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1장 전쟁의 기원과 의식
  • 3. 원시 전쟁의 풍경-석전
박대재

우리 역사에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청동기시대부터였다는 점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청동기시대라 하여 청동 무기를 들고 전쟁을 하는 풍경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고대의 전쟁이 금속 무기의 발전에 따라 점차 확대 발전해 갔다는 사실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30)송계현, 「전쟁의 유형과 사회의 변화」, 『고대의 전쟁과 무기』, 제5회 부산 복천 박물관 학술 발표 대회 자료집, 2001.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 가운데에는 검과 도끼 같은 무기류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국내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금속 유물은 제사장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거울, 방울 등 각종 의식용 도구가 주류를 이루며,31)이건무, 「한국 청동 의기의 연구」, 『한국 고고학보』 28, 1992. 청동제 무기의 대표격인 동검(銅劍)조차도 실전 무기보다는 수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장(儀仗)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32)吉田廣, 「銅劍生産の展開」, 『史林』 76-6, 1993. 동검이 가지던 의장 기능은 철기시대 및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철부(鉞)나 환두대도(環頭大刀) 등으로 이어진다(조원창, 「삼국시대 월에 대한 인식」, 『백제문화』 29, 2000 ; 이한상, 「삼국시대 환두대도의 제작과 소유 방식」, 『한국고대사연구』 36, 2004 참조).

이처럼 극소수 제사장이나 수장들의 무덤에서 나오는 소량의 청동기를 청동기시대 무기의 골자(骨子)라고 보기는 어렵다. 인류학 조사에 의하면 고대의 야금술을 익힌 문명 사회라 할지라도 ‘철기’가 보편화되기 이전까지는 ‘석기’를 일반 군사들의 주요 무기로 사용하였다고 한다.33)존 키건, 앞의 책, 143∼173쪽. 청동기시대라 할지라도 실제 전쟁터에서 사용한 주요 무기는 청동기가 아니라, 석기 시대부터 널리 사용해 오던 돌과 나무로 만들었던 것이다. 즉, 죽은 자의 무덤에서 간혹 발견되는 청동제 검이 아니라, 산 자의 공간인 집터나 그를 둘러싼 환호, 목책 등 방어 시설 유적 주변에서 자주 발견되는 흔한 돌들이 바로 청동기시대 전쟁의 가장 일차적인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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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정도를 결정하는 요인은 돌이냐 금속이냐 하는 무기의 재료가 아니라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의 의지이다. 날카로운 금속 무기가 아니더라도 살의가 있다면 나무창이나 돌도끼로도 살인은 충분히 가능하다. 무기의 종류가 전쟁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이 과격화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전쟁을 어느 한 쪽이 다 죽어야 끝나는 몰살 전쟁으로 몰고 갈 것인가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중지하고 공존할 길을 도모할 것인가 하는 선택은 무기의 소재가 아니라 그것을 들고 있는 전쟁 당사자들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특히, 원시 전쟁의 목적이 적을 죽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포로로 생포하여 제사의 희생으로 바치거나 식량 생산을 위한 노예로 활용하는 데 있었다는 사실은,34)P. Brewer, 앞의 책, 6쪽. 돌로 만든 무기의 실효성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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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사용했던 원시 전쟁의 풍경은 철제 무기를 사용했던 고대의 전쟁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무기로서의 돌은 역사 기록뿐만 아니라 고고학 조사 보고서에서조차 금속 무기에 밀려 그 존재 가치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실물 자료를 통해 원시 전쟁의 풍경을 복원해 보기란 사실상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형의 문화를 통해 간접적이나마 원시 전쟁의 풍경을 다른 각도에서 묘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돌을 주요 무기로 사용했던 원시 전쟁의 풍경은 근대까지도 우리 사회에 전해지던 석전(石戰) 풍속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석전은 두 무리로 나뉘어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우는 패싸움의 한 가지다. 양쪽으로 편을 나누어 싸운다고 하여 편전(便戰), 변전(邊戰)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순우리말로는 편싸움 또는 편쌈이라고 한다. 석전의 풍습은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한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도 발견되는 보편적인 문화였다.35)伊能嘉矩, 「石戰風習に就きて思ひ出づるまにく」, 『人類學雜誌』 32∼3, 1917. 석전은 원시의 투석(投石) 전법이 고대에 들어가면서 실전 연습을 위한 연중행사로 변하고,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군사 훈련뿐만 아니라 일반의 민속으로까지 확산된 원시 전쟁의 유풍이라고 할 수 있다.36)八木奘三郞, 「朝鮮の石戰風習」, 『人類學雜誌』 32∼1, 1917 ; 孫晉泰, 「石戰考」, 『民俗學』 5∼8, 1933 ; 『손진태 선생 전집』 2, 태학사, 1981, 155∼171쪽.

석전은 주로 개천이나 강을 경계로 하여 두 편의 마을 사람들이 돌멩이를 마주 던지며 싸우다가 백병전을 벌이는 편싸움으로 발전한다. 석전은 민속놀이 중 가장 전투적인 놀이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각지 풍속조에서 확인되듯이 석전은 안동, 김해, 경주 등지에서 널리 행해지던 전국적인 풍속이었다. 그렇지만 평양 지방의 석전이야말로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하여, 영조는 석전의 위험성을 논하면서 평양의 석전을 예로 들었고, 최남선도 『조선 상식』 풍속편에서 평양을 ‘석전향(石戰鄕)’으로 손꼽을 정도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자 미상의 평양도(平壤圖)에도 평양의 석전이 묘사되어 전해지는데, 그림 속에는 두 패로 나뉜 참가자들과 산등성이를 따라 둘러선 구경꾼들이 그려져 있다. 돌이 공중을 날아다니지 않고 두 패거리들이 막대기를 들고 싸우고 있는 풍경으로 보아 후반부인 백병전 상태에 돌입한 듯하다.37)허인욱, 『옛 그림에서 만난 우리 무예 풍속사』, 푸른역사, 2005, 204∼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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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도의 석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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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석전은 한말 외국인의 기록에서도 주목되었다.

사람들이 싸우기와 돌팔매질을 좋아하기 때문에 평양은 위험한 곳이라 알고 있었지만 적대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매년 일정한 시기에 관청의 허가를 받고 약 3일 동안 읍내와 시골 사람들 사이에 석전(stone-fighting)이 벌어진다. 만약 사람이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피한 사고로 여기고 관청은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한번은 나의 통역자인 김씨가 머리에 돌을 맞아 두 달 동안 몸져누워 있어야 했는데, 그의 두개골에는 아직도 크게 움푹 패인 자국이 남아 있다.38)W. R. Carles, Life in Corea, London: Macmillan Co., 1888 ; 신복룡 옮김, 『조선 풍물지』, 집문당, 1999, 129쪽.

이처럼 석전은 싸움이 진행되면서 자주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19세기 말∼20세기 초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의 눈에는 이상한 문화로 비춰져 여러 책에 기록되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기록 몇 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싸움에 참여하는 숫자는 마을의 크기에 비례하는데, 한 마을에서 대략 800∼1,000명이 참여한 돌싸움(석전)이 내가 보았던 가장 큰 규모였다. 그러나 부락의 인구가 10여 명을 넘지 않는 곳에서도 이 돌싸움은 일어난다. 소년들이 오후 일찍 싸움을 시작하며 저녁 무렵까지 산만한 싸움이 지속된다. 그리고 나서 어른들이 도착하여 여기에 참가하면 전쟁은 격렬해진다. 해가 지면 싸움이 끝난다. 참가자들의 무기는 손이나 밀짚 줄로 만든 줄로 던지는 돌과 곤봉이다. 곤봉은 짧고 딱딱하고 이따금씩 그랬듯이 이를 휘둘러 상대방을 즉사시킬 수도 있다.39)G. W. Gilmore, Korea from its Capital: with a Chapter on Mission,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and Sabbath-School Work, 1892 ; 신복룡 옮김, 『서울 풍물지』, 집문당, 1999, 132쪽.

그들의 가장 이상한 오락의 한 형태는, 만일 그것을 참으로 오락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석전이다. 매년 봄에 돌을 가지고 싸워도 무방하다고 하여, 남자들은(소년까지도) 돌이 많이 있는 야외로 나가, 편을 짜서-보통은 읍내 대 시골-정식의 돌 던지기 싸움을 한다. 매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자가 무수하다. 나는 이 괴상한 행사의 기원을 발견할 수 없다.40)H. S. Sanderson, “Notes on Corea and its people”, Journal of Anthropological Institute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vol.24, 1895. pp. 314.

어른들끼리 행하는 이 싸움은 매우 격렬한데, 이에 관하여는 간단히 설명할 가치가 있다. 이른 봄이면 적수가 되는 두 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얼어붙은 평야에 모여서 힘을 겨루는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새끼로 헬멧을 만들어 쓰고 몽둥이로 무장한 선두가 서로 중립선을 넘어서 상대편 쪽으로 돌진한다. 그러면 이 선두를 보호하는 후방 세력이 산등성이를 달려 내려오면서 상대편을 향해 돌을 던진다. 이 석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돌을 던지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돌을 던지는 데 매우 익숙하다. 이때 어느 한 쪽이 상대편보다 우세하여 상대편이 달아나게 되면 천지가 진동하는 요란한 싸움이 벌어지며 근처 산등성이에 있는 수천 명의 구경꾼들은 승리하여 밀고 들어오는 쪽에서 던지는 빗발 같은 돌멩이의 세례 속에서 도망가며 공포에 싸인다. 이런 풍경의 석전다운 석전에서는 흔히 두세 명의 사망자와 많은 중상자가 나게 마련이다. 내가 조선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이런 석전을 한 한 사람이 나의 병원에 찾아온 일이 있었는데 앞머리 양쪽 뼈 밑이 깨져서 그 속에 뇌가 들여다보였다. 석전을 하는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싸움을 목격한 군인들은 이런 운동에서 사력을 다하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군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41)H. N. Allen, Things Korean: A Collection of Sketches and Anecdotes, Missionary and Diplomatic, New York: Fleming H. Revell Co., 1908 ; 신복룡 옮김, 『조선 견문기』, 집문당, 1999, 119쪽.

이 기록을 통해 석전에서 돌 이외에 곤봉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곤봉은 주로 상대편의 머리통을 때리는 데 썼으며 그로 말미암아 심하게 다치거나 죽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고 하니, 실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살벌한 풍경이다.

이러한 석전의 기원에 대해 한말의 외국인 교육가 헐버트는 고려 말 우왕의 석전희(石戰戲)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42)H. B. Hulbert, The Passing of Korea, London: William Heinemann Co. 1906 ; 신복룡 옮김, 『대한제국 멸망사』, 집문당, 1999, 328쪽. 그러나 석전에 대한 기록은 우리의 삼국시대를 기록한 『수서(隋書)』 「고구려전」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해마다 연초에는 패수(浿水) 가에 모여 놀이를 하는데, 왕은 가마를 타고 나가 우의(羽儀)를 벌여 놓고 이것을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이 의복을 물에 던지는데, 좌우로 두 편을 나누어 수석(水石)을 서로 뿌리거나 던지고, 소리치며 달리고 쫓기기를 두세 차례 되풀이한 다음 그친다.43)『수서』 권81, 열전46 고구려.

이 기록을 통해 석전의 풍속은 이미 고구려 때 왕이 직접 참가하는 국중 대회(國中大會)의 일환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전반부의 놀이 행사와 후반부의 석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행사의 전반부를 그 해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농경 의례로 파악하고, 그 연속선상에서 후반부의 석전도 그 해의 풍흉을 예측하기 위한 주술적 행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44)김창석, 「석전의 기원과 그 성격 변화」, 『국사관논총』 101, 2003, 149쪽. 석전의 기원을 돌의 주력을 빌어 그 해의 운수를 점치고 재액과 병역을 물리치기 위한 종교적·주술적 의례에서 찾는 견해인 것이다.45)相田洋, 「東アジアの石合戰について」, 『異人と市: 境界の中國古代史』, 東京: 硏文出版, 1997.

그러나 『수서』의 기록을 석전의 기원을 전해 주는 사료로 보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를 듯하다. 6∼7세기 무렵 행해진 고구려의 석전은 국왕이 참가하는 국중 대회로써 이미 상당히 의식화가 진행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을 석전의 원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앞서 한말 외국인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석전은 사상자까지 발생시키는 거친 싸움으로 실제 전쟁을 방불케 한다. 이런 살벌한 싸움이 단지 1년 운세를 위한 종교적·주술적 목적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은 석전의 기능을 의례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석전은 의례적인 기능 외에 실제 전투를 위한 군사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태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후에 석전을 관람하고 이것은 놀이가 아니라 무예라고 평가했다고 하는데,46)『세종실록』 권12, 세종 3년 5월 을축. 이는 석전의 군사적인 측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음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실제 전투에서 석전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석전을 좋아하여, 매년 4월 8일부터 아이들이 성 남쪽에 모여 석전을 연습하다가 단옷날이 되면 장정들이 다 모여 좌우로 패를 나누고 깃발을 들고 북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고 달리면서 돌을 비가 쏟아지듯 던져서 승부가 결판난 다음이라야 그만두었다. 비록 죽거나 다치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며 수령도 막을 수 없었다. 경오년(1510)에 왜(倭)를 정벌할 때 돌을 잘 던지는 자들을 선봉으로 삼았더니 적군이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47)『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김해부 풍속.

이처럼 실제 전투에서 돌 던지는 전문 병사들을 배치한 사실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 각각 보이는 석투당(石投幢), 석투군(石投軍), 척석군(擲石軍) 등 석전 전문 군대의 존재를 통해 증명된다. 이런 석전의 실전적 측면을 주목해 보면, 애초에 석전은 군사적 목적에서 기원했던 것으로 추정된다.48)손진태, 앞의 글, 132쪽 ; 기우치 아키라, 「한국 석전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11∼13쪽.

석전의 기원에 대해선 『수서』 「고구려전」보다 앞서 1세기 초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사기』 신라 남해차차웅 11년조의 다음 기사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왜인(倭人)들이 병선(兵船) 100여 척을 타고 와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니, 6부의 힘센 군사들을 보내 이를 막았다. 이때 낙랑이 나라 안이 비었다고 여기고 금성(金城)을 갑자기 공격하여 왔으나, 밤에 유성이 적진에 떨어지자 적군이 두려워하여 후퇴했다. 적군이 알천(閼川)가에 머물며 돌무지(石堆) 20개를 만들어 놓고 떠났는데, 6부의 병사 1,000명이 토함산 동쪽에서 알천에 이르러 그들이 만들어 놓은 돌무지를 보고 적군이 많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49)『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 11년.

이 기록의 석퇴(石堆)는 돌을 쌓아올린 돌무지를 가리키는데, 이것이 군사력의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로 나오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1세기 초는 아직까지 철제 무기가 보편화되지 않은 단계이기 때문에 당시 전쟁에서 돌은 중요한 1차 무기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석퇴는 당시 전쟁에서 일종의 무기고 내지 전투 기지와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동안 고고학 조사에서 그 성격을 파악하기 어려워 간과되었던 돌무지 가운데는 이와 같은 군사적 성격의 석퇴 유적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최근 진주 상촌리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환호로 둘러싸인 돌무지 시설이 확인되었는데,50)동아대학교 박물관, 「상촌리 유적 B」, 『남강 유역 문화 유적 발굴 도록』, 경상남도·동아대학교 박물관, 1999, 32∼34쪽. 환호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보아 선사시대의 석전을 위한 방어 시설의 한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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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상촌리 유적의 돌무지 시설
진주 상촌리 유적의 돌무지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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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석전은 돌을 주요 무기로 사용하던 선사시대의 전쟁에서 유래한 것을 알 수 있다. 종래의 고고학 발굴 성과를 통해서는 선사시대의 전쟁 양상을 복원하기에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기왕의 고고학 조사가 주로 금속 유물이 출토되는 무덤 유적에 초점을 맞추어 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 목 책이나 환호 등 방어 시설로 둘러싸인 마을 유적이 점차 조사되면서, 당시 전쟁의 실제 풍경을 좀 더 근사하게 추정해 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전쟁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죽음과 삶의 두 측면을 동시에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동안 고고학을 통한 선사시대 연구는 죽음과 관련한 무덤 유적을 중심으로 부각된 측면이 강하였다. 그러나 최근 새롭게 조사되는 마을 유적을 통해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연구가 점차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선사시대의 전쟁 연구에서도 전쟁에서 희생된 죽은 자들의 무덤을 벗어나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생활 유적을 통해 당시의 풍경을 묘사하는 작업이 점차로 풍부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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