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
  • 2. 대보단과 전쟁의 기억
  • 대보단 건립 과정
  • 대보단의 상징성
이욱

1704년(숙종 30) 정월 신종의 사당을 건립하자는 숙종의 제의에 대신들의 반응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전쟁에 대한 기억, 복수의 다짐, 명나라에 대한 보은 등 사당 건립의 명분에는 충분히 공감하였지만 이를 시행하는 데에는 몇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유교적 예법에서 볼 때 제후가 천자를 제사하는 것은 신분에 어긋난 잘못된 의식이라는 주장이다. 명나라의 황위를 계승한 천자도 아닐 뿐더러 명나라의 황실과 혈연적 관계도 없는 제후의 나라에서 명 황제를 제사하는 것은 신분에 따른 차등적 예 질서를 주장하는 유교에서 볼 때 분명 불합리한 것이었다. 둘째, 황제를 위한 사당을 건립할 경우 종묘와 위계적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229)『대보단사연설(大報壇事延說)』 奎3232 갑신년(1704) 정월 10일. 천자의 신위를 모시는 건물은 명분상 제후의 신위가 있는 현재의 종묘보다 격이 높아야 할 것이고, 제향의 규모도 종묘의 것보다 융성해야 할 것이므로 세세한 것마다 전례적인 문제를 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셋째, 명나라 황제의 사당을 건립한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질 경우 짊어져야 할 외교적 부담이었다. 청나라가 이 사실을 알고 사당을 없앨 것을 요구할 경우 오히려 더 난처하게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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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의 대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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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은 이러한 난점들을 제기하면서 사당 건립을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는 형식적인 것보다 실제적인 사업에 힘쓰는 것이 좋으며, 국가에서 사묘를 짓는 것보다 만동묘(萬東廟)230)1703년 권상하(權尙夏)가 그의 스승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충청도 화양동에 건립한 신종과 의종의 사당이다. 만동이란 용어는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온 것이다. 와 같이 민간에서 거행하는 신종 황제의 제사를 금지하지 않고 허가하는 것이 예법상이나 외교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숙종은 이 상황에서 결정을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러나 이날 숙종의 발의는 신종 황제에 대한 사당 건립을 공론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명나라가 멸망한 날인 3월 19일에 일회적이지만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제사 지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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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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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황제의 사묘 건립에 대한 논의가 재론된 것은 같은 해 4월 19일이었다. 숙종은 그동안 이 사안을 둘러싸고 논의된 것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다시 한번 펼쳤다. 그리고 이 제사의 의의를 내적으로는 ‘숭보(崇報)의 정성’에 두면서 외적으로는 중국 본토가 이미 명의 제사를 올리기에 부적합한 현실적 상황에서 찾았다. 즉, 현재 중국이 ‘오랑캐’의 오랜 집권으로 옛 중화의 모습을 잃어버려 명 황제를 제사 지낼 곳이 없으며 신종마저도 이를 거부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4월의 논의 이후 대보단 건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같은 해 9월에 이르러서다. 이때부터 신하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전환은 사당에서 제단의 건립으로 바뀐 것에서 비롯하였다. 사당을 제단으로 대체하자는 주장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여(李畬)로부터 나왔다. 그는 논의 초기부터 제기되었던 청과의 관계와 종묘와의 격식 문제를 다시 거론하면서 ‘제천(祭天)’과 ‘체제(禘祭)’의 형식에서 해결점을 찾았다.

천자에게 하늘이 높은 것은 제후에게 천자가 높은 것과 서로 같습니다. 그러므로 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예의로써 제후가 천자를 제사 지낸다면 조금이나마 본받을 것이 있습니다. 제단을 설치하고 땅을 청소한 후 제사 지내는 것이 제천의 의식이니, 이것은 너무나 공경스러운 대상인지라 어떠한 문식으로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소박하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왕으로서 지낼 중요한 제사 중에는 또 체제(禘祭)가 있는데, 시조(始祖)가 말미암은 근원을 찾아 제사하는 것입니다. 이 체제는 평소에 묘우를 세우거나 신주(神主)를 설치하지 않고, 제사 지낼 때 신패(神牌)를 설치하였다가 제사를 마치면 이를 불에 태우니, 『대명회전(大明會典)』에서 그 의식(儀式)을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231)『숙종실록』 권40, 숙종 30년 9월 계축.

인용문에서 ‘제천’과 ‘체제’의 의례가 등장한다. 제후에게 천자는 마치 하늘과 같은 존재이므로 천자에 대한 제사를 하늘에 대한 제사의 의식으로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늘에 대한 제사는 ‘둥근 언덕’이란 뜻을 지닌 ‘원구단(圓丘壇)’에 신위를 모시고 거행하는 것이므로 사당과는 다른 형태의 제사 공간이다. 사당은 사방의 벽과 지붕으로 구성된 폐쇄적 공간으로 제향의 장소일 뿐 아니라 신위를 보관하는 집과 같은 장소이다. 반면, 단이란 네모난 모양이든 둥근 모양이든 땅을 돋운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벽이나 지붕이 존재하지 않는 개방된 곳이다. 이러한 단에는 제사할 때 신위를 모셔 오지만 제사가 끝나면 신위는 별도의 장소에 모셔 둔다. 조선시대 사직단의 경우 단 옆에 신실(神室)을 만들어 신위를 보관하였으며, 이렇게 독립된 신실이 없는 경우엔 봉상시(奉常寺)에 마련된 신실에 신위를 모셔 두었다가 제향 때에 단으로 옮겨 왔다. 그러므로 단은 항상 신이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제향이 벌어질 때만 강림하는 임시 장소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여가 신종을 위한 사당을 제단으로 변경시키고자 한 것은 사당이 지닌 상존성(常存性)을 탈락시키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체제는 천자가 시조의 사당에서 시조의 연원이 되는 제왕(帝王)에게 지내는 제사를 가리킨다.232)『예기』 「대전(大傳)」, “禮不王不禘 王者禘其祖之所自出以其祖配之.” 고대에 순(舜)임금과 우(禹)임금의 시조는 고양(高陽)이었는데 그 세계(世系)가 황제(黃帝)에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황제를 주향(主享), 고양을 배향(配享)으로 모시고 체제를 지냈다. 상(商)나라의 시조 설(契)은 제곡(帝嚳)에서 비롯하였다고 하여 상나라에서는 제곡에게 체제를 지냈다. 주나라의 시조 문왕 역시 제곡에서 나왔다고 하여 주나라 사람들도 제곡에게 체제를 지냈으며 문왕을 배향하였다.233)『예기』 「제법」, “有虞氏禘黃帝 夏后氏亦禘黃帝 殷人禘嚳 周人禘嚳.”

그러나 한대(漢代) 이후 시조의 근원을 찾는 것은 실제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체제는 제대로 거행되지 못하였다. 이여가 대보단의 건립에서 이 체제를 내세운 까닭은 체제의 설행이 아니라 『대명집례(大明集禮)』에 실린 체제의 형식이었다. 명대의 경우 시조의 근원을 상징하는 제왕의 신위를 별도로 준비해 두지 않고, 제사를 거행할 때 ‘황초조제신위(皇初祖帝神位)’라 쓴 지방(紙榜)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234)『대명회전(大明會典)』 권87, 체제(禘祭) 이여는 이러한 체제를 본받아 황제의 신위를 만들지 말고 제사 당일에 임시로 쓴 지방을 사용하여 제사를 지내자고 주장하였다.

<표> 1704년(숙종 30)의 대보단 건립 과정
일  시 내    용
1월 10일 숙종이 신종 황제의 묘 건립 제의
1월 22일 관학 유생 160여 명이 신종 황제의 묘 건립 청원
2월 28일 사학 유생이 화양동에 황조를 위한 묘 건립 청원
3월 6일 사직 유성운이 명 의종 황제 제사 건의
3월 7일 명 패망일에 의종 황제 제향에 대한 논의
3월 19일 금원(禁苑)에서 의종 황제 제사
4월 10일 신종 황제 묘 건립을 해당 관서에서 의논하라고 지시
9월 16일
 
신종 황제 묘 건립에 대한 재논의
단(壇)의 형식으로 결정
9월 30일 예조 참판 김진규가 담당
10월 3일
 
단의 장소를 별영대터로 정함
역사 시작
10월 14일 설단절목(設壇節目) 마련
11월 7일 김진규 피혐, 민진후 담당
11월 25일 단의 이름을 ‘대보’로 정함
12월 21일 대보단 준공

결국 제천의 제단과 체제의 지방 형식에서 본받아 신종 황제를 제사 지내고자 한 것은 신종 황제의 구체적인 상징물을 상설화하지 않으려는 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위가 있으면 사당이나 신실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제사가 끝나고 불태워지는 지방은 별도의 보관 장소가 없어도 무방하다. 오직 제단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므로 청나라로부터의 혐의나 종묘와의 차별화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렇게 신종 황제의 제사는 사묘의 건립에서 제단의 설립으로 전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같은 해 9월 30일 에 예조 참판 김진규(金鎭圭)가 공사를 담당하여 10월 3일에 옛 별영대(別營隊)가 있었던 자리에 터를 잡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11월 7일에 다시 민진후(閔鎭厚)가 이를 담당하여 부분적인 수정을 가하여 12월 21일에 마침내 대보단이 준공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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