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
  • 2. 대보단과 전쟁의 기억
  • 대보단 건립 과정
  • 기억과 망각
이욱

임진왜란이 전국적이고도 장기적인 전쟁이었던 반면, 병자호란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끝났기 때문에 전쟁의 참상은 임진왜란에 비해 덜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형제지국(兄弟之國)에서 군신지국(君臣之國)으로 바꿀 것을 강요하는 청나라 측과 이를 모욕으로 여기고 거부하였던 조선의 관계에서 일어난 것처럼 다분히 명분적인 요소가 많았다. 당시 조선으로서는 ‘오랑캐’로 간주하였던 여진족을 임금의 나라로 섬길 수 없었고, 비록 세력이 약해졌지만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주었던 명나라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들에게 등을 돌리고 청나라에게 복속할 수는 더욱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존심과 의리를 지키기 위한 현실적인 힘은 미약하였기 때문에 1636년(인조 14) 12월 압록강을 건넌 13만여 청군의 위세에 조선은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한강의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끝난 병자호란은 국왕과 백성에게 무엇보다도 ‘굴욕 감’이란 상처를 남겼다.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그들의 조롱거리가 된 치욕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후회, 세자와 대신, 그리고 포로로 잡힌 수많은 사람들을 적국으로 보내야 하는 안타까움 등으로 증폭되어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울분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청나라는 삼전도 나루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는 5m가 넘는 화강암의 비석을 세워 황제의 공덕을 새겼지만 이를 바라보는 조선인들은 치욕과 분노를 가슴에 새길 수밖에 없었다. 중국 심양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효종이 노론의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전개하였던 북벌론(北伐論)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노와 수치의 감정이 세월의 변화와 무관하게 지속될 수는 없었다. 1644년 북경을 점령한 청나라가 중국의 주인으로 자리를 굳혔고, 명나라 잔존 세력의 명나라 회복 운동도 1662년 영명왕(永明王)이 죽음으로써 사실상 끝나버렸다. 조선에서도 북벌론을 외치던 효종이 죽은 후 복수의 가능성은 하나둘 사라지고, 세대가 바뀌면서 치욕의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 잊혀져 갔다. 명나라가 멸망한 지 만 60년이 되던 1704년(숙종 30) 정월에 숙종은 이러한 당시 상황을 말하고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있다.

저들의 풍속이 이미 물들어버린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객사(客使)가 올 때 길 양쪽에 서서 구경하기를 중화(中華)의 사신 보기와 똑같이 하고 있으니, 원통함을 품고 아픔을 참는 뜻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러 진실로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백성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227)『숙종실록』 권39, 숙종 30년 정월 경술.

인용문에서 ‘저들의 풍속’이란, 명나라가 멸망한 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 의관을 보고 어루만지며 탄식하였던 한족들이 이제 스스로 만주족의 풍속을 따르고 익숙해져 조선의 사신을 조롱하는 지경 에 이른 것을 가리킨다. 숙종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청나라 사신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변화된 시선을 지적하였다. 청나라 사신의 행차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눈빛 속엔 이전과 달리 분노와 증오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명나라 사신이 행차할 때와 마찬가지로 평소에 볼 수 없는 구경거리로 여기며 그들을 구경하기 위해 좁은 도로를 메웠다. 숙종은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며 백성들에게 지난 전쟁의 경험과 선조(先祖)가 지키려 했던 의리를 백성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방도를 묻고 있다.

이러한 숙종의 문제 제기는 망각 속으로 사라지려는 과거 역사를 다시 기억의 장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자연적 유대감이 사라진 마당에 사회적 기제를 통해서 신하와 백성들에게 역사적 경험을 재생시키고 공유하는 의식화의 방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숙종이 제기한 물음에 대해서 신하들은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였지만 대체로 뜻을 크게 세우고 인재를 등용하여 훗날의 계책을 세우자는 다소 추상적인 논의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대신들의 논의를 들은 후 숙종은 전혀 색다른 사업을 제시한다. 즉, 명나라의 신종(神宗) 황제를 위한 사당을 건립하자는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올린 말들은 내가 마땅히 체념하겠다. 그리고 나의 의견을 말하건대, 우리나라가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신종 황제의 힘인데,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을 갚을 길이 없어 안타까운 내 마음이 이 해에 더욱 간절하다. 양호(楊鎬)와 형개(刑玠)는 조선을 구원하러 온 장수임에도 그를 위한 사우(祠宇)가 있는데, 아직 신종 황제를 위해서 묘(廟)를 지은 일은 없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이 일찍이 이에 대한 의논을 제기하여 척화신(斥和臣) 세 사람을 그 묘정(廟庭)에 종향(從享)하려 했던 말이 삼학사전(三學士傳)에 있다. 이 일은 어떠한가?228)『숙종실록』 권39, 숙종 30년 정월 경술.

명나라 신종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주어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는데, 이러한 그의 결정을 조선 사람들은 ‘조선을 다시 살린 은혜(再造之恩)’라며 떠받들었다. 숙종은 이런 신종의 은혜를 상기시키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제사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앞서 백성들로 하여금 전쟁의 원통함을 잊지 않게 하려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숙종의 물음과 연관시킨다면 전쟁을 기억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신종 황제에 대한 제사를 거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논의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대보단(大報壇)이다. 애초 제의한 사당 건립이 제단의 건립으로 변하였지만 신종 황제를 위한 제향이란 목적은 이룰 수 있었다. 이름으로 보아 가장 크고 융성해야 할 제향이지만 청나라 권력하에서 명 황제를 모신 제단이므로 창덕궁 후원 서편의 외진 곳에 만들어졌고,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와 『춘관통고(春官通考)』와 같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의례집에도 그 이름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대보단은 조선 후기 사회의 주요 이념인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과 소중화 의식(小中華意識)을 가장 잘 표현한 상징이었다. 이러한 성격을 다시 확인하면서 나아가 대보단이 지닌 의례적 특징을 통해서 한 사회가 경험한 역사적 사실이 의례를 통해 어떻게 기억되고 재생되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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