은 기본적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적 성격과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풍요 제의(豐饒祭儀)의 성격을 겸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마을굿의 일종인 강릉 단오제나 하회 별신굿에서는 무당들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마을굿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회 별신굿의 경우와 같이 마을 주민들이 가면을 쓰고 노는 가면극이 생겨났다. 하회 별신굿은 무당들이 주도했지만 가면극인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마을 주민인 농민들이 담당했다. 강릉 단오제도 무당들이 주도했지만 가면극은 관노(官奴)들이 놀았다.

별신굿에서 가면극을 놀았던 곳으로는 하회의 이웃 마을인 병산도 있다. 그 밖에 경북 경산의 자인 팔광대놀이, 경북 영양군 주곡동의 가면극 등이 마을굿놀이에서 유래한 가면극이다.

조선 전기 마을굿의 모습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지방(고성) 사람들은 해마다 5월 1일에서 5일까지 모두 모인다. 두 무리로 나뉘어 사당의 신상(神像)을 메고 푸른 깃발을 세우고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닌다. 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술과 찬으로써 신상에 제사 지내고, 연희자(儺人)들은 모두 모여 온갖 연희를 펼친다.334)『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고성현(固城縣), 사묘(祀廟), 성황사(城隍祠).

단오 때 마을굿에서 신상과 성황대를 앞세우고 가가호호 방문하고 나서 연희자들이 온갖 연희를 펼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가능한 추정을 더한다면 성황당에서 신상을 꺼낼 때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성황대(푸른 깃발)에 신이 내리기를 빌며 기다리다가 신이 내린 후 성황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면서 마을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이는 요즈음 마을굿을 지낼 때 성황당에서 제사를 지내며 성황대에 신이 내리기를 기다리다가 신이 내리면 풍물패가 풍악을 울리면서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지신밟기를 하는 모습과 일치한다. 이러한 마을굿놀이들이 발전하여 하회 별신굿 탈놀이나 강릉 관노 가면극과 같은 가면극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2월조에서 소개한 강원도 고성의 풍속을 통해서 조선 후기의 마을굿이 가면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군(郡)의 사당에 관(官)에서 제사를 드린다. 비단으로 신의 가면을 만들어 사당 안에 비치해 두면 12월 20일 이후에 그 신이 고을 사람에게 내린다. 신이 오른 사람은 그 가면을 쓰고 춤추며 관아의 안과 고을을 돌아다니며 논다. 그러면 집집에서는 신을 맞아다가 즐긴다. 그렇게 하다가 정월 보름 전에 신을 사당 안으로 돌려보낸다. 이 풍속은 해마다 있으며, 이는 나례신(儺禮神)의 종류다.335)홍석모,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2월, 월내(月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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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 별신굿 탈놀이의 각시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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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 지방에는 연말에 사당에서 신을 맞이하여 관아뿐 아니라 집집마다 방문하며 노는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신을 나례신이라 부르고, 이 행사를 나례와 연결시켜 해석한 것은 후대의 일일 것이다. 원래는 마을의 수호신을 상징하는 가면을 모셔 즐겁게 함으로써 마을의 안녕과 풍농·풍어를 기원했을 것이다. 마을의 수호신에게 이러한 기원을 하는 것이 바로 마을굿, 즉 동제의 보편적 현상이다.

그런데 이 지방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을 가면으로 형상화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안동 하회 마을에서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신을 가면으로 형상화한 것과 일치한다. 하회 별신굿 탈놀이에서는 성황신인 각시 가면이 존재하고, 각시의 무동춤은 신성현시(神聖顯示)를 연출한다. 결국 강원도 고성과 경북 하회의 예를 통해 마을굿놀이에서 마을 수호신을 상징하는 가면을 중심으로 가면극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이 반드시 이러한 과정만 거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창무(黃昌舞)와 『삼국유사』 처용랑(處容郎) 망해사(望海寺)조의 기록은336)『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處容郎) 망해사(望海寺). 자생적 가면희의 또 다른 예를 보여 준다.

황창무는 가면을 쓰고 춤추는 검무로서, 화랑 관창(官昌)이 계백 장군에게 살해된 사실을 전설화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칼춤 또는 칼 재주 부리기는 이미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나오는 산악·백희의 한 가지다. 황창무는 칼 재주 부리기가 고사와 결합되어 형성된 것이다.

처용랑 망해사조의 기록에서 동해용, 처용, 남산신(南山神), 북악신(北岳神), 지신(地神) 등의 신격들이 나와서 춤을 추었다는 것은 사람이 그 신격들에 해당하는 가면을 쓰고 춤을 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헌강왕이 남산 신의 가면을 쓰고 남산신의 춤을 추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신라 헌강왕(재위 875∼886) 때의 기록인 처용 설화는 처용을 문신(門神)으로 신격화하면서 처용의 모습이 역귀를 퇴치할 수 있는 주술력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이 설화에서 처용무와 관련되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처용이 밖에 나가 밤늦도록 놀다가 집에 돌아오니 역신이 자기의 아내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처용이 처용가를 지어 불렀더니 역신이 나타나 용서를 빌면서 “맹세코 이후로는 공(公)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물러갔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처용무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나례와 연회 등에서 계속 전승되었는데, 가면을 착용하고 역귀를 쫓아내는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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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의궤첩(整理儀軌帖)의 처용무
정리의궤첩(整理儀軌帖)의 처용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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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이 남산신의 가면을 쓰고 추었던 춤이나 처용무에서 처용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은 자생적 가면희의 전통을 잘 보여 주는 예다. 처용무는 실제로 후대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에 영향을 끼쳤다. 강릉 관노 가면극에 등장하는 양반 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의 삼각관계는 바로 처용, 처용의 처, 역신의 관계와 매우 유사하다. 홍역(紅疫)의 역신으로 간주되는 시시딱딱이가 다정하게 춤추며 노는 양반 광대와 소매각시를 훼방 놓는다. 그리고 소매각시를 억지로 끌고 가서 차지한다. 하지만 결국 양반 광대가 시시딱딱이를 물리치고 다시 소매각시를 찾아온다. 처용 설화에서 처용이 역신을 쫓아내고 자기 처를 다시 찾는 구나(驅儺)의 형식과 양반 광대가 시시딱딱이를 물리치고 소매각시를 되찾는 극적 형식이 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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