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
  • 1. 관왕묘와 무신
  • 조선 후기 관왕묘의 기능
  • 관왕묘의 공간적 기능
이욱

임진왜란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어 가면서 관우에 대한 신앙도 점차 잊혀져 갔다. 중국인 신자들을 잃은 두 곳의 관왕묘는 큰 덩치에 비해 썰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벽은 낙서로 채워졌고, 기물들은 파손되었다. 이러한 관왕묘에 다시 국가적으로 관심을 보낸 것은 1612년(광해군 4) 6월부터이다. 이때 동·남관왕묘를 조사하여 피폐된 곳을 수리하고, 관리 상황을 점검하였다. 그리고 둑제(纛祭)의 예에 따라 경칩일(驚蟄日)과 상강일(霜降日)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는 국가에서 처음으로 중국과 무관하게 관왕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국내의 관우 신앙을 보여 준다기보다 선조대와 마찬가지로 외교적 대응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국왕이 “관왕묘를 설치하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천조의 대관이 이미 창건하였으니, 우리로서는 반드시 그 신을 모독하는 데까 지 이를 것은 없을 듯하다.”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하여 국가 의례에 포함된 후에도 관왕묘에 크게 변화된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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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도의 남묘
도성도의 남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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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에 사람이 찾아드는 날은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였다. 관왕묘는 남별궁(南別宮), 태평관(太平館), 선무사(宣武祠), 양어사비각(楊御史碑閣)과 더불어 조선에 오는 중국 사신이 방문하는 의례적인 장소 중 하나였다. 명나라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 의사에 따라 만들어졌고 건물 양식도 중국식이었으므로 더욱 가보고 싶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중국에서 사신이 온다는 통보가 오면 관왕묘에서는 망가진 곳을 수리하고 청소한다고 분주해지고, 사신이 도착하면 숙소나 연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고나면 다시 문이 닫히고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되었다.202)『광해군일기』 권79, 광해군 6년 6월 계사. 이러한 사정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병자호란 때 동관왕묘는 청 태종이 거처했던 장소였기 때문에 청나라 사신들은 삼전도비(三田渡碑)와 이곳만은 어김없이 들리고자 하였다.203)심승구, 「조선 후기 무묘(武廟)의 창건과 향사(享祀)의 정치적 의미-관왕묘를 중심으로-」, 박한남 외, 『조선시대의 정치와 제도-조선시대 양반 사회와 문화 2-』, 집문당, 2003, 431쪽.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관왕묘는 점차 한양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곳으로 다가왔을 뿐 아니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조선 후기 관왕묘의 기능이 관우가 지닌 신이력(神異力)보다 관왕묘의 공간적 위치에서 비롯하였다는 점이다. 한양의 남관왕묘와 동관왕묘는 각각 남대문과 동대문 밖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두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동관왕묘의 경우 중국 측에서는 남대문 쪽에 세울 계획이었지만 선조의 적극적인 반대와 회유를 통해 동대문 밖 현재의 위치에 세워진 것이다. 선조가 관왕묘를 동쪽에 세우려 했던 것은 도 성 동편이 빈 듯하여 건물을 세우고 못을 파 지맥을 진압해야 좋다는 풍수가의 의견을 믿었기 때문이다.204)『선조실록』 권112, 선조 32년 4월 을유. 이렇게 남대문과 동대문에 하나씩 위치한 관왕묘는 한양을 떠나는 사람에겐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고, 한양을 향해 오는 사람에겐 도착을 알려주는 종착점이 되었다.

21일(계묘) 맑음. 새벽에 조반을 서둘러 먹고 남관왕묘에 들어가니 사인(舍人) 이명한(李明漢)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월사 상공(月沙相公)과 순천의 김지남(金止男) 영공(令公)이 잇따라 이르렀다. 종사관(從事官)이 또 뒤쫓아 와서, “상사(上使)는 벌써 날이 밝기 전에 떠났다.” 하였다. 사인소(舍人所)에서 경비를 내어 크게 기악(妓樂)을 연주하고 주연을 베풀어, 잔이 오고 가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취하였다. 연릉댁(延陵宅)에 들렀는데, 취하여 한 마디 말도 주고받지 못하고 바로 일어났다.205)강홍중(姜弘重), 『동사록(東槎錄)』, 8월 21일(계유) :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해행총재(海行摠載)』 Ⅲ, 163∼164쪽.

한강을 건너 관왕묘에 들어가서 세 사신이 관대(冠帶)를 고쳐 착용하고, 대궐에 나아가 복명(復命)하니, 대신 이하가 모두 사람을 보내어 위문하였다. 집에 돌아와 사당에 배알하고 어머님을 뵈었다.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였는데 다 무고하다.206)강홍중, 앞의 책, 3월 23일(신미) :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해행총재』 Ⅲ, 300쪽.

앞의 두 인용문은 1624년(인조 2) 8월 20일부터 다음해 3월 26일 사이에 통신사(通信使)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강홍중(姜弘重, 1577∼1642)의 일기 중 일부분이다. 그는 8월 20일 임금을 만나 하교와 하사품을 받고 물러난 후 집에 들러 사당에 고하고 모친께 인사를 드린 후 친척들의 작별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정(離亭)에 이르러 명공거경(名公巨卿)과 친분이 있는 사대부들로부터 전별회를 받았다. 그 다음날, 첫 번째 인용문과 같이 관왕묘에 들어가서 지인들과 송별회를 열었다. 기악을 울리고 주연을 베풀어 취할 정도로 마신 것을 보아선 성대한 송별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강을 두고 친구들과 이별하고 본격적인 사행길에 올랐다. 이후 7개월이 지 난 1625년(인조 3) 8월 23일에 강홍중은 다시 한강을 건넜다. 이번에도 관왕묘에 들어갔지만 환영식보다는 관복으로 고쳐 입고 대궐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위해서였다. 관왕묘에서 곧바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을 뵙고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음을 아뢰었다. 이렇게 복명하고 퇴궐하여 집에 돌아가 사당에 배알하고 모친께 인사를 드리고 친척을 만났다.

이와 같이 남관왕묘는 사신 행차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었다. 왕명을 받고 남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송별회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사신들이 한양에 도착하여 옷을 갈아입고 궁궐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렇다고 술잔을 기울이는 연회장이나 탈의실로만 사용된 것은 아닐 것이다. 바다를 건너 야만의 나라로 간다고 여겼던 당시 사신들의 심정은 전장을 향해 출정하는 군사에 비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긴장하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관왕묘는 앞으로 닥칠 긴 여정의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고 다시 이 자리에 오길 기원하는 장소였다.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한강을 건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사신들은 관왕묘를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귀향한 것을 감사하는 장소로 인식하였을 것이다.

한편, 관왕묘는 산 자를 위한 공간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지나쳐 가야 할 공간 중 하나였다. 국상(國喪)의 발인 때에는 상여가 지나가는 길에 있는 주요 장소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관례였는데 조선 후기 관왕묘도 이러한 장소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1659년(현종 즉위년)에 승하한 효종의 상여는 돈화문을 통과하여 현재의 동구릉에까지 갔다.207)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은 1659년 애초 건원릉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다가 1673년(현종 14)에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 근처로 옮겨진다. 이 여정 중에서 제사를 거행하였던 장소를 보면, 돈화문, 이석교(二石橋), 초석교(初石橋), 흥인문, 동관왕묘(別祭), 보제원(普濟院) 옛터 서쪽 노제소(路祭所), 안광동 대천(大川), 사을하리 대천, 석을곶(石乙串) 고개, 소송계중천교(小松溪中川橋), 대송계대천석교(大松溪大川石橋), 삼각산, 수락산, 태릉, 묘동(廟洞) 주정소(晝停所), 망오리현, 인장현 등이다. 이러한 장소는 특별히 노제(路祭)를 지내는 보제원 옛터 외에 상여가 통과하는 문(門), 다리, 산천에 발인의 사실을 아 뢰고 신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일을 마치려는 뜻에서 제사 지내는 대상이자 공간이었다. 문이나 다리와 같이 이쪽과 저쪽을 명확히 구별시키면서도 이어주는 인공 구조물과 산천과 같이 일정 공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신들에게 지내는 제사라 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관왕묘가 포함된 것은 현전하는 기록으로 볼 때 1632년(인조 10)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국상부터였다. 동관왕묘는 흥인문 밖, 노제가 열리는 보제원 터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망자의 영혼을 보내는 발인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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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조도(東門祖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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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쟁이 끝난 후 한양의 남·동관왕묘는 그 공간적 특성에 의해서 먼 길을 떠나는 여행자의 안녕을 비는 장소로 변모하고 있었다. 한양의 두 길목을 지키는 관우는 사신으로 외국에 가는 사람이든 되돌아올 수 없는 저승길을 가는 망자이든 나그네 된 자를 수호하는 노신(路神)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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