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1장 전쟁의 기원과 의식
  • 2. 전쟁의 기원-마을의 출현
박대재

문명(국가) 이전의 원시 사회가 전쟁 없는 평화로운 시대였는지 아니면 선사시대의 시작부터 인류가 전쟁에 종사하여 왔는지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인류학에서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12)K. F. Otterbein, A History of Research on Warfare in Anthropology, American Anthropologist vol.101, 1999. pp.794∼805 참조. ‘평화로운 선사시대(pacified past, peaceful savage)’를 주장하는 고전적 입장에서는 설사 부족(tribe)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의식적(ritualistic)이고 게임 같은(game-like) 소박한 결투였다고 파악하고 있다.13)E. Chapple and C. S. Coon, Principles of Anthro-pology, New York: Henry Holt, 1942. pp.628∼635. 그러나 원시 전쟁의 성격을 의식적(儀式的)인 전쟁(ritual war)으로 제한해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14)L. H. Keeley, War Before Civilization: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96. pp.32∼39. 의식이 원시 전쟁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은 인정되지만, 의식과 전쟁이 깊이 관련되는 것은 단지 원시 사회만이 아니라 문명 사회에서도 확인되는 제일적(齊一的)인 현상이다.15)박대재, 『의식과 전쟁-고대 국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책세상, 2003, 54∼61쪽 참조.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어느 특정한 과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에서도 계속 진행 중이다. 역사상으로 전쟁의 시제(時制)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원시 시대부터 시작된 전쟁은 문명이 고도로 발달했다고 하는 현대에서도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은 왜 전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인간의 본능적 공격성 때문이냐 아니면 주위의 환경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냐를 두고 그동 안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16)전쟁의 기원 문제에 대한 학설사 검토는 아더 훼릴, 이춘근 옮김, 『전쟁의 기원』, 인간 사랑, 1990을 참조. 전쟁은 인간의 본능인가 아니면 생존을 위한 발명품인가? 이 문제는 전쟁을 공격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방어자의 입장에서 볼 것인가라는 관점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의 본능을 강조하는 연구자들은 대체로 침략을 유발하는 공격자의 입장에서 생물학적으로 접근한다. 반면 전쟁을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전쟁을 동물 세계와 달리 인간 사회만의 특성이라 보고 침략에 대한 자기 방어의 측면을 설명하고자 한다.

전쟁이 일방적인 침략 행위와 다른 것은 공격자와 방어자의 결투 의지가 충돌한다는 데에 있다. 방어자의 항전 의지가 없다면 약탈만 나타날 뿐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는다. 따라서 선사시대 초기부터 있었던 약탈(plunder) 행위와 거기에 맞서면서 규모가 확대된 전쟁(war)은 분명히 구분해 보아야 한다. 전쟁은 공격자와 방어자의 심리적 모순 관계가 표출된 집단 사이의 폭력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1952∼1958년 요르단의 예리코(Jericho) 지역에서 기원전 7000년경의 성벽(城壁) 유적이 발견되면서,17)J. Mellaert, Early Urban Communities in the Near East, 9000-3400 BC, The Origins of Civilisation, (ed.) P. Moorey, Oxford, 1979. pp.22∼25. 인류사에서 전쟁은 ‘정착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 기원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18)존 키건, 유병진 옮김, 『세계 전쟁사』, 까치, 1996, 186∼190쪽 ; 정병선 옮김, 『전쟁과 우리가 사는 세상』, 지호, 2004, 69∼70쪽 ; P. Brewer, Warfare in the Ancient World: History of Warfare, Austin: Raintree Steck-Vaughn Publishers, 1999. pp.5.

온대 지방의 물을 구할 수 있었던 곳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된 농경공동체는 기존의 수렵 사회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육식을 즐기던 사냥꾼들에게 농경민들이 저장한 곡식은 처음에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민들이 기르던 가축은 사냥꾼들에게 빼앗기 손쉬운 식량으로 보였을 것이다. 또한, 농경을 통해 얻어진 잉여 생산물을 저장하고 그에 따라 식량을 장기적으로 비축할 수 있게 되면서, 그것을 노린 외부 집단의 침략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초기 농경 사회의 인간 집단이 정해진 영역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취락을 중심으로 공간적 정체성이 나타나게 된다. 농경 생활은 정착성을 강화하고 이전 단계와는 다른 의미가 부여된 공간의 구획을 시도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이 런 맥락에서 전쟁의 기원은 목책(木柵), 환호(環濠·環壕) 등 방어 시설이 갖추어진 ‘농경 취락’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파악된다.19)佐原眞, 「初め戰爭はなかった: 考古學からみた戰爭の歷史」, 『戰爭と平和と考古學』, 反核考古學硏究者の會, 1988 ; 都出比呂志, 『日本農耕社會の成立過程』, 東京: 岩波書店, 1989 ; 松木武彦, 「‘戰い’から‘戰爭’へ」, 『古代國家はこうして生まれた』(都出比呂志 編), 東京: 角川書店, 1998, p.164 ; 존 키건, 앞의 책, 69∼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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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의 방어 시설물
로마 시대의 방어 시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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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국내에서도 취락을 방어하기 위한 목책, 환호 등 방어 시설을 갖춘 ‘마을’ 유적이 울산 검단리, 부여 송국리 등 청동기시대 유적을 중심으로 확인되면서, 정착 농경과 방어 취락의 밀접한 상관 관계가 주목된 바 있었다.20)최종규, 「동양의 방어 집락」, 『송국리 Ⅴ-목책(1)-』, 국립 공주 박물관, 1993 ; 김재홍, 「농경 사회의 형성과 고대의 촌락」, 『역사비평』 28, 1995. 중국 동북 지방의 경우 신석기시대의 농경 사회 단계에 이르면 수십 동의 주거지가 둥근 도랑으로 둘러싸인, 방어적 성격의 환호 취락이 등장한다.21)岡村秀典, 「先史時代中國東北地方の集落と墓地」, 『동북아 문화의 원류와 전개』, 제11회 마한·백제 문화 국제 학술 회의 자료집, 1992. 63∼64쪽. 최근 국내에서도 신석기시대 후기의 진주 상평리 유적에서 환호 유적이 발굴되면서,22)동아대학교 박물관, 「진주 상촌리 유적」, 『발굴 유적과 유물』, 2003, 14∼23쪽. 방어적 성격의 환호 취락이 청동기시대 이전에 이미 출현하였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환호는 경계를 구분 짓는 시설로서 도랑을 파서 공간을 분할하는 시설을 말한다. 용어만으로 보자면 환호는 ‘물이 담긴 고리 모양의 도랑’을 뜻하지만, 물을 채웠던 뚜렷한 흔적이 발견되는 예는 아직 확인되지 않아 호(濠) 대신 호(壕) 자를 쓰기도 한다. 추측컨대 환호는 고대 로마의 ‘마른 도랑(dry ditch)’에 해당하는 방어 시설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목책은 나무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열 지어 땅에 박아 설치하고 그 사이사이에 방어물을 쌓아 넣은 시설로 규모가 성(城)과 같은 경우에는 성책(城柵)이라 부르기도 한다. 목책의 방어적 성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겠으나, 환호의 성격에 대해서는 현재 학계에 서로 약간 다른 시각들이 제기되어 있다.

기존에는 환호를 목책과 같이 기본적으로 방어적 성격이 짙은 시설로 보았으나,23)민덕식, 「삼국시대 이전의 성곽에 관한 시고」, 『한국상고사학보』 16, 1994 ; 최종규, 「한국 원시의 방어 집락의 출현과 전망」, 『한국고대사논총』 8, 1996. 최근에는 방어적 기능보다 의례(儀禮)와 관련하여 설치하였을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24)이상길, 『청동기시대 의례에 관한 고고학적 연구』, 대구효성가톨릭대 박사학위논문, 2000, 26∼29쪽 ; 정의도, 「남강 유역의 환호 유적」, 『진주 남강 유적과 고대 일본』,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 편, 신서원, 2002, 128∼130쪽. 환호는 특정 구역의 둘레를 구획하기 위해 둥글게 파 놓은 도랑 시설인데, 현재까지 조사된 대부분의 환호 유적은 다른 방어 시설과 결합되지 않으면 효과적인 방어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규모이기 때문에, 환호 자체만의 내구성과 효율성으로 평가했을 때 상설적(常設的)이고 지속적인 방어 시설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25)이성주, 「한국의 환호 취락」, 『환호 취락과 농경 사회의 형성』, 영남 고고학회·구주 고고학회 제3회 합동 고고학 대회 자료집, 1998. 그런데 환호가 이중 삼중으로 설치된 유적이나 환호가 흙을 덧쌓아 놓은 토루(土壘) 시설이나 목책과 결합된 마을 유적이 다수 존재하는 것을 미루어 보면, 환호 자체에도 방어적 기능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환호는 애초에 방어적 기능이 미약하게 있었으나, 목책과 같은 다른 방어 시설물과 결합하면서 더욱 효력을 발휘하는 보조 방어 시설로 발전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고대 중국에서는 환호를 ‘황(隍)’이라 하여 성과 환호로 조합된 방어 시설을 ‘성황(城隍)’이라 불렀다. 그런데 중국의 성황은 이후 마을의 방어를 빌기 위한 의례 공간으로 변하면서 이로부터 성황 신앙이 발전하게 된다. 중국 성황의 예와 같이 우리의 환호 역시 원래의 방어적 기능에서 파생된 공공 방어의 의례적 기능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환호의 의례적 기능에 대해서는 전쟁과 의식의 상호 관계를 고찰할 뒷부분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조사된 방어 시설을 갖춘 마을 유적을 살펴보면, 신석기시대 후기의 진주 상평리 유적에서 시작하여 부여 송국리, 울산 검단리, 울산 방기리, 대구 팔달동, 경주 석장동, 창원 남산, 창원 덕천리, 창원 상남동, 진주 대평리 옥방, 산청 사월리, 합천 영창리, 인천 문학동, 부천 고강동, 강릉 방동리 등지의 청동기시대 유적을 거쳐, 양산 다방리 패총, 양산 평산리, 경산 임당, 김해 봉황대, 김해 대성동, 창원 가음정동 등지의 삼국시대 초기 유적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랜 기간 지속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진서(晉書)』 「동이전」에 마한에 성곽(城郭)이 없다고 하면서도 성황은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혹시 환호가 3세기 말까지 마한의 주요한 방어 시설로 쓰였다는 것을 전하는 기록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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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검단리 마을 유적 전경
울산 검단리 마을 유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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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의 발굴 조사 통계로 보면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환호의 존재가 확인되지만, 방어 기능이 뚜렷한 토루나 목책 시설이 환호와 결합하는 본격적인 방어 기능의 마을 유적은 특히 ‘청동기시대’부터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 준다.

국내에서 방어 취락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에 울산 검단리 마을 유적에서 환호가 전면 발굴 조사되면서부터이다. 울산 검단리 유적의 환호는 안쪽에 토루가 결합된 형태인데, 규모는 장경(長徑) 118m, 단경(短徑) 70m의 타원형으로 총길이 298m, 내부 면적 약 5,974㎡이며, 도랑 깊이는 20∼110㎝이고, 가장 넓은 곳의 폭이 2m 정도이다. 출입구는 남북에 각 1개소씩 설치하였는데, 이 부분은 도랑을 파지 않고 원래의 지면을 그대로 남겨 두어 안팎을 다리처럼 연결하는 육교로 만들었다. 출입구의 폭은 남쪽 출입구가 300㎝, 북쪽 출입구가 275㎝이다. 출입구 쪽의 도랑이 비교적 깊게 남아 있는데, 그것은 출입구 쪽의 방어를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입구 부분을 더 깊게 팠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26)부산대학교 박물관, 『울산 검단리 마을 유적』, 1995, 211∼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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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송국리 유적의 방어 시설
부여 송국리 유적의 방어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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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목책이 설치된 청동기시대의 방어 취락으로는 부여 송국리 유적이 가장 대표적이다.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총 430여m의 목책 시설이 조사되었는데, 목책 열의 진행 방향이나 현지의 지형 여건을 고려하면 목책으로 둘러싸인 취락의 규모를 대략 추정해 볼 수 있다. 송국리 유적의 목책 시설은 커다란 하나의 골짜기를 감싸 안은 형태로 총둘레 길이는 약 2.5㎞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목책으로 둘러싸인 취락 내부의 총면적은 약 61ha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 결과 송국리 유적의 목책은 이후에 도랑 모양의 시설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목책의 기능이 상실된 이후 환호로 구획된 소규모 취락들이 다시 형성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울러 송국리 유적에서는 출입구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목책 외곽에 끝이 뾰족한 말뚝들을 여러 개 박아 놓은 녹자(鹿呰) 시설을 설치한 흔적도 확인되었다.27)김길식, 『송국리 Ⅴ-목책(1)』, 국립 공주 박물관, 1993, 82∼87쪽. 이러한 녹자의 흔적은 앞의 삽화에 보이는 로마 시대의 말뚝 장애물을 연상시키는 방어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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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대평리 옥방 유적 7지구의 환호
진주 대평리 옥방 유적 7지구의 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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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취락 유적 가운데는 방어의 효율성을 더욱 높이기 위하여 환호와 목책을 결합하여 이중으로 설치한 경우도 있는데, 진주 대평리 옥방 유적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옥방 유적 7지구에서는 이중의 환호와 목책이 발견되었는데, 환호의 길이는 75m, 폭 170∼200㎝, 깊이 170㎝, 환호 사이의 간격은 250∼350㎝ 정도이고, 목책 열은 환호와 나란하게 약 1.5m 간격으로 12m 정도가 확인되었다. 2개의 환호와 목책 시설을 묶어서 보면 삼중의 방어 시설이 마을 주위에 설치되었던 것이다.28)정의도, 앞의 글, 103∼108쪽.

진주 옥방 유적처럼 환호와 목책을 이중으로 설치하여 방어의 기능을 한층 높인 경우는 삼국시대 초기의 양산 평산리 유적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평산리 유적은 전쟁 당시의 화재로 인해 마을이 한꺼번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마을은 해발 150m 능선의 평평한 정상부에 24동의 주거지가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환호와 목책 시설이 해발 145m의 등고선을 따라가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환호는 현재 총 120m 정도가 남아 있으며 폭은 1∼3m로 불규칙하고 깊이는 50㎝ 미만이다. 환호 안쪽에는 20∼30㎝ 간격으로 목책 열이 확인되었고, 환호 바깥에서는 흙을 덧쌓아 만든 토루 시설이 발견되었다. 특히, 평산리 유적에서는 환호-목책 시설의 출입구 안쪽에서 3×6칸 규모의 나무 기둥을 세워 만든 건물 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기둥 구멍의 규모와 분포로 보아 외부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 시설인 것으로 추정된다.29)심봉근, 『양산 평산리 유적』, 동아대학교 박물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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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평산리 유적의 방어 시설
양산 평산리 유적의 방어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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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유적들을 통해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초기를 거치면서 마을의 방어 기능이 강화되어 가는 추이를 살펴보았다. 세계의 4대 문명들과 달리 우리의 경우 환호, 목책 등 방어 시설을 갖춘 마을의 출현이 청동기시대부터 집중적으로 확인된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전쟁은 청동기시대부터 기원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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