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
  • 1. 관왕묘와 무신
  • 관왕묘와 무묘
  • 관왕묘와 충의
이욱

1691년(숙종 17) 2월 숙종은 정릉에 행차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동관왕묘에 들렀다. 선조가 남관왕묘에 들렀을 때처럼 이때에도 국왕이 관우에게 어떤 예를 행할 것인가는 여전히 논란이 되었으며,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참관 자체를 반대하는 신하들도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관우의 충의(忠義)를 일찍부터 아름답게 여겼다며 반대를 물리치고 관왕묘에 들어가 관우에게 읍례(揖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숙종은 관왕묘의 참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아! 무안왕(武安王, 관우)의 충의는 참으로 천고(千古)에 드문 것이다. 이제 한번 들러서 유상(遺像)을 본 것은 참으로 세상에 드물게 서로 느끼는 뜻에서 나왔고, 또한 무사(武士)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니, 본디 한때의 즐거운 관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아, 너희 장사(將士)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본받아 충의를 더욱 힘써 왕실을 지키도록 하라.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또 동쪽과 남쪽의 관왕묘가 파손된 곳은 해당 관서로 하여금 한결같이 고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되, 제문(祭文) 가운데에 내가 멀리 생각하고 경탄하는 뜻을 갖추도록 하라.221)『숙종실록』 권23, 숙종 17년 2월 계미.

숙종은 자신이 관왕묘를 찾은 까닭을 관우의 충의를 높이고 장수들로 하여금 그의 충의를 본받아 왕실을 지키도록 하려는 데에 있다고 밝혔다. 숙종은 관우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충절의 이념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나아가 관왕묘를 건립한 뜻이 애초 이러한 데도 잡인들이 출입하고 행인들이 아 무렇게나 구경하여 훼손되었다고 수직관(守直官)들을 꾸짖고 관왕묘를 새롭게 정비하였다.222)『숙종실록』 권23, 숙종 17년 3월 경인. 또한 1692년(숙종 18)에는 관우를 경모하는 시 두 편을 지어 목판에 새겨 하나씩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걸어두도록 하였다.223)『숙종실록』 권24, 숙종 18년 9월 신유.

숙종의 관왕에 대한 존경은 1711년(숙종 37) 관왕묘에 대한 의식을 읍례에서 배례(拜禮)로 바꾼 것에서 잘 드러난다. 선조가 남관왕묘를 방문했을 때나 숙종이 관왕묘를 갔을 때에 늘 부딪히는 문제는 관우에 대한 국왕의 예를 어떻게 정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보다 한 해 전인 1710년(숙종 36)에 숙종이 관왕묘에 대한 예법을 정하려고 신하들에게 물었을 때 대신이나 유신들 모두 배례는 지나치고 읍례가 적당하다고 답하였다. 관우는 살았을 때에 다만 명장이었을 뿐이므로 선성(先聖)이나 선사(先師)와 다르며, 무안왕(武安王)이란 명칭은 사후 추존된 것이기 때문에 읍례로 예를 표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실록을 뒤져 선조가 행한 예를 찾도록 명하여 그에 따르기로 하였다. 이러한 숙종의 행동은 관우의 위상을 한층 높이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충의를 존숭하는 것이었다.

한편, 숙종 때의 관왕묘에 대한 관심은 지방 관왕묘에까지 이어졌다. 임진왜란 때 세운 성주, 안동, 고금도의 관왕묘는 한양의 것과 마찬가지로 명나라 군사들이 물러간 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특히, 유림들이 지방 세력의 중심을 차지하자 관왕묘에 대한 멸시는 더하였다. 안동의 경우 건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606년(선조 39)에 문묘와 마주보고 있다는 이유로 현재 있는 안동시 태화동인 서악(西岳)의 동대(東臺)로 옮겨졌으며, 고금도 관왕묘도 퇴락하여 뱃사람들이 간혹 뱃길의 안전을 위해 찾아올 뿐이었다.

그러나 한양 관왕묘에 다시 국왕의 발길이 닿으면서 지방 관왕묘 역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숙종은 1703년(숙종 29) 6월 남관왕묘를 둘러본 후 안동, 성주에 대한 현황을 조사하여 보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1710년(숙종 36)에 이이명(李頤命)이 고금도에 있는 관왕묘에 사액(賜額)을 요청하는 것을 계기로 이곳뿐 아니라 성주, 안동, 남원에 있는 관왕묘도 수리하고, 중앙에 서 향축을 보내고, 무관에게 제향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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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읍기도의 관왕묘
성주읍기도의 관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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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숙종이 관우를 높이고 국왕으로서 최대한의 예를 표명한 것은 관우의 충의를 높이 보았고 이를 신민들이 따르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의는 이전의 무성왕묘나 둑제의 둑기가 형상화하는 치우에서 찾기 어려운 요소였다. 치우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황제에게 대항할 정도로 용맹하였다. 그는 자신의 야욕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이었다. 한편, 무성왕 강태공은 문왕이 직접 그를 찾아올 정도로 지략과 덕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나 이후 문묘와 대비되는 역할을 볼 때 그는 장수보다도 사부(師傅)의 이미지에 가깝다. 숙종이 바라는 것은 강태공이나 제갈량처럼 전쟁을 승리로 인도할 지략가가 아니라 국왕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할 수 있는 신하였다. 전쟁이란 측면만 본다면 관우는 패전한 장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숭상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은 그의 충의 때문이었다. 숙종은 관우를 통해 충의를 높이고자 한 것이다.

숙종 이후에도 군왕들은 관왕묘를 통해 충절 의식을 고양시켰다. 영조는 즉위 후 곧 동관왕묘에 들리고 다음해엔 남관왕묘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여 ‘충의를 흠모’하는 뜻을 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삼년상을 마친 후 전천(箭川) 들에서 열무(閱武)하고 궁궐로 돌아오다 관왕묘에 들러 재배의 예를 거행하였다.224)『영조실록』 권11, 영조 3년 2월 기미. 영조는 재위하는 동안에 10회 이상 관왕묘에 들렀는데, 그 중에서도 1759년(영조 35) 11월에는 능행(陵幸) 후 관왕묘에 들러 갑주를 갖추고 군례(軍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국왕이 관왕묘에 친림했을 때 재배례를 하는 것을 『속대전』에 명문화하였다.225)심승구, 앞의 글, 441쪽. 정조 역시 관왕묘에 대해 높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영조 때 편찬된 『국조속오례의』에 소사(小祀)로 올려졌던 관왕묘는 정조에 의해 중사(中祀)로 격상되었으며, 정조는 관왕묘 제례의 악장을 직접 지어 제사 때 사용하도록 하였다.226)송지연, 「관왕묘 제례악 연구」, 소암 권오성 박사 화갑 기념 논문집 간행 위원회, 『소암 권오성 박사 화갑 기념 음악학 논총』, 2000, 401쪽. 또한 이에 앞서 정조는 관왕묘에 관한 숙종과 영조, 장조(사도세자)와 자신의 어제를 모아 비에 새겨 동·남관왕묘에 세웠다.

영조대와 정조대에는 관왕묘에 국왕의 행차가 매우 잦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행차는 경칩과 상강의 정기적인 제향에 맞추어 제사를 올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관왕묘의 행차는 국왕의 열무, 능행, 기우(祈雨) 등의 목적으로 국왕이 도성 밖으로 나갈 때나 돌아올 때 이루어졌다. 1727년(영조 3) 2월의 관왕묘 행차는 전천에서 열무한 후에 이루어졌으며, 1743년(영조 19) 8월 행차는 정릉에 봉심하고 사리평에서 열무한 후였고, 1759년(영조 35) 9월 행차는 의릉에 배알하고 역시 열무한 뒤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모습은 관왕묘의 참배가 관우의 충의를 높일 뿐 아니라 군사권의 확립과 이를 통한 왕권 강화를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점에서 동·남관왕묘의 공간적 위치는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 후기 궁궐을 벗어나 백성들과 접촉하려고 했던 국왕들에게 관왕묘는 출궁과 환궁의 거점이었다. 명나라에 의해서 건립되었고 중국 사신들의 영접 장소로 사용되었던 공간을 충의를 매개로 하여 국왕의 권위를 표상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장중한 어가 행렬 속에서 백성들을 만나 그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에게 백성의 군주임을 알리려고 했던 국왕들의 노력에 의해서 관왕묘는 조선시대 전례에서 소홀하였던 무묘의 기능을 대신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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