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1장 전쟁의 기원과 의식
  • 4. ‘전쟁놀이’의 의식적 기능
박대재

선사시대의 석전은 고대에 들어가면 일종의 군사 훈련으로 실전에 대비한 군중(軍中)의 놀이(戲)로 발전하게 된다. 그 실상은 기원전 1세기 초에 편찬된 『사기(史記)』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51)『사기』 권73, 열전 왕전(王剪). 돌 던지기(投石)가 당시 군사들의 쓸모 있는 놀이로 행해지고 있었다. 돌 던지기는 전시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실전 무예로써, 전장의 휴식 시간에는 병사들의 놀이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석전과 같이 고대 전쟁터에서 군사들이 연마하던 군중 놀이 가운데 우리 기록에서 유명한 것이 『삼국사기』 「거도(居道) 열전」에 전하는 마숙(馬叔)이다.

거도는 가계와 성씨가 전하지 않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탈해이사금 때 벼슬하여 간(干)이 되었다. 그때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국경에 접해 있어서 항상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는데, 거도가 변경의 관리가 되어 그곳을 병합할 생각을 품었다. 매년 한 번씩 여러 마리의 말을 장토 들판에 모아 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면서 놀게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 놀이를 마숙(馬叔)이라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자주 보 아 왔으므로 신라의 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틈을 타 군사를 출동시켜 갑자기 쳐들어가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52)『삼국사기』 권44, 열전4, 거도.

그동안 말을 타고 달리며 노는 이 군중 놀이에 대해 1512년(중종 7)에 간행된 임신본 『삼국사기』에 따라 ‘마숙(馬叔)’이라고 읽어 왔다. 그러나 고려 말 판본으로 추정되는 조병순씨 소장본에 의하면, 마숙(馬叔)이 아니라 마기(馬技)라고 판독된다.53)조병순, 『증수보주 삼국사기』, 성암 고서 박물관, 1986, 758쪽. 『삼국사기』를 저본으로 사용한 조선 초기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도 이 부분이 ‘마기’라고 기록되어 있다.54)『삼국사절요』 권1, 을묘 한 건초 4년(신라 탈해왕 23년). 따라서 임신본의 ‘마숙’은 원본의 ‘마기’를 판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각(誤刻)이라고 보아야 한다. 마기는 일단 글자 그대로 보아 말 타는 기술, 즉 기마술을 이용한 놀이일 것이다.

그런데 마기에 대해 다음의 『삼국사기』 「이사부(異斯夫) 열전」에서는 마희(馬戲)라고 달리 표기해 눈길을 끈다.

이사부는 김씨로 내물왕의 4대손이다. 지도로왕 때 바닷가 국경 지방의 관리가 되었는데, 거도(居道)의 꾀를 답습하여 마희(馬戲)로써 가야국을 속여 그 땅을 빼앗았다.55)『삼국사기』 권44, 열전4, 이사부.

여기서 ‘마희’는 앞선 기록의 마기와 같은 것으로 말타기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석전을 ‘척석희(擲石戲)’라고 불렀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기’를 ‘마희’라고도 했던 것이다.

일찍이 20세기 초에 문화사학자 호이징가는 고대 전쟁의 놀이적 요소를 지적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고대인의 마음속에는 싸움과 놀이의 두 개념이 흔히 뒤섞여 있었으며, 규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싸움은 바로 그 제한성 때문에 놀이라는 형식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싸움을 놀이의 가장 집중적이며 정력적인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동시에 가장 생생하고 원색적인 놀이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전쟁을 문화적 기능으로서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전쟁의 양편이 서로를 똑같은 권리를 가진 동등자 혹은 경쟁자로 여기는 범위 안에서 그 전쟁이 수행될 때로, 전쟁의 문화적 기능은 그것의 놀이적 성격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56)요한 호이징가, 김윤수 옮김, 『호모 루덴스: 놀이와 문화에 관한 한 연구』, 까치, 1981, 140∼141쪽. 호이징가는 고대 전쟁에서 놀이가 차지하는 비중과 기능을 잘 설명해 주었다. 한자에서 희(戲)란 본래 고대의 군사들이 실제 전투를 행하기 전에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호랑이 머리를 장식한 기물(䖒)을 창(戈)으로 치는 제의적(祭儀的)인 무용(舞踊)에서 나왔다고 한다.57)白川靜, 『字統』, 東京: 平凡社, 1984, 163∼164쪽. 희의 기원이 고대 전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마희도 원래는 ‘군대의 제의적인 놀이’에서 발전한 것으로, 고대 전쟁의 유희적 요소를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58)이기동, 「신라 상고의 전쟁과 유희」, 『소헌 남도영 박사 화갑 기념 사학 논총』, 1984, 19∼20쪽.

이러한 마기, 마희 등은 신라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에서도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남아 있는 마사희(馬射戲)가 바로 이러한 마희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마사희는 마술과 궁술을 하나로 합한 기예로써 군사 훈련에서 빠지지 않는 무예였다.59)윤경렬, 「신라의 유희」, 『신라 민속의 신연구』신라 문화제 학술 발표회 논문집 4, 신라 문화 선양회·경주시, 1983, 293∼294쪽. 평남 대안 덕흥리 고구려 고분 벽화의 마사희 장면에는 4명의 기수와 2명의 심판관과 1명의 서기가 있고, 서기 옆에는 ‘사희주기인(射戲主記人)’이라는 묵서(墨書)가 표기되어 있다. 덕흥리 벽화 무덤은 5세기 초에 축조된 고구려 고분으로, 당시 고구려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덕흥리 무덤의 묘실 안간 서벽 왼쪽(남쪽) 윗단에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아 목표물을 맞추는 마사희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운 다섯 개의 장대 끝에 네모 모양의 과녁이 꽂혀 있고 두 사람의 기수가 말을 달리며 활을 쏘고, 나머지 두 사람의 기수는 먼 곳에 대기하고 있다. 두 개의 과녁은 벌써 화살을 맞고 땅에 떨어져 버렸다. 두 사람의 심판관이 이를 지켜보고 있고, 서기는 옆에서 그 점수를 적고 있는 광경이다.60)이태호, 「고구려 벽화 고분 해설」, 『고구려 고분 벽화 해설』, 풀빛, 1995,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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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리 고분 벽화의 마사희
덕흥리 고분 벽화의 마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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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마기, 마희, 마사희 등과 같은 기마(騎馬) 전술이 전쟁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시에 기마 문화가 사회 전반에 정착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고대 국가는 전쟁에 말이나 소 같은 동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선사시대의 원시 전쟁과 달리 작전 속도나 수송 보급 면에서 급속히 발전하게 된다.61)존 키건, 앞의 책, 225∼318쪽. 특히, 기원전 10세기 무렵 아시리아 인들이 창안했다고 하는, 말 등에 직접 올라타고 달리면서 싸우는 기마 전투술은 ‘기마 혁명’이라 불릴 만큼 세계 전쟁사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62)윌리엄 맥닐, 신미원 옮김, 『전쟁의 세계사』, 이산, 2005, 33∼36쪽.

기마 문화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연의 야생마를 가축화하여 사육하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말의 사육은 고구려의 주몽 설화에 나오는 목마장 이야기를 통해 삼국의 건국 당시에 이미 존재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삼국 초기의 말은 과하마(果下馬)라고 하여 과수나무 밑을 지나갈 정도로 키가 작은 말이었다고 한다. 과하마는 기마술이 발달한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이 타던 말들과 같이 높이가 낮아 기마에 용이한 종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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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 문화는 말을 제어하는 데 이용했던 마구(馬具)의 존재를 통해서 고고학적으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고대의 마구는 대구 평리동, 창원 다호리, 경산 임당 등 목관묘(木棺墓) 유적에서 출토되는 재갈멈추개(鑣轡)부터 등장하는데, 그 시기가 대체로 기원을 전후한 무렵부터라고 알려져 있다.63)김태식·송계현, 『한국의 기마 민족론: 기마 민족설의 실체와 기마 문화』, 한국 마사회 마사 박물관, 2003, 231∼237쪽. 초기의 마구가 주로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이 『삼국지』에서 마한은 우마를 탈 줄 몰랐으나 진·변한은 탔다고 한 기록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마기, 마희, 마사희 등의 문화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고대 군사들의 놀이이자 실제 전술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마희 기록은 중국 고대의 『염철론(鹽鐵論)』과 『삼국지』 등에서도 보이고 있어, 우리의 삼국시대와 같이 당시 중국에서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마희는 고려에 들어와 ‘희마(戲馬)’로 계승되며, 조선시대에는 마상재(馬上才)라는 기마술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희마는 훈련한 말에게 여러 기예를 시키거나 기수가 기술적으로 말을 타는 것을 일컫는데, 전자를 무마(舞馬), 후자를 원기(猨騎)·표기희(驃騎戲)·마기(馬伎)·입마기(立馬伎)라고 부른다. 고려의 희마에 대해선 『고려사』에 의종대 및 최씨 정권기에 격구(擊毬)와 함께 관상(觀賞)하였다는 예가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와 송나라의 잦은 교류를 미루어 보면, 고려의 희마는 송나라의 것과 흡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송나라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마기(馬伎)에 이른바 ‘인마(引馬), 개도기(開道旗), 입마(立馬), 구마(驅馬), 도마(跳馬), 헌안(獻鞍), 도립(倒立), 타마(拖馬), 비선(飛仙), 박마(膊馬), 등리장신(鐙裏藏身), 간마(趕馬), 작진(綽塵), 표자마(豹子馬)’ 등의 기술이 있다고 하였는데, 고려의 희마도 이런 기술들이었을 것이다.64)최남선, 『조선 상식: 풍속편』, 동명사, 1948, 103쪽.

고려의 희마가 조선에 계승된 것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징비록(懲毖錄)』에 임진왜란 당시 “금위 조웅(趙雄)이 용감하여 마상입치(馬上立馳)의 기술로 적을 죽이는데 능하였다.”고 한 사실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전통이 끊이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1634년(인조 12)에는 일본의 덕천(德川) 막부가 조선의 마재인(馬才人)을 선발하여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이듬해에 역관(譯官) 홍가남이 마재(馬才) 장효인·김정근 두 사람을 데리고 가 시연한 이래로 그후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 일행에는 2명 이상의 마상재인(馬上才人)이 늘 수행하였다. 또 효종대에는 북벌 계획에 의해 기마술이 장려됨에 따라 내원(內苑)에서 마상재를 시험하기도 하였다.65)최남선, 앞의 책, 104쪽. 이 밖에 조선시대 궁중에서 시연된 마상재는 『중종실록』∼『정조실록』 및 『승정원일기』 숙종 8년, 12년, 18년(1692) 등에 자주 보이고, 일본의 요청으로 파견한 조선의 마상재인에 대해선 『변례집요(邊例集要)』 권1 갑술∼을해(1634∼1635) 및 『전객사일기(典客司日記)』 효종 2년(1651) 1월 6일조 등에 자세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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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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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정조 14)에 이덕무, 박제가 등이 편찬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따르면 마상재로 모두 여덟 가지 자세가 있다. 말 위에 서서 달리는 주마입마상(走馬立馬上), 말 등을 좌우로 넘으면서 말 옆구리에 매달려 가는 좌·우초마(左·右超馬), 말 목에 머리를 대고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마상도립(馬上倒立), 기수가 말 등에 드러누워 죽은 듯이 꼼짝 않는 횡와마상양사(橫臥馬上佯死), 좌우로 넘나들며 한 손으로는 안장을 잡고 한 손으로는 땅을 긁어서 모래흙을 끼얹는 좌·우등리장신(左右鐙裏藏身), 양쪽 발로 말의 옆구리를 끼고서 말꼬리를 베고 드러눕는 종와침마미(縱臥枕馬尾) 등이다.66)『무예도보통지』 권4, 마상재. 『무예도보통지』에는 마상월도(馬上月刀), 마상쌍검(馬上雙劍), 기창(騎槍), 마상편곤(馬上鞭棍), 마상재(馬上才), 격구(擊毬) 등 마상 무예 여섯 가지가 실려 있는데, 이 마상 무예들이 바로 고대의 마희, 고려의 희마 등을 계 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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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재 재현
마상재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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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살펴본 돌 던지기(석전), 마희, 희마, 마상재 등은 놀이이면서 동시에 실전에 사용한 무예이기도 한 ‘전쟁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릴 적 전쟁놀이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하겠지만, 전쟁놀이는 인위적인 대적 집단을 정하여 상호 경쟁함으로써 집단 간의 단결을 도모하고 유대 관계를 강화하는 기능을 하였기 때문에 놀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의식(儀式)의 측면까지 가지고 있었다.67)조성환, 「한국 고대 민속놀이에 관한 연구」, 『한국 문화 연구원 논총』 51, 1986, 368쪽. 다시 말해 전쟁놀이는 전쟁, 놀이, 의식의 3요소가 복합되어 있는 종합 문화인 셈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석전과 마희 등은 전쟁을 위한 의식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전쟁이 의식과 관련되는 측면에 대해서는 항목을 달리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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