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
  • 2. 대보단과 전쟁의 기억
  • 전쟁의 기념
  • 전쟁의 기념
이욱

대보단의 건립은 애초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신종의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면에는 병자호란의 주범인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자존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하지만 궁궐 내의 은밀한 곳에서 국왕과 대신 그리고 관원들만 거행하는 숨은 행사였다. 애초 사당을 건립하려고 했지만 청의 방해를 받을 것을 걱정하여 단으로 대신하였고,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 궁궐의 북서쪽 후미진 곳에 단을 세웠다. 숙종이 신종의 제사를 거론한 애초 목적이 백성에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쟁을 기억하고 청나라에 대한 복수의 감정을 키우기 위한 의식화였음을 생각할 때 이런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제향의 효과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에 대한 해답을 영조대 대보단 제향에 참가하는 구성원의 변화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영조대에 이르러 대보단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1749년(영조 25) 명나라 태조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대보단에 모신 일이다. 이러한 제사 대상의 변화로 대보단은 이제 단순히 임진왜란의 원병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명나라의 계승자라는 의식을 고양시키는 곳으로 바뀌어갔다. 이와 함께 매년 3월의 정기 제사를 제외하고 세 황제의 기일과 즉위일에 거행하는 망배례(望拜禮)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제례와 망배례에 참여하는 구성원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를 위해서 잠시 국가 제사를 진행하는 구성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가 제사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헌관(獻官), 집사(執事), 배향(配享)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 중에서 헌관이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으며, 집사자들은 이들의 행동거지를 도와주는 실무자들이다. 헌관과 집사자들의 품계와 숫자는 법식으로 정해져 있으며 해당 제사가 있을 때마다 관리 중에서 선택하였다. 그런데 대보단의 제향을 국왕 친제로 거행할 경우 초·아·종헌 모두를 국왕이 담당하였다.

한편, 배향인은 제사의 참가자들이라 할 수 있다. 제향의 실제적인 절차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후면에서 자리를 지키며 제사에 수동적으로 참가하는 자들이다. 특히, 종묘나 궁궐에 제사 공간이 형성되어 일반인들의 관람이 불가한 제향일 경우 이들은 단이나 사당에서 움직이는 헌관들의 모습들을 구경하는 관람자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동성은 헌관이나 집사자들과 비교한 상대적 지위일 뿐 당대 사회적 위치에서 본다면 제향의 공간에 들어와 참가하는 자체가 매우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받는 것이다. 대보단 제향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배향인의 구성이다.

『황단의』의 향례도(享禮圖)를 보면 헌관과 집사자들의 자리는 낮은 담장(壝) 안에 있다. 제사의 주요 절차는 이들 헌관과 집사자들이 진행하는 것이므로 작은 담은 마치 공연장에서의 무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낮은 담장 바깥에는 헌가(軒架)와 문무생(文舞生)·무무생(武舞生)이 있고, 그 바깥쪽에 문무관(文武官)과 종친(宗親)으로 구성된 배향인의 자리가 있다. 대보단은 이 향례도에 나오는 헌관인 국왕, 국왕을 돕는 집사자, 참관하는 배향인들이 모여 신종의 은혜를 기리고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기억하고 복수심을 고취시키는 제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영조대에 이르면 대보단 배향인에 종실과 관리 외에 다른 구성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배향인으로 나타난 사람들은 명나라 유민의 후손과 병자호란 때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충절인의 후손이었다. 1756년(영조 32) 1월 14일에 영조는 세 황제의 기신일 새벽에는 임금이 반드 시 재계하고 명나라 후손과 병자호란 때 절개를 지킨 여러 신하들의 자손들을 이끌고 정전(正殿)에 나아가 망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244)『영조실록』 권87, 영조 32년 1월 임오. 다음해인 1757년(영조 33) 망배례에는 충렬사에서 제향하는 14명과 현절사에서 제향하는 5명의 후손을 특별히 불러 예식에 참예시켰다. 마침내 1762년(영조 38) 1월에는 망배례가 아니라 황단 친제 때에 삼학사(三學士, 홍익한·윤집·오달제)와 오충신(五忠臣, 신익성·신익전·이명한·이경여·허계) 자손으로 관직에 있는 자들을 모두 제향에 참관시켜 왕명을 위하고 충절을 장려하는 뜻을 그들에게 보이고자 하였다.245)『영조실록』 권99, 영조 38년 1월 갑자.

이렇게 황단 제향과 망배례에 명나라의 후손과 충절인의 후손을 참예시키는 일은 정조대에 더욱 확대되었다. 1787년(정조 11) 2월에는 송시열의 자손을, 1792년(정조 16) 7월 25일에는 이순신과 임경업의 후손을 참예시켰다. 그리고 1796년(정조 20) 3월 2일에 오면 대보단 제향에서 명나라 유민의 후손과 충신의 자손을 관리들 뒤에 세우는 것은 전조(前朝)의 후손을 대우하는 예의가 아니라고 하여, 명나라 후예들은 헌가의 서쪽에, 본조 충신의 자손은 헌가 동쪽에 정렬할 것을 명하였다.246)『정조실록』 권44, 정조 20년 3월 무신. 이때에 참예한 배향제신의 수가 156명에 달하였다. 이후 1800년(정조 24)에 참석한 배향인은 239명이나 되었으므로 상당히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247)김문식, 「조선 후기 경봉각(敬奉閣)에 대하여」, 『서지학보』 28, 2005, 189쪽.

이러한 사정을 볼 때 대보단에서의 제사는 점차로 은밀한 곳에서 비밀리에 지내는 행사라기보다 공개된 기념식과 비슷하게 치러진 것을 알 수 있다. 나라에서는 계속하여 명나라 자손과 본국의 충절인 후손을 찾았으며, 이들을 제향 및 망배례에 참예시키고 의례가 끝난 후에는 별시(別試)를 거행하여 관리로 발탁하였다.

대보단 제향이 있은 후 관례로 되다시피 한 또 하나의 일은 선무사, 무열사, 충렬사, 현절사 등 명나라 장수와 본국 충절인을 모신 사당에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었다. 선무사는 명나라 장수로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왔던 병부 상서 형개(邢玠)와 경리도어사(經理都御使) 양호(楊鎬)를 모신 사당으로 남대문 안쪽 태평관 서쪽에 있었다.248)선무사는 1598년(선조 31)에 병부 상서 형개를 제사 지내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1604년(선조 37) 7월에 경리 양호를 배향하였다.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는 소사(小祀)로 구분되어 있다. 이 선무사 제향일은 매년 춘추(春秋) 중월(仲月)이었지만 대보단을 만든 후 황제의 제사보다 앞서는 것이 미안하다고 하여 3월 상순(上旬) 후에 지내도록 하였다.249)『숙종실록』 권53, 숙종 39년 3월 무진과 계미. 이러한 논의와 더불어 제향의 횟수 역시 문제가 되었다. 대보단은 연 1회인데 선무사는 연 2회로 존비의 차이에 어긋난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보단은 제천 의례를 모방하여 1년에 한 번 지내는 것이므로 선무사와 비교할 수 없다는 중론에 의해 선무사 제사를 춘추로 지내는 것은 유지가 되었다. 한편, 영조 때 편찬된 『국조속오례의』에는 “계춘(季春) 계추(季秋) 중정(中丁)”으로 날짜가 정해져 있다. 무열사도 임진왜란 때 조선에 왔던 명나라 장수인 상서(尙書) 석성(石星),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총병(摠兵) 이여백(李如栢), 장세작(張世爵), 양원(楊元)을 모신 사당으로 평양성 서문 안쪽에 있었다. 무열사 역시 선무사의 예에 따라 봄 제사를 대보단 제향일 뒤로 돌리고 있다.250)『숙종실록』 권54, 숙종 39년 9월 병진. 이처럼 대보단은 제향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조선에 왔던 장수와 전쟁 때 충절을 지켰던 조선인들을 차례로 제사 지냄으로써 지난 전쟁의 아픔과 충절을 되새기는 장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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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대지도의 남대문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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