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2장 출정에서 회군까지
  • 3. 회군과 논공행상
  • 전쟁의 승리와 회군 의식
심승구

전쟁이 끝나면 원수와 부원수는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온다. 회군 의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즉, 국왕이 장수와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영접 의식과 장수가 국왕에게 전쟁 결과를 보고하는 복명 의식으로 이루어졌다.

회군하기 전날에는 미리 회군 의식을 준비한다. 도성 밖에 출정한 장수와 군사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는 한편, 궁궐 내에서는 국왕이 장수를 접견하는 복명 절차를 하기 위해 행사를 준비했다. 여기서는 고려시대의 군례로 정비된 회군 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회군하기 전날 상사국(尙舍局)에서는 왕의 자리를 대관전에 정하고 원수와 부원수가 절하는 자리를 대궐 뜰에 설치하며, 수궁서(守宮署)에서는 대궐문 밖 조당(朝堂, 임시 거처)에 원수와 부원수의 막차를 설치하고 또한 숙소의 동편 가장자리에 원수와 부원수의 석차(席次)를, 서편 가장자리에는 영접하는 대신의 자리를 설치한다. 또한 대궐 뜰 한복판에 원수와 부원수 가 절하고 명을 받드는 자리를 설치한다.

그 다음 회군하는 날에는 도성 밖에 장군과 군사들의 임시 숙소를 마련하고 먼저 국왕의 명을 받은 영접사를 보내 장수와 군사들에게 위로연을 베푸는 절차를 거행했다. 이때 영접사가 도착한 후에는 국왕이 사는 궁궐을 향해 먼저 절을 하는 의식을 베풀고, 국왕의 건강을 묻는 절차를 진행한다. 영접사가 국왕의 안녕을 답하면 다시 국왕을 향해 절을 하고 정자에 올라 서로 안부를 확인한 후에 국왕이 내려준 잔치를 받는다.

영접사가 숙소에 이르면 합문(의례 담당 관리)은 원수 이하를 인도하여 문 밖까지 나와 서로 읍례(揖禮)한 다음 문 안으로 들어가 각각 자리에 나아가고 영할과 각 군사, 부군사, 판관, 녹사 등은 관등별로 열을 지어 겹으로 선다. 사인이 “원수 이하 대궐을 향하여 두 번 절하라.”라고 말한다. 이것이 끝나면 원수는 영접사에게 국왕의 건강을 묻는다. 사인이 다시 “원수 이하 두 번 절하라.”라고 한다. 영접사가 말로 대답하면 사인은 “원수 이하 다시 두 번 절하라.”라고 한다. 이것이 끝나면 합문은 영접사와 원수, 부원수를 인도하여 각각 동·서편 층계로 따로따로 정자 위에 올라 자리에 가 서면 집례관이 번갈아 문안하는 서한을 전하고 영접사와 원수가 안부 인사를 나눈다. 이것이 끝난 다음 합문은 그들을 인도하여 위로하는 연회에 참석한다.

연회를 마친 후에는 다시 국왕에게 잔치에 대한 감사의 글인 표문(表文)을 올리는 절차를 진행한다. 이 절차를 마치면 영접사는 표문을 함에 넣고 궁궐로 돌아가 보고하는 절차를 밟는다.

연회를 마치고 합문이 영접사와 원수, 부원수 이하를 인도하여 뜰 한복 판으로 내려가 자리에 서면 사인이 “원수 이하 두 번 절하라.”라고 한다. 이것이 끝난 다음 원수가 사례하는 표문을 받들고 영접사 앞으로 가서 꿇어앉아 올리면 영접사는 조금 앞으로 나서서 표문을 받아 들며 각자 본래 자리로 돌아 간다. 사인이 “원수 이하 다시 두 번 절하라.”라고 한다. 영접사가 함을 든 자에게 표문을 전하면 함을 든 자는 이것을 함에 넣어서 먼저 밖으로 나가고 원수와 영접사도 같이 문 밖으로 나가서 서로 읍례하고 갈라진다.

이상의 내용은 회군하는 당일에 도성 밖에서 장수와 군사들의 전쟁에 대한 노고를 위로하는 의식이다. 결국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면 우선 도성 밖 교외에 마련된 숙소에 머물게 했다. 그 까닭은 혹시라도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도모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왕은 영접사에게 교외에 머문 장수와 군사들에게 위로연을 베풀게 했다. 크게 승리하고 돌아올 경우에는 외국 사신을 영접하듯 성대한 환영 행사가 열렸다. 그 절차는 먼저 영접사가 장수가 머문 숙소에 이르면 장수가 문 밖으로 나와 인사를 나눈 후 함께 들어가 국왕이 있는 곳을 향해 인사를 드렸다. 장수가 국왕의 안부를 물으면, 영접사가 장수의 안부를 물은 후 위로연을 베풀어 노고를 치하했다. 연회가 끝나면 장수는 국왕에게 위로연을 베풀어 준 데 대한 감사의 글인 표문을 지어 올렸다.

이러한 위로연이 끝난 후에는 날짜를 정해 국왕을 만나 뵙고 궁궐에서 복명 절차를 밟는다. 복명 절차는 전쟁에서 실패할 때는 별다른 의식 없이 진행했지만, 승리하거나 전공을 세우고 돌아올 때는 그에 따라 성대한 규모로 의식을 치렀다. 구체적인 접견 절차는 다음과 같다.

접견하는 날 오후에 관리들과 함께 장수들의 자리를 마련하고 위로연 의식을 마련했다. 그리고 국왕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글을 올리는 형식은 이미 영접 의식과 같다. 무엇보다 국왕을 접견하러 도성으로 들어오는 부 대의 군사들은 좌우 2부로 나누어 음악을 연주하고 개선가를 부르면서 힘차게 행진하여 궁궐의 정문 앞에 이르면 멈추었다.

왕이 원수를 접견하는 날 낮에 정자의 동편에 영접사ㆍ공ㆍ후ㆍ백의 좌석을 설치하고 서편에 원수와 부원수의 자리를 준비한다. 그리고 위로연에 참석하는 일이나 사례하는 표문을 전달하는 범절은 위에서 행한 의식과 같다. 원수는 소속 부대와 위병들을 지휘하여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개선가를 부르게 하고 부대를 좌우 2부로 나누어 차례로 대열을 짓고 우렁차게 주악하면서 행진하여 광화문(廣化門)에 이르렀을 때 주악을 멈춘다.

이때 궁궐의 호위병과 관리들이 대궐 안팎에 정렬하면, 장수가 군대의 막료를 인솔하고 대궐 뜰로 나간다. 그 후 강사포 차림의 국왕이 전정의 자리에 앉으면, 호위병들이 만세를 부르고 절을 한다. 먼저 추밀관 이하 관리들과 대신들이 절을 한 후 전정 위로 올라간다. 이어서 장수와 함께 군관들이 전정의 뜰에 나와 관등별로 선 후, 장수가 부월을 받들고 왕의 옥좌 오른편에 꿇어 앉아 왕에게 부월을 드리면 왕은 자리에서 내려와 받아 상장군에게 주면 장수가 뜰로 내려와 절을 한 후 대궐문 밖으로 나간다.

예정된 시각에 경위원들은 평소의 예와 같이 대궐 뜰에 정렬하고 추밀 이하 좌우 사신들도 대궐 뜰의 자리에 들어선다. 원수와 부원수가 각 군의 막료들을 인솔하고 대궐문 밖에 이를 때 합문은 원수와 부원수를 인도하여 차례로 대궐 뜰로 들어간다. 근신이 “외판(外辦)”이라고 아뢰면 왕은 강사포를 입고 나와서 전(殿)에 앉는다. 이때 경위원들은 만세를 부르고 두 번 절한다. 사인이 “추밀관 이하 시신들 평신(平身)”이라고 한다. 이것이 끝난 다음 합문은 대신들을 인도하여 자리에 들어서고 사인은 “대신들 재배”라고 한다.

이것이 끝나면 합문은 대신과 추밀관들을 인도하여 동·서편 층계에서 각각 전상에 올라 자리에 가 선다. 합문은 또한 각 군사(軍使), 부군사, 판관, 녹사, 모든 영(領)의 낭장(郞將) 이상 군관들을 인도하여 대궐 뜰로 들어가 관등별로 열을 지어 겹으로 선다. 합문은 원수를 인도하여 부월을 받들고 서편 층계에서부터 전상에 올라 왕좌의 오른편으로 가서 꿇어앉아 왕에게 부월을 드리면 왕은 좌석에서 내려서서 부월을 받아 상장군에게 준다. 이것이 끝난 다음 원수가 서편 층계에서 내려와 배위(拜位)에 가 서면 사인이 “원수 이하 재배”라고 한다. 그리고 합문은 그들을 인도하여 대궐문 밖으로 나간다.

갑옷을 입고 부월을 드리는 의식을 마친 장수는 대궐 밖으로 나가서 장교들과 함께 관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대궐의 뜰로 들어왔다. 이때 다시 장수 이하 군사들은 국왕에게 두 번 절하고 왕의 만복(萬福)을 빌며 귀환 의식을 성대히 베풀어 준 국왕에게 감사의 글을 올린다. 이런 절차가 끝나면 국왕의 측근에 있던 신하가 장수가 서 있는 뜰로 내려와 “난국을 평정한 공적을 가상히 여긴다.”고 치하하고 음식을 내려 준다. 이러한 절차가 끝나고 장수 이하 군사들이 서편으로 나가면 왕은 내전으로 들어가고 관리들이 차례대로 물러남으로써 모든 의식이 마무리된다.

원수와 부원수, 각 군사, 부군사, 판관, 녹사, 종사관들은 각각 관복을 입고 합문들이 원수 이하를 분담·인도하여 대궐 뜰로 들어가 북쪽을 향하여 겹으로 서면 사인이 “원수 이하 재배(再拜)”라고 한다. 그들은 재배 무도(舞蹈)하고, 또 재배한 후 왕의 만복을 빈다. 사인이 “원수 이하 재배”라고 한다. 원수는 재배하고 앞으로 나와 치사(致辭)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사인이 “원수 이하 군관 재배”라고 한다. 그들은 재배 무도하고 또 재배한다.

이것이 끝나면 근신이 왕의 분부를 받아 동쪽 층계에서부터 대궐 뜰로 내려와 원수의 동북편으로 가서 서쪽을 향하고 원수에 대하여 “그대들이 난국을 평정한 공적을 나는 가상히 여긴다.”라는 왕의 분부를 전하면 원수 이하는 재배 무도하고 또 재배한다. 합문이 음식을 준다는 왕의 분부를 전하면 사인은 “원수 이하 재배”라고 한다. 그들은 재배 무도하고 또 재배한다. 이것이 끝나면 합문은 원수 이하를 인도하여 서편으로 나가고 왕은 내전으로 들어가며 대신 추밀관, 좌우 시신들과 의장대원들도 차례로 물러간다.

국왕의 접견 의식에서는 출정할 때 국왕이 내려준 부월을 다시 받쳐 임무가 끝났음을 알렸다. 이에 장수 이하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연을 베풀어 줌으로써 귀환 의식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와 같이 회군 의식은 장수가 군사들을 이끌고 부월을 국왕에게 되돌려 드리는 복명 절차가 핵심을 이루었다. 특히, 국왕을 접견하는 날에 소속 부대와 위병들을 지휘하여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개가(凱歌)를 부르게 하고 부대를 좌우 2부로 나누어 차례로 대열을 짓고 우렁차게 주악하면서 행진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왕이 어전에서 원수 이하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면 회군 의식은 모두 마무리된다. 의식이 끝나면 왕은 자리를 옮겨 장수를 불러 접견하되, 이 자리에서 국왕은 전쟁의 경과와 함께 국경의 사정을 물었다.153)예종 2년(1107) 10월 임인일에 윤관(尹瓘)을 원수로 하고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여진(女眞)을 정벌하러 가게 되었는데 12월 초하루인 임오일에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좌정하고 윤관과 오연총은 3군(三軍, 1군은 5사(師) 1만 2,500명의 병력)의 장병들을 인솔하고 차례로 대궐 뜰로 들어가 왕에게 절을 하니 왕은 그에게 부월을 주어 보냈다. 3년 봄에 윤관 등이 여진을 평정하여 6성을 구축하였으며 공험진에 비(碑)를 세워 국경을 정한 후 그 해 4월 기축일에 윤관과 오연총이 개선하였는데 왕의 명령으로 풍악을 잡히고 군(軍), 위(衛)의 부대를 파견하여 그들을 맞이하고 대방후 용과 제안후 서를 시켜 동쪽 교외에서 위로연을 배설했다. 윤관 등이 경령전(景靈殿)으로 가서 복명(復命)하고 부월을 환납하니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좌정하고 윤관과 오연총을 전상에서 접견하고 국경 사정을 물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여진이 6성의 땅을 침범했으므로 4년 4월에 부원수 오연총에게 명령하여 다시 그들을 징벌하게 했다. 무인일에 오연총이 왕에게 고별하니 왕이 경령전에 나아가 친히 부월을 주어 보냈다. 이는 또 다른 전쟁을 대비하고 그 교훈을 새기는 과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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