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를 내면서
심경호

이 책은 전쟁을 문화사의 범주에서 다루었다. 19세기 역사학에서는 전쟁을 ‘정치의 연장(Continuation of Policy)’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중엽의 신사학(New History)은 전쟁을 새로운 사회사(Social History)의 범주에서 다룰 것을 제안하였다. 전쟁의 사회사는 전쟁을 통해 신분 구조, 경제 구조 등의 사회적 주제들을 종합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전쟁과 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던 구조에 접근하는 방법론이다. 그러다가 20세기 말 새로운 문화사(New Cultural History)는 문화의 사회적 결정성을 강조하거나 문화와 물질 사이의 상호 작용의 관계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 책의 공동 저자들은 전쟁의 정치성만을 부각시킨다든가 전쟁의 사회 경제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전쟁을 문화의 한 양태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렇다고 공동 저자들이 모두 새로운 문화사의 관점을 따르지는 않았다. 다만 전쟁이 지닌 갖가지 문화적 양태와 사회적 의미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전쟁은 심리적 모순 관계가 표출된 복수의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폭력 행위다. 전쟁은 공격자와 방어자의 결투 의지가 충돌하여 이루어지며, 공격자와 방어자 이외에 많은 사람들이 그 직접적·간접적 영향을 받게 된 다. 전쟁은 그것에 관계된 인물과 집단의 상호 관계에 의해 진행되며, 그 과정에서 각종의 의식과 문자 행위가 발생하였다. 또한 전쟁은 발단과 종료에서부터 후대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의미 해석을 수반한다. 춘추시대에 의전(義戰)이란 없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전쟁의 의미가 인간 주체에 의하여 해석되어 왔음을 명료하게 드러내 준다.

따라서 이 책에서 공동 저자들은 전쟁의 기원에 대해 문화사적 가설을 소개하기도 하고, 전쟁의 시작에서부터 종료에 이르기까지의 의식들을 고찰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쟁을 해석하는 가치의 층위, 실제 전쟁에서 군사들이 겪었을 심리적 동요, 전쟁과 문자 행위의 다층적인 관계 등을 고찰함으로써 전쟁의 문화사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하였다.

제1장 ‘전쟁의 기원과 의식’에서는 역사민속학의 방법을 도입하여 전쟁의 기원에 대해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였다. 종래 국가 이전 원시 사회의 전쟁은 단지 유희적이고 의식적 성격이 강한, 소박한 분쟁에 불과하고 본격적인 전쟁은 중앙 집권적인 국가의 출현과 함께 발생했다고 보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고대 국가 이전의 원시 사회부터 본격적인 전쟁이 있었음을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밝히고 있다.

인류 사회에서 전쟁의 기원은 방어 시설물을 갖춘 농경 취락(聚落)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사시대의 방어 취락 유적을 살펴보면, 청동기시대 유적에 목책 내지 환호가 설치된 방어 취락의 존재가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여 송국리 유적이나 진주 대평리 옥방 유적은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전쟁은 청동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났으며 그 시기는 본격적으로 정착 농경을 시작할 무렵에 해당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전장에서 사용한 주요 무기는 석기시대부터 널리 사용해 오던 돌과 나무로 만들었다. 무기의 종류가 전쟁에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전쟁에서 살인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전쟁이 과격화되는 것은 전적으로 인 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선사시대 전쟁의 풍경은 민속자료를 통해 새롭게 복원해 볼 수도 있다. 즉, 돌을 무기로 쓰던 전쟁의 풍경을 1960년대까지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었던 석전(石戰)을 통해 묘사해 볼 수 있다. 석전에는 돌 이외에 곤봉도 사용되어, 심한 부상과 사망이 초래하기도 하였다.

선사시대의 실제 전쟁 형태였던 석전은 고대에 들어와서는 실전에 대비한 군중(軍中)의 유희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 「거도(居道) 열전」에 전하는 마숙(馬叔)도 군중 유희의 한 예다. 숙(叔)은 판각 과정에서 발생한 기(技)의 오자라고 보아야 한다. 마기(馬技)는 기마술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기, 마희 등은 고려에 들어와 희마(戲馬)로 계승되며, 조선시대에는 마상재(馬上才)라는 기마술로 발전하였다.

석전은 전쟁과 의식의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선사시대의 석전은 전쟁의 측면이 강하였으나, 고대의 석전은 실전에 이용되기도 하면서 군사들의 유희나 의식으로 전화되었다. 그것이 근세에 이르러 민간의 풍속으로 바뀌었다. 마치 고대 전쟁의 핵심 전술이었던 마기가 근세로 내려오면서 유희로 된 것과 유사하다.

의식과 전쟁은 음과 양처럼 서로 상반되면서도 서로 필수적인 공생이나 조화의 관계였다. 전쟁과 의식의 동반 관계는 선사시대 전쟁의 원시적 형태인 석전과 원시 신앙의 공간인 서낭 사이의 관계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의식과 전쟁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새로운 통치자인 왕이 탄생하게 된다. 왕은 의식을 통해 세워진 도덕적 권위와 전쟁을 통해 확립된 강제적 권력을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왕은 대칭적 관계에 있던 원시 사회의 제사장이나 군사 지도자의 권한을 하나로 병합한 ‘국가’ 단계의 최고 통치자라 할 수 있다.

제2장 ‘출정에서 회군까지’에서는 전쟁이 발발하여 적군과 전투를 위해 군대가 출동하는 절차와 의식, 전쟁터로 가는 일련의 노정, 전투를 할 때 싸우는 요령과 방법, 그리고 전쟁을 마친 후 회군 절차와 논공행상 등을 통 하여 전쟁 문화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측면들을 파악하려고 하였다.

고조선 이래 삼국시대까지는 중국과는 물론이고 삼국 사이에도 영토 확장을 위한 공방과 각축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 이후 전쟁의 양상은 주로 외침을 받는 형태로 바뀌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주변국의 침략을 받는 양상이 확연해지면서 저항적 민족주의가 성장하였다. 이렇게 전근대 사회에서의 전쟁 의식은 크게 발달해 왔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여 이에 대처하는 방식과 관행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즉, 고대로부터 전쟁이 발발하면 장수의 임명에서부터 출정, 둑제, 행군, 적과의 공방, 전쟁의 결과와 회군, 논공행상과 진혼 의식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출정식은 성대하고 신중하였으나, 전쟁에서의 의식과 절차는 갈수록 축소되어 가는 경향이 강했다. 고려시대에는 출정 의식과 회군 의식이 국가 의례의 오례 가운데 하나인 군례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군례에서는 그 의식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만큼 전쟁 의례가 간소화되고 비중이 약해졌음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의 군례에서는 국왕 중심의 군사 의식이 강조되었지만, 문치주의 사회에서 전쟁 의식이 갖는 중요성은 갈수록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출정식에 대신해서 둑제(纛祭)를 의례화하였다. 그리고 회군 의례가 폐지된 대신에 전쟁을 대비하고 평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는 전쟁 예방적인 의례가 주로 이루어졌다. 전쟁을 가급적 미연에 방지하고 전쟁보다는 외교로 갈등을 해결한다는 유교적인 국방관과 이념의 지향이 전쟁 의식을 국가 의례로 드러내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된다.

제3장 ‘전쟁의 흔적’은 1997년 4월 수지읍 풍덕천리 산 37번지와 구성면 보정리 산 82-2번지 일대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총통 2점을 중심으로 전쟁 당사자가 겪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용인 임진산 유적은 1998년 2월에 발굴 조사된 구성면 마북리 산 23-2번지의 마북리 석축 유구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의 관방 유적으로 생각된다. 마북리 석축 유구는 현재 남아 있는 상태로 볼 때 완성된 석축의 상부를 가정하더라도 높이는 1m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내부에 관련 시설이 확인되지 않고, 구릉의 남측 사면에만 낮게 축조되어 있다는 점과 청동제 총통편(銃筒片)이 발견된 점을 근거로 추정해 보면, 이 유구는 동서로 나있는 구릉을 이용하여 구축된 일종의 군사 시설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의 상태와 석재의 가공 정도로 보아 단기간의 전투 목적을 위한 일시적인 축조 시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석축 유구는 이곳으로부터 서북쪽지점에 위치한 임진산성과 함께 왜군의 침략에 맞서 긴급 구축된 관방 유적으로 추정된다.

용인 임진산에서 발굴된 총통은 사용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 이곳에서는 창, 칼, 화살촉 등 각종 병기도 파묻힌 상태에서 출토되었다. 이것들은 임진왜란 당시 광교산 전투에서 남겨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아군이 전열을 다시 정비할 시간도 갖지 못하고 급습을 당하여 모든 장비를 그대로 둔 채 퇴각하였던 듯하다. 그 패전의 양상은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懲毖錄)』에 나오는 광교산 전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곧, 임진왜란 개전 후 초기 2개월 동안 아군이 두려움 때문에 패전한 상황을 생생하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에서는 국가 제례에 나타난 전쟁의 흔적을 통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조선 후기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억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국가 사전(祀典)에서는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 준 초월적 힘의 담지자인 신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사람들, 전쟁으로 인해 죽은 원혼들을 제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한양 남대문 밖이나 지방의 성주, 안동, 남원, 고금도에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처음에 한양의 관왕묘는 명나라와의 외교적 관계 속에서 중시되었으나, 남대문과 동대문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공간적 특성으로 말미암 아 먼 길을 떠나는 여행자들의 안녕을 비는 장소로 변모하였다. 곧, 한양의 두 길목을 지키는 관우는 노신(路神)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전쟁과 군대에 관한 제사는 오직 둑제뿐이었다. 그런데 숙종과 이후의 국왕들은 관왕묘를 통해 충절 의식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로써 관왕묘는 무성묘(武成廟)의 기능을 겸하였다. 이미 세조 때 양성지는 당나라 때 강태공을 높여 무성왕을 삼고 사당을 건립하여 역대 훌륭한 장군 64명을 배향한 고사를 인용하면서 무성묘를 세워 김유신 이하 우리나라의 명장들을 배향할 것을 건의한 바 있다. 또한, 선조 때는 관왕묘를 건립하면서 그것이 무성묘를 대신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이렇게 관왕묘는 차츰 조선시대 전례에 소홀하였던 무성묘의 기능을 대신 수행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뒤, 1704년(숙종 30) 정월에 숙종은 백성들에게 지난 전쟁의 경험과 선조(先祖)가 지키려 했던 의리를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하여 명나라 신종 황제를 위한 사당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이때 영의정 이여는 청으로부터의 혐의를 벗어나고 종묘와 차별화하고자 사당을 세우지 말고 제단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12월 21일에 마침내 대보단이 준공되었다. 대보단 제향은 명나라가 패망한 달인 3월에 거행하였다. 1749년(영조 25) 명나라 태조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대보단에 모심으로써, 대보단은 단순히 임진왜란의 원병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명나라의 계승자라는 의식을 고양시키는 곳으로 바뀌어 갔다. 또한 명나라 유민의 후손과 전쟁 관련 충신 자손들을 제향에 참가시켜 대보단을 충절의 이데올로기를 심는 장으로 만들었다.

조선 후기에 있어 전쟁의 기억은 국왕의 왕권 강화 노력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숙종대 관왕묘의 건립이나 대보단의 건립은 군사권의 확립과 충의의 포장과 선전을 통해 왕권을 확립하려고 했던 국왕들의 노력으로 더 강화되었다.

전쟁터에서의 죽음이 충절과 의리를 매개로 기억되는 것이 일반적이지 만 또 한편으로 제명에 죽지 못한 원혼으로 되살아나서 여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 원혼들은 조선 후기 현종, 숙종 때에 잇따라 발생하였던 전염병과 기근에 의해서 비정기적이지만 지속적으로 기억되었다. 전몰처는 과거의 비극과 고통을 담고 있는 상징적 공간으로 현재의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해주는 가교적 기능을 하였다.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에서는 전쟁이 문학을 통해서 재해석되고 기억되며, 상징화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문학은 전쟁에 이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을 반영하면서 전쟁과 깊이 관여하여 왔다. 평화 시대의 문학은 규범에 따라 지식 계층의 재능과 파한(破閑)을 자랑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지만, 전후의 문학은 체험자의 생체험을 담게 된다. 또한 전쟁에 대한 재해석은 지식인의 지적 행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집합적인 기억과 경험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그 재해석은 정치(精緻)한 지식과 문학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집합적인 구비 전승(口碑傳承)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다시 사회적 기념 행위로 재수정된다.

전근대시기의 문학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자국의 군사와 지사에게 독전(督戰)을 하기도 하고 적국의 군사에게 도발을 해서 평정을 잃게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독전의 문학은 전쟁에 임하는 인간의 의지를 촉구하며, 적개심의 표출을 중심 목표로 삼았다. 선전(宣戰)의 문학은 자국 군사의 기개를 떨쳐 적국의 기세를 꺾으려는 의지를 담았다. 한편, 전투의 결과가 불리할 때 지식층이나 민중은 지휘부 및 조정의 무능을 문자 언어로 표현하였다.

전쟁에 대한 실기류(實記類)의 기록은 전쟁의 참화와 경과를 객관적으로 세밀하게 보고한다. 또한 시가 문학도 독특한 서정성을 통해 전쟁의 상흔을 더듬는다. 전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전쟁의 사실과 개인의 기구한 운명은 설화와 소설로 변용되어, 어떤 식으로든 상흔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더 나아가 전쟁은 이체험(異體驗)의 계기로 기록되고 새로운 각도에서 의미가 해석되기도 하였다.

전쟁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서 반성의 기제로 작용하고 지식층과 민중에게 공통된 상징으로 변용된다. 때로는 기념물을 건립함으로써 상징화하기도 하였는데, 기념물을 세울 때는 그것을 꾸미기 위해 문학이 이용되었다. 기념물은 사라진 기억을 직접 볼 수 있는 형태로 정형화하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을 재현하는 데 효과적이다. 전근대시기에도 기념비는 집단의 가치와 정체성을 제창하기 위해 자주 건립되었다. 한문 문체의 비문(碑文)은 그러한 목표에 봉사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전근대시기의 문학 작품들은 전쟁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전쟁은 지루하며 애써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소리 높여 말하지 못하였다. 또한 전쟁으로 잃어버린 고향, 잃어버린 관계, 신뢰할 수 없는 땅을 인간과 인간이 신뢰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터전으로 바꾸는 데 적극적이지 못하였다. 다만 전근대시기의 문학은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강화하고 영웅주의 사관을 형성함으로써, 전쟁의 위협에 늘 직면하였던 우리 민족에게 심리적 안정과 광범한 결속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점에서 그 가치는 매우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공동 저자들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다양하며, 중심 주제로 삼은 전쟁의 문화사적 측면도 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서술에 관통되어 있는 사고방식은 우리의 역사를 문화라는 주제를 통하여 그 지속의 국면과 변화의 국면을 동시에 파악하려고 하였다.

2006년 7월

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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