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
  • 1. 관왕묘와 무신
  • 임진왜란과 관왕묘의 건립
  • 관왕묘에 대한 조선인의 태도
이욱

임진왜란 때 명나라 사람들이 세운 관왕묘를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1598년 남관왕묘의 낙성식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이 날 행사장에서 가장 어색했던 사람은 국왕이었다. 국왕은 이 자리에 오기 얼마 전까지도 사당에 모셔진 관우의 상 앞에 어떤 예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했다. 한 나라의 국왕이 타국의 사망한 장수에게 절을 해야 하는지, 손을 모아 예를 표하는 읍례(揖禮)로 끝내야 할지를 정하지 못했다. 또한 사당에 도착해 보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놀이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 중이라는 시기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엄숙해야 될 사당에 이러한 놀이판이 벌어지는 것을 국왕과 대신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국왕이 군사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이러한 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도 우스운 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이 끝까지 자리를 지킨 까닭은 이 나라를 돕기 위해 먼 곳에서 온 명군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리고 명 황제가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토록 할 정도로 정성을 쏟고 있는 이 의식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201)『선조실록』 권100, 선조 31년 5월 병신. 이렇게 마지못해 참석하였던 선조는 애초 경의만 보이고 나오려 했으나 결국 관우의 상에 재배(再拜)를 행하고, 잡희(雜희)까지 관람한 후에야 돌아왔다.

이것은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국왕과 대부분의 대신들은 명나라 장수들의 관우 신앙에 대해서 탐탁지 않았지만 원군으로 온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기에 그들의 요구에 마지못해 응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동관왕묘의 건립에서도 나타난다. 전쟁의 참화로 모두 지쳐있을 때 이 미 세운 것 외에 또 다른 곳에 거대한 관왕묘를 짓기 위해 민력을 동원하는 것을 좋게 여길 리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으로서는 명나라 황제가 자금을 제공하면서 직접 지시한 관왕묘의 건립을 거부할 수 없었다. 선조는 다만 풍수적인 관념에 의존하여 새로운 관왕묘를 동대문 밖에 세우려는 노력을 기울였을 뿐이며 명나라와의 신의를 강조하면서 동관왕묘의 건립을 끝내 성사시켰다.

이러한 남관왕묘와 동관왕묘의 건립에서 볼 수 있듯이 국왕을 비롯한 조선 사람들은 관왕묘를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 명과의 외교적 관계 속에서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 군사들이 조선을 빠져나가자 관왕묘는 참배자 하나 없이 관우만이 자리를 지키는 외로운 형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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