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2장 출정에서 회군까지
  • 1. 전쟁의 발발과 출정
  • 전쟁이 시작되다
심승구

전쟁은 매우 다양한 요인으로 일어나지만, 형태는 침입을 받거나 정벌하는 경우로 나뉜다. 그래서 전쟁은 늘 공격전이거나 수비전, 아니면 이 둘이 혼합된 형태로 전개된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은 시기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즉,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전쟁은 민족의 형성을 둘러싼 공방전이 혼합된 형태인 반면에, 통일신라 이후의 전쟁 은 방어전이 위주인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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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장 참수(敵將斬首)
적장 참수(敵將斬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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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고조선에서 삼국시대까지는 중국과 북방 민족 그리고 일본과는 물론이고 한반도를 무대로 한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는 원인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지만, 영토 확장이라는 국가적인 과제가 정복 전쟁이라는 형태로 표출되어 크고 작은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전쟁은 주로 주변국인 중국, 일본의 여건 변화에 따라 때론 침략에 따른 방어전이, 때론 정벌을 위한 공격전이 계속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이러한 전쟁을 마무리함으로써 민족의 형성에 중요한 토대를 구축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 전쟁을 민족 수호를 위한 방어전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으로, 통일신라 이후부터 19세기 이전까지의 전쟁은 남왜북적(南倭北狄)의 침입을 받는 형태였다. 이 시기에는 남쪽의 일본과 북쪽의 거란(요), 여진(금), 몽고(원), 여진(후금, 청) 등의 침략을 주로 받았다. 우리 역사를 말할 때 흔히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다고 언급 하지만 그것은 사실 통일신라 이후 한국사를 말할 때나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물론 4군 6진의 개척, 대마도 정벌 등 영토 확장과 응징을 위한 정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 시기에는 주로 우리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받아 방어전 위주의 전쟁이 전개되었다. 19세기 이후의 서양 세력, 일본의 재침략 등도 이러한 기조를 잇는 형태였다.

전쟁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 공격전과 방어전의 전쟁 양상은 크게 차이가 난다. 공격전의 양상은 다른 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성격을 띠며, 충분한 의식과 성대한 절차를 거친 뒤 전쟁을 수행한다. 그것은 공격 전쟁이 수비만큼 국가의 명운(命運)을 좌우할 만한 총력전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수비전은 갑자기 다른 나라의 공격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에 충분한 의식과 성대한 절차를 될 수 있는 한 생략한 채 빨리 군사를 전선에 파견하여 총력전을 펼치는 방식이었다.

전쟁의 일반적인 전개 과정을 단계별로 살펴보자. 먼저, 다른 나라가 변경을 침입해 오면, 가장 먼저 중앙 정부에 보고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를 위해서 전국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 정보 체계가 있었다. 변경에서 망을 보거나 관찰하는 요망(瞭望) 또는 후망(候望)이 그것이다. 요망은 적의 출현을 관찰할 수 있는 산꼭대기나 성의 망루 또는 토성의 토단 등 높은 장소인 후망처에서 이루어졌다.

적군이 출현한 것을 확인하는 즉시 군사들은 신호를 보내 인근 마을에 전투 태세를 갖추게 하는 동시에 중앙 정부에 알려 대비하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때 사용하던 신호 체계가 바로 연기나 횃불이었다. 아울러 사람을 보내 적이 침입한 사실을 전달하는 파발(擺撥)도 이용했다. 또한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자명고(自鳴鼓) 같은 북을 신호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봉(烽, 횃불)과 수(燧, 연기)는 봉화라고도 한다. 대략 20∼50리 정도의 일정한 거리마다 산꼭대기에 연대(煙臺) 또는 봉수대를 만들어 밤에는 횃불 로, 낮에는 연기로 변경의 정세를 중앙에 전달하는 통신 수단이었다. 봉수는 중국 주나라 때 이미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유래가 꽤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사용한 흔적이 있다.102)『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이 기록에 거화가 처음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제도의 실상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확인할 수 있다. 1149년(의종 3)에 봉수식을 정하되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하며 평상시에는 l번씩 올리고 비상시 2급에는 2번씩, 3급에는 3번씩, 4급에는 4번씩 올렸다.103)『고려사』 권81, 지35, 병1, 오군, 의종 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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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팔도봉화지도(海東八道烽火之圖)의 세부
해동팔도봉화지도(海東八道烽火之圖)의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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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크게 정비했다. 봉수대에서는 연기나 횃불을 드는 거수를 달리하여 정세의 완급을 나타냈는데, 평상시에는 1거(炬), 왜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2거, 왜적이 해안에 가까이 오거나 적이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거, 우리 병선과 접전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왜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을 침범한 적과 접전하면 5거씩 올렸다.104)『세종실록』 권4, 세종 1년 5월 경오.

적이 변경에 나타날 때 안개·구름·비·바람 등으로 봉수 전달이 불가능하면, 봉수대는 포 소리와 나팔 소리로 주위의 주민과 수비 군인에게 급보(急報)를 알리고,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서 알리도록 했다. 실제로 봉수는 날씨 때문에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웠다. 서울 남산에 있는 5개의 봉대(烽臺)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병조에서 종합하여 승정원을 거쳐 임금에게 알리고, 변란(變亂)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즉시 보고하였다.105)『경국대전』 권4, 병전, 봉수.

봉수는 국가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였던 만큼, 그 주변을 특별한 구역으로 정했다. 이를 위해 봉수대에는 기둥을 세워서 경계를 정하고 범죄를 단속하게 하는 한편, 봉수대 근처에는 민간인의 출입을 막거나 무당, 토속신의 사당 건립을 금했다. 제의(祭儀) 과정에서 연기나 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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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봉수대
금산 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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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망(烽燧網)은 전국의 주요 간선로를 5로(路)로 나누었는데 이를 직봉(直烽)이라 했다. 동북 두만강변의 우암(함경도 경흥 서수라), 동남 해변의 응봉(경상도 동래 다대포), 서북 압록강변의 여둔대(평안도 강계)와 고정주(평안도 의주), 서남 해변의 돌산포(전라도 순천)를 기점으로 하여 서울 남산의 5개 봉대에 도달했다.106)남산 봉수의 5개소는 동쪽에서부터 제1거(경흥-서울 간 직봉 122, 간봉 58, 계 180)는 함경도 경흥으로부터 강원도를 거쳐 양주 아차산에 이르는 봉수, 제2거(동래-서울 간 직봉 44, 간봉 110, 계 154)는 경상도 동래로부터 충청도를 거쳐 광주 천림산에 이르는 봉수, 제3거(강계-서울 간 직봉 79, 간봉 20, 계 99)는 평안도 강계로부터 내륙으로 황해도를 거쳐 한성 무악 동봉에 이르는 봉수, 제4거(의주-서울 간 직봉 71, 간봉 21, 계 92)는 평안도 의주로부터 해안으로 황해도를 거쳐 한성 무악 서봉에 이르는 봉수, 제5거(순천-서울 간 직봉 61, 간봉 24, 계 85)는 전라도 순천으로부터 충청도를 거쳐 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이다. 또한 직봉 외에 간봉(間烽)이 있었는데, 직봉 사이의 중간 지역을 연결하는 장거리선 간봉과 국경 방면의 초소로부터 본진으로 보고하는 단거리선 간봉이 있었다.

봉수대의 수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782)에 따르면 직봉 402개소, 간봉 271개소로 모두 673개소였다. 각 봉수대와 봉수대 사이의 거리는 중요도에 따라 달랐다. 변방 제일선의 연대는 10∼15리 이하로 조밀하게 배치되었고, 내지(內地) 봉수로 옮겨갈수록 거리가 멀어졌다. 평상시 낮에 연기로 신호하는 먼 지역은 20∼30리 간격, 야간에 불로 신호하는 가까운 지역은 40∼50리 정도였다.

봉수는 동서남북의 어느 변경에 위치한 봉수대에서 올린 봉화이든지 12시간 정도면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봉수군의 태만, 봉수대의 관리 소홀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전달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근면한 봉수군은 승진 표창하는 반면 간망(看望)을 게을리 하면 엄벌로 다스렸다. 처벌 내용은 장(杖) 70∼100대이거나 파직하고, 적이 침입했는데 보고하지 않거나 적과 접전하면서 거화(擧火)하지 않으면 봉수군과 수령을 모두 참수했다.107)허선도, 「봉수」, 『한국 군제사』, 육군 본부, 1968. 참조.

그런데 변경의 급보를 알리던 봉수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가장 큰 이유는 날씨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중인 1597년(선조 30) 2월에 선조가 대신들과 봉수제를 논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필형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봉화를 설치한 데는 목적이 있고 병법에도 ‘봉수와 척후(斥候)를 신중히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큰 적(일본군)이 바다를 건너왔는데도 봉화는 옛 법대로 급한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으니 만일 급한 일이 일어나도 이를 알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근래 모든 것이 해이해졌으나 봉수가 가장 심합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우리나라 봉수의 폐단은 경장(更張)하기가 쉽지 않다. 비록 봉수의 사졸에게 군령을 시행한다 해도 일이 되지 않아 내 생각에 매번 혁파하려 했으나 하지 못했다. 모든 봉대가 산 정상에 있기 때문에 구름ㆍ안개와 분별할 수 없는 것이지 봉졸(烽卒)이 태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 하였다.108)『선조실록』 권85, 선조 30년 2월 병술.

봉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는 산꼭대기의 구름과 안개 때문이었다. 더구나 봉수대가 해안의 산중에 있을 때는 낮의 연기이든 밤의 횃불이든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사실 봉수는 적이 쳐들어왔을 때 완급만을 전할 뿐이지 구체적인 병력, 무기, 움직임 등을 전할 수 없는 한계가 있는 통신 수단이었다.

봉수의 기능이 발휘되지 못한 까닭에는 봉수군의 태만도 있었지만, 산꼭대기의 봉수가 나무에 가리거나 구름과 바람 등으로 관측이 불가능하거나 중도에서 봉화가 끊어진 탓도 컸다.109)『세조실록』 권14, 세조 4년 10월 갑술 ; 『문종실록』 권12, 문종 2년 2월 계유. 더구나 성종 때에는 왜구가 경상도 남해에 쳐들어왔는데도 순천의 돌산포 봉수가 평시의 예에 따라 1거로 보고하는 문제가 발생하였고,110)『성종실록』 권89, 성종 9년 2월 기유. 1544년(중종 29)에 일어난 사량진 왜변 때에도 허위로 봉화를 올리는 등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111)『중종실록』 권73, 중종 27년 10월 정축. 봉수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례가 갈수록 심해져 명종 때의 을묘왜변(乙卯倭變)112)『명종실록』 권18, 명종 10년 5월 기유.이나 선조 때의 이탕개(尼湯介)의 난113)『선조실록』 권85, 선조 30년 2월 병술.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114)『선조실록』 권47, 선조 27년 1월 기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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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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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오랫동안 군사 통신 수단으로 활용하던 봉수는 사실상 날씨 문제로 효용성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기존의 피폐된 역로(驛路) 위에 파발을 세워 급박한 전령과 변경의 위급을 전달하는 군사 통신 수단인 파발제를 운영했다.

파발은 말을 달려 전하는 기발(騎撥)과 도보로 달려서 전하는 보발(步撥)이 있었다. 이를 급주(急走)라고 하였다. 이미 조선 초기부터 급한 보고를 하기 위해 역의 파발을 사용했으나 정식으로 제도화한 것은 아니었다.115)『세종실록』 권36, 세종 9년 5월 무술 ; 『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2월 임인. 하지만 1583년(선조 16)에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급주로써 파발을 실시했다.116)『선조실록』 권85, 선조 30년 2월 병술. 그 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일본군에 대해 보고받기 위해 100리마다 파발을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117)『선조실록』 권27, 선조 25년 6월 기해. 이에 명군은 주요 간선 도로를 중심으로 파발아(擺撥兒)를 설치하여 임진왜란 전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118)『선조실록』 권40, 선조 26년 7월 경오. 조선 정부도 1597년(선조 30)에는 명나라의 제도에 따라 파발을 설치하되, 기발은 20리마다 1참(站)을 두고 보발은 30리마다 1참을 두었다.119)『선조실록』 권88, 선조 30년 5월 기미. 1561년(선조 34)에는 경상도, 전라도의 2대로에 전에 명나라 파발을 설치한 막에 다시 파발막을 설치했다.120)『선조실록』 권133, 선조 34년 1월 갑인.

봉수를 보완하는 방안으로 서발(평안도), 북발(함경도), 남발(경상도)의 3대로를 근간으로 한 파발 제도를 실시했고, 그 뒤 인조·효종 때 청나라에 대비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재정비했다. 파발 제도는 봉수와 비슷하게 직발과 간발로 나뉜다. 기발은 말을 타고 전송하며, 25리마다 1참을 두었으나 20리 또는 30리인 경우도 있었다. 참마다 발장 1명, 색리 1명, 기발군 5명, 말 5필을 배치했다. 보발은 속보로 달렸는데, 30리마다 1참을 두었으며 발장 1명과 보발군 2명을 배치했다. 파발은 기존의 역참 위에 설치한 것으로 서발, 북발, 남발의 3발로 조직되었다.

파발은 적정(敵情)을 문서로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전달 속도는 봉수보다 떨어졌다. 그러나 파발제는 봉수가 군사 목적 이외에는 이용할 수 없는 것과 달리 말을 이용할 수 있는 특성 때문에 관리들이 개인적인 목적에 이용하는 폐단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숙종대 이후에는 다시 봉수를 복구하여 파발제와 함께 운영했다. 전국의 변방에는 외적이 쳐들어올 경우를 대비하여 그 지역에서 1차 방어를 하되 침략 규모에 따라 중앙에서 장수를 파견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위해서 신속히 침략 사실을 알리는 군사 정보 체제가 중요시되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통신 연락은 군의 신경이요 이목이었다. 하지만 외적이 침략했을 때 긴급히 알리는 연기와 횃불은 산악 지형과 구름, 안개 등 자연적인 여건의 한계 때문에 실효를 거두기 어려웠다. 그나마 파발은 연기와 횃불보다 속도는 늦었지만, 정확히 침입자의 동태를 전달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담당 군사들에 대한 열악한 대우와 근무 여건, 국가 관리들의 사적 이용 등의 폐단으로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전근대 사회의 전쟁에서 봉수와 파발은 적의 침입을 알리는 유일한 군사 통신 수단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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