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6권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 제6장 가면극의 역사적 전개 양상
  • 3.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과 조선 후기의 유흥 문화
  •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분포
전경욱

본산대놀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근교의 가면극은 애오개(아현)·사직골·구파발·녹번 등에 있었다.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서울과 경기도의 송파 산대놀이, 양주 별산대놀이, 황해도의 봉산 탈춤, 강령 탈춤, 은율 탈춤, 경남의 수영 야류, 동래 야류, 통영 오광대, 고성 오광대, 가산 오광대, 남사당패의 덧뵈기 등이 생겨났다.

현재 본산대놀이는 전하지 않는다. 학자들은 흔히 애오개와 사직골 등에 있었던 원래의 산대놀이를 본산대놀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양주와 송파 등지의 별산대놀이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유래에 대해 1930년대에 양주를 현지 조사했던 송석하와 아키바 다카시는 애오개 본산대놀이의 영향이라고 보았고, 1930년에 필사된 양주 별산대놀이 김지연(金志淵)본의 제보자인 조종순(趙鍾洵)은 구파발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조동일 소장의 양주 별산대놀이 대본(1957년본)에서는 사직골 딱딱이패의 영향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양주 별산대놀이의 유래에 대해 여러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19세기 초중엽에 본산대놀 이 계통의 가면극을 본떠 성립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드러난다. 송파 산대놀이는 19세기 초중엽에 구파발 본산대놀이 등의 영향 아래 성립된 별산대놀이다.

황해도 일대의 가면극을 해서 탈춤이라고 하는데, 이 탈춤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봉산·사리원을 중심으로 그 동쪽 지대인 기린·서흥·평산·신계·금천·수안, 북쪽 지대인 황주, 서쪽 지대인 안악·은율·재령·신천·송화, 남쪽 지대인 강령·옹진·연백·해주 등지에서 전승되고 있었다. 황해도에서는 오일장이 서는 거의 모든 장터에서 해마다 한 번씩 가면극을 초청해 놀았다고 한다. 현재 봉산 탈춤, 강령 탈춤, 은율 탈춤이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해 복원되어 전승되고 있다.

경남에서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가면극을 야류(野遊)라고 부르고, 서쪽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가면극을 오광대(五廣大)라고 부른다. 야류와 오광대의 발생지는 낙동강변인 초계 밤마리(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라고 전한다. 밤마리의 시장에서 대광대패라는 유랑 예인 집단이 여러 공연물 가운데 하나로 가면극을 놀았다.

야류는 들놀음이라고도 부르는데, 동래·수영·부산진 등지에서 전승되었다. 오광대는 다섯 광대가 나온다거나 다섯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오광대라고 하는데, 초계·신반·통영·고성·가산·마산·진동·가락·거제·진주·산청·학산·도동·서구·남구 등지에서 전승되었다.

조선 후기에 서울의 시정(市井)에서는 성균관 소속의 노비인 반인들이 본산대놀이를 공연하였다. 특히 애오개와 사직골의 본산대패는 지방 순회 공연을 자주 다녔는데, 이것이 각 지방의 가면극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남사당패, 대광대패 등의 유랑 예인 집단이 각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연희를 공연하면서 흥행을 위해 본산대패의 가면극을 그들의 공연 종목 가운데 하나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상업이 발달했던 곳에서 공연된 것들이 많 다. 야류 지역은 동래를 중심으로 한 대일 무역의 근거지였고, 오광대 지역은 낙동강과 남해를 이용한 교역로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대놀이 지역은 서울 외곽의 상업 중심지였다. 따라서 탈춤 지역은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의주로 가는 교통로에 자리하거나 서해안의 상업 지역에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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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별산대놀이
양주 별산대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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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산대놀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애오개 산대놀이의 전승지인 애오개는 서울 3대 시장의 하나인 칠패 시장과 인접하고 있으면서, 현방(懸房)이 있던 곳이다. 노량진에도 본산대놀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노량진은 경강(京江) 지역의 나루였다. 별산대놀이의 전승지인 양주·송파는 18세기경 금난전권(禁亂廛權)을 가진 서울의 시전 상인(市廛商人)에 대항하는 사상 도고(私商都賈)가 서울로 들어가는 물자를 장악하면서 상설 시장을 벌였던 곳이다. 양주에서는 일제강점기에도 난장을 텄을 때 낮에는 줄타기를, 밤에는 양주 별산대놀이를 공연했다.

특히 애오개(아현동)는 대한제국 때까지도 흥행을 위한 공연장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잡유희(閒雜遊戲)」 서강(西江) 한잡배(閒雜輩)가 아현(阿峴) 등지에서 무동(舞童) 연희장(演戲場)을 설(設)하였는데, 관광(觀光)하는 인(人)이 운집 (雲集)하였거늘 경무청(警務廳)에서 순검(巡檢)을 파송(派送)하야 금집(禁戢)한즉, 방관(傍觀)하든 병정(兵丁)이 파흥(破興)됨을 분통(憤痛)히 여기어 해순검(該巡檢)을 무수난타(無數亂打)하여 기지사경(幾至死境)한지라. 본청(本廳)에서 기한잡배(其閒雜輩) 기허명(幾許名)을 착치(捉致)하고, 해연희(該演戲) 제구(諸具)를 수입(收入)하여 소화(燒火)하였다더라.337)『황성신문』 1899년 4월 3일자.

이 『황성신문』 기사에 따르면, 애오개에서 서강의 한잡배가 무동 연희장을 배설했는데,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애오개에는 현방이 있었고, 바로 인접한 곳에 칠패 시장이 있었으므로, 본래 상업 지역으로서 사람이 많이 몰렸던 곳이다. 흥행을 위한 공연장으로 좋은 위치였던 이곳에 상인들은 영업을 위해 연희패를 불러다 공연시켰을 것이다. 박제가의 한시 「성시전도응령」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거리를 한가로이 지나가노라니 / 忽若閒行過康莊

홀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들리는 듯 / 如聞嘖嘖相汝爾

사고팔기 끝나 연희 펼치기를 청하니 / 賣買旣訖請設戲

배우들의 복색이 놀랍고도 괴이하네 / 伶優之服駭且詭

우리나라 솟대타기 천하에 으뜸이라 / 東國撞竿天下無

줄 위를 걷고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것이 거미 같네 / 步繩倒空縋如蟢

또다시 인형을 가지고 등장하는 이 있으니 / 別有傀儡登場手

칙사가 동쪽으로 왔다 하며 손뼉 한 번 치네 / 勅使東來掌一抵

조그만 원숭이 참으로 아녀자를 놀래켜 / 小猴眞堪嚇婦孺

제 뜻을 채워 주면 예쁘게 절하고 무릎 꿇네338)박제가, 『정유집(貞蕤集)』, 시집(詩集) 권3, 「성시전도응령(城市全圖應令)」. / 受人意旨工拜跪.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박제가가 한양의 모습을 그린 성시전도라는 그림을 보고 왕명에 따라 지은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을 마치 자신이 지금 한양 시정에 나가 구경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장사가 끝난 후에 그곳에서 배우들이 놀랍고도 괴이한 복색을 하고 솟대타기, 줄타기, 인형극, 원숭이 재주 부리기 등의 연희를 펼치고 있는 점이다. “사고팔기 끝나 연희 펼치기를 청하니”라는 내용을 통해 짐작할 때, 연희패가 상인들의 상업 활동과 연계하여 흥행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박제가가 그림만 보고도 이와 같이 앞뒤 문맥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이러한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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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전도의 원숭이 재주 부리기
성시전도의 원숭이 재주 부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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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와 경상남도 쪽에서도 18세기 무렵 상업 도시가 나타났을 것이다. 황주·봉산·마산 등지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큰 향시(鄕市)가 열렸고, 물자의 대량 교역이 이루어졌다.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에서는 내륙의 농산물과 낙동강을 거쳐서 들어오는 해산물을 교역하는 난장이라는 이름의 시장이 일정 기간 동안 계속 열렸다.

이러한 상업 도시 가운데 지방 관아가 자리 잡은 곳에서는 상인이 이속(吏屬)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으며, 가면극의 후원자 노릇도 함께 하였다. 이 속들은 그들의 행사인 관아나례를 거행할 때 가면극을 초청하기도 하였다. 시장을 배경으로 전승되던 가면극의 후원은 상인들이 맡았다. 가면극을 공연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므로 상인들은 가면극을 후원하였다. 합천의 초계에서는 난장이 설 때면 상인들이 대광대패에게 돈을 주고 가면극을 공연하게 했다고 한다. 봉산 탈춤의 경우, 한창때는 2, 3만 명의 구경꾼이 모여들어서 대규모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농촌 마을의 농민들은 양반들의 묵인 아래 빈약한 경제력으로 소규모의 가면극을 공연하는 데 그쳤지만, 이속과 상인은 그들 자신이 도시에서 사실상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으므로 양반의 간섭에서 벗어나 가면극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경제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산대놀이와 해서 탈춤에서는 신 장수나 취발이와 같은 등장인물을 통해 상인들의 생활이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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