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2장 출정에서 회군까지
  • 2. 전투
  • 적이 강하면 수비하라
심승구

우리나라의 전투는 예로부터 산성을 둘러싼 공격과 방어전이 유독 많았다. 먼저 성을 방어하는 수성(守城)을 해야 할 경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적군이 수가 많고 강할 경우, 아군의 지원 부대가 올 경우, 성이 견고하고 모든 대비가 완벽할 경우, 적의 군사를 지치게 할 경우, 적정의 변동 사항을 관찰할 경우에는 수성을 했다. 수비하게 되면 주로 성을 지키는 방어전을 벌여야 했다. 성곽전(城郭戰)은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수비 전술에 중요한 전술이었다. 성을 지키는 방어에는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전술을 사용했다. 적이 쳐들어오면 들의 곡식을 모두 비우고 산성에 올라가 농성하는 전술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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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성 성곽도
요동성 성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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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지킬 때는 화통, 화포, 장창, 뇌목(둥근 기둥 모양의 나무로 성 밑에서 올라오는 적을 향해 성 위에서 내려치는 것), 수포 등을 사용하여 성으로 기어 올라오는 적을 막았고, 털방석이나 주렴·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발이나 방패 등을 사용하여 적진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멩이를 막아 냈다.

성벽 안쪽 주변에 물통을 많이 확보하여 적의 화공에 대비했고, 전관기교,145)녹로(도르래)가 달려 있는 기교다. 기교는 참호 위에 올려놓는 다리이다. 적이 오면 즉시 치워서 적을 참호 속으로 빠지게 하는 것이다. 목마자,146)적 기병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나무로 만든 말 모양의 기구다. 발이 3개이며, 길이는 6척, 높이는 3척쯤 되는 데, 종횡으로 진영의 밖에 설치했다. 함마갱,147)적의 군마가 빠지게 하는 함정이다. 철질려148)적을 막기 위해 진지에 흩어 두는 마름 모양의 무쇠덩이로, 마름쇠라고도 한다. 등을 많이 준비해 불시에 나타나는 적을 막았다. 성을 환하게 비추는 등불을 달아 놓아, 적이 성 위로 올라오는지 지켜보았다. 항아리나 독을 성 주위에 많이 마련해 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 조용히 들으면, 적이 땅굴을 파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오색으로 만든 깃발을 성 위에 꽂아 바람에 휘 날리게 하고 적병이 우러러 볼 때 겨나 왕겨, 석회 따위를 바람에 날려 보내 적군이 눈을 뜨지 못하게 한 뒤에 불화살이나 불에 달군 쇠갈고리를 성 아래로 내려 보내 적군이 손으로 만졌다가 화상을 입게 하면 큰 효과를 보았다. 성 주변에 돌문(성을 지키는 문)을 많이 설치하고 그 돌문으로 몰래 출격하여 적을 경동(驚動)하게 하거나, 성 위에 목만, 풍포, 돌덩이, 오물, 모래, 재 따위의 물건과 목책, 조교 등을 많이 준비하여 급할 때에 사용했다. 땅 속에서 나는 소리를 잘 듣기 위해 잠귀가 밝은 자에게 빈 호로병을 베고 누워서 사방에 다니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게 했다. 밤에는 장수가 아군의 대오에 섞여 군사들의 동정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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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실총의 기마전투도
삼실총의 기마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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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수비 체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크게 정비되었다. 수비하기 위해 전국을 특수한 지역으로 구분해 놓았는데 진보(鎭堡) 제도가 그것이다. 진과 보 제도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압록강과 두만강 물목을 경비 하는 곳을 ‘위(衛)’라 하고, 의주에서부터 서해안을 돌아 남해안을 거쳐 다시 동해안의 해상 경비소를 ‘채(寨)’라 했다. 강이나 바다에서부터 육지로 들어온 내지의 요해지(要害地)를 경비하는 곳을 ‘보’라 하고, 산악 경비를 ‘성’이라 하며, 폐사군(廢四郡)의 좌우를 끼고 있는 경비소를 ‘협위(脇衛)’라 했다.149)정약용, 『경세유표』, 권15, 하관수제, 진보제도.

수비전을 위주로 한 우리나라는 전쟁이 벌어져 수도가 위급해지면 피란을 가서 전세의 만회를 기약하였다. 고려 현종 때 거란이 침입하자 국왕이 남쪽으로 피해 공주로 내려갔으며, 몽고의 침입 때는 강화도로 파천(播遷)하여 항쟁했고 공민왕 때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남쪽인 안동으로 피신했다. 고려 때까지는 주로 북방 민족의 침략에 따라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피신하는가 하면, 남쪽으로 파천하여 뒷날을 도모했다. 반면에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이 남쪽에서 쳐들어오자 이번에는 북쪽으로 파천했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강화도로 가려다가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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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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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다른 나라나 민족이 침입해 왔을 때 가장 효과적인 방어 전략은 산성 방어였다. 이에 고구려는 요서 지역에 장성을 쌓아 중국의 침략을 방어하였고, 고려는 천리장성을, 조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산성 방어를 중요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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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지도
남한산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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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는 의주, 평양, 황주, 평산 등 주 저항선에 배치한 병력을 인근의 산성에 들어가 농성하게 했다. 정묘호란 때 서북면의 여러 성이 며칠 만에 모두 함락되어 방어선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무너져 버린 것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된 성에서 강력히 저항함으로써 최대한 시간을 벌어 전국의 병력을 총동원하고,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수도권 방어를 보강한다는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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