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2장 출정에서 회군까지
  • 1. 전쟁의 발발과 출정
  • 둑제를 지내다
심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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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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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가 출정하기 위해서는 전선으로 나가는 날짜를 정했다. 택일한 뒤에는 ‘전쟁의 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군기(우보당대조기), 즉 둑(纛)을 대청관(大淸觀)에 세우고 출진제를 지내는데 이를 둑제(纛祭)라고 했다. 둑은 검은 소의 꼬리로 만들었는데 군법의 신 치우(蚩尤)의 머리를 상징하는 깃발이다. 이 깃발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전쟁의 승리와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원래 둑제는 전쟁 때뿐 아니라 봄가을에 제사 지내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고려 때는 둑기를 관장하는 둑치(纛赤)라는 관리를 두어 이를 주관하게 했다.

충선왕 때에 대청관이라는 판관(判官)을 두었는데 그 품계는 종9품이었다. 대청관은 둑(纛)을 보관하는 일을 주관한다. 적을 치려고 나갈 때에는 반드시 대청관에서 둑기를 세우고 제사 지내게 되어 있었다. 공민왕이 장차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려 할 때 큰 둑기를 만들게 하고 그것을 관리하 는 관원을 두었는데, 그 관직 이름이 둑치였다. 신우 3년(1377)에는 관리 임명이 있을 때마다 둑치를 채용하는 것은 폐단이 적지 않다 해서 이를 폐지하였다.131)『고려사』 권77, 지31, 대청관.

이처럼 군사를 전쟁터로 보낼 때는 둑제를 지내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둑제 지내는 것을 국가 의례 가운데 하나인 군례(軍禮)로 제도화했다. 그리하여 둑제는 군대를 출동할 때는 물론이고 전쟁과 상관없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군대가 출동할 때의 둑제는 둑을 보관하는 둑묘에서 둑기를 내어 제사를 지내고, 군대가 돌아왔을 때에는 원래대로 둑묘 안에 들여 두는 형식이었다. 둑제는 무관이 주재하는 제사로 그 의식은 다음과 같다.

둑제는 모두 무관이 주관하되 행사를 주관하는 책임자는 2품이고, 제사를 관장하는 사람은 6품 이상의 관리이며, 예를 행하는 관리는 6품이고 대축(大祝)과 축사(祝師) 2인, 재랑(齋郞), 장생령(掌牲令), 알자(謁者), 찬자(贊者), 찬례(贊禮), 감찰(監察)이 참석했다. 제사는 전폐례(奠幣禮)를 시작으로 풍악에 맞추어 방패와 도끼를 들고 추는 간척무(干戚舞)를 춘 후에 헌관(獻官)이 초헌례(初獻禮)를 행하고, 아헌례(亞獻禮)는 풍악에 맞추어 활과 화살로 추는 궁시무(弓矢舞)를 출 때 헌관이 잔을 올린 후 마치며, 종헌례(終獻禮) 역시 아헌례와 같되 창과 검으로 추는 창검무(槍劍舞)를 춘 후에 잔을 올리고 배례(拜禮)를 하고 마쳤다.132)『세종실록』 권89, 세종 22년 6월 계미 ; 『국조오례의』, 군례.

둑제는 크게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전폐례를 시작으로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의 차례로 진행하였다. 다만 각 절차 사이에 간척무, 궁시무, 창검무의 무용이 곁들여지는 형식이었다. 둑을 설치한 단은 처음에는 도성 내 동남인 훈련원에 있다가 나중에 성내 서북으로 옮겼다. 둑제는 경칩(양력 3월 5일 전후)과 상강(10월 24일 전후)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규모는 소사(小祀)에 해당하고 의식과 절차는 사직제와 비슷하였다. 전쟁에 출정하기 전에 실제로 둑제를 거행한 사례가 기록에서 확인된다.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의 전쟁에서 명나라를 돕기 위해 강홍립(姜弘立) 장군을 보내기에 앞서 길일을 택하여 둑제를 지내고 파견하도록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본사의 계사로 순변사(巡邊使) 이상의 장관을 택일하여 보내는 일을 이미 윤허받았습니다. 일관(日官)에게 가려 뽑게 하니 순변사 우치적은 이번 7월 17일에 떠나는 것이 길하다 하고 도원수 강홍립은 이번 7월 27일에 떠나는 것이 길하다고 합니다. 이 양일 중에 마땅히 떠나게 해야 할 것 같은데 국가의 대사가 군사에 있는 까닭에 일이 심히 중대합니다. 마땅히 둑제 등의 일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청컨대 해당 부서에게 미리 길일을 택하여 거행토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133)『광해군일기』 권130, 광해군 10년 7월 계사.

전쟁이 급박하여 둑제를 미처 거행하지 못하면 나중에 거행하기도 했다.134)『명종실록』 권18, 명종 10년 6월 임신. 원래 출동한 뒤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지만, 전쟁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인 만큼 종묘와 사직에도 아울러 제사했다.135)『명종실록』 권18, 명종 10년 6월 갑술. 둑제를 지낸 뒤에는 백관이 음복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둑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고비로 점차 시행되지 않으면서 폐지되었다.136)『연려실기술』 권10, 별집7, 관직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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