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
  • 3. 전몰처와 여제
  • 군인의 죽음과 국가의 대응
  • 임진왜란 때 전몰자에 대한 제사
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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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관문의 제3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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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4월 13일에 부산포를 통해 침략한 왜적은 동래산성을 점령한 후 파죽지세로 북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천연적 요새인 조령을 쉽게 내어주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신립(申砬)의 군대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놀라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 조정은 그들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사자들을 찾아 제사를 지내줄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1593년(선조 26) 정월 명군의 도움으로 평양성을 수복하고 전세가 점차 역전되어 감에 따라 한숨을 돌리면서 전사 자에 관심을 보였다. 그 달 10일에 사헌부에서는 먼저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죽은 명나라 군사들을 위해 제사 지내고 군정(軍情)을 위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30일에 선조는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사망한 중국군은 이미 치제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사망자도 평소 여제의 예에 의하여 한 곳에다 단을 쌓고 글을 지어 사제함으로써 넋을 위로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256)『선조실록』 권34, 선조 26년 1월 을유.

인용문에 나오는 여제는 ‘무사귀신(無祀鬼神)’이라 불리는 ‘여귀(厲鬼)’에 대한 제사를 가리킨다. 이 제사는 공덕에 대하여 보답하는 일반적인 국가 제사와 좀 다른 위령제의 일종이었다. 여귀는 강포(强暴)한 귀신이란 뜻으로 산 사람에게 나타나 해를 끼치는 귀신을 가리킨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이 강포함을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불의의 사고로 일찍 죽은 원통함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의 수명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죽는 경우는 허다하겠지만 당시 여제에서는 ‘칼에 맞아 죽은 자’, ‘수화(水火)나 도적을 만나 죽은 자’, ‘얼고 굶주려 죽은 자’, ‘전투에 죽은 자’ 등으로 쓴 15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257)여제의 정기 제사는 여단에 성황신을 주신으로 모시고 그 아래 ‘칼에 맞아 죽은 자’, ‘수화(水火)나 도적을 만나 죽은 자’, ‘남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핍박당해 죽은 자’, ‘남에게 처첩을 강탈당하고 죽은 자’, ‘형화(刑禍)를 만나 억울하게 죽은 자’, ‘천재나 역질을 만나 죽은 자’, ‘맹수와 독충의 해를 당해 죽은 자’, ‘얼고 굶주려 죽은 자’, ‘전투에서 죽은 자’, ‘위급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은 자’, ‘담이 무너져 압사한 자’, ‘난산으로 죽은 자’, ‘벼락 맞아 죽은 자’, ‘추락하여 죽은 자’, ‘죽은 뒤 후손이 없는 자’ 등으로 쓴 신위를 좌우로 나누어 진설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죽음을 맞이한 귀신들은 그 억울함 때문에 편히 잠들지 못하고 시신이 머문 곳을 맴돌며 세상에 출몰하여 산 자에게 빌붙어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이들이 일으키는 해악은 산 자에게 질병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몸의 질병은 육체적 상태와 외부 바이러스의 관계로 인해 발생할 뿐 아니라 그와 연관이 있는 죽은 자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제는 억울한 죽음에 대한 측은한 마음과 그들이 부릴 행포에 대한 불안감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제가 국가 제사에 편입된 것은 태종 때 권근(權近)의 건의에 의해서였다. 이 여제는 대개 청명, 7월 15일, 11월 1일, 즉 일 년에 세 번 지내 는 정기적인 제사다. 여제를 지내는 곳을 여단(厲壇)이라고 하였다. 한양에는 도성 밖 북쪽에 여단이 있었으며, 부(府)·주(州)·군(郡)의 지방에도 여단을 설치하여 각 지역의 원혼들을 정기적으로 위로하여 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평양성 전투가 끝나고 국가에서는 전몰자들을 위해서 이러한 여제의 형식을 본받아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몰자들을 위한 치제는 정기적인 것이 아니라 일회적인 행사였을 뿐이었다. 여제의 제삿날인 청명이나 7월 15일, 그리고 11월 1일에 제사를 지낸 것도 아니며 평양성 전투가 있었던 그 날에 정기적으로 지낼 것을 법으로 만들지 않았다. 공무로 사망한 군인에 대한 제사의 규정과 마찬가지로 전몰처에서의 제사는 전투가 끝난 후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구휼적 행사였다.

그런데 전몰자를 위한 제사 중에서 일시적인 행사가 아니라 정기적인 제향으로 변모한 사례로 평양, 벽제, 울산, 한양, 개성 등의 민충단(愍忠壇)과 진주의 정충단(旌忠壇)이 있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왔다 죽은 명나라 병사들을 위해 만든 민충단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

1592년 4월 왜군의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에 명나라가 개입한 것은 전쟁이 발발한 후 2개월이 지나서였다. 의주까지 피난을 간 조정은 일부 반대도 있었지만 명나라의 원조에 실낱 같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침입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과 변경의 혼란 때문에 섣불리 원병을 출병시키지 못하다가 6월 평양성이 함락된 후인 7월에 요동의 군사를 원병으로 보냈다.

그러나 총병 양소훈(楊紹勳)이 이끌었던 요동병은 왜병을 깔보다가 평양성에서 패전하고 물러났으며, 다시 5개월 후인 12월에야 이여송(李如松)을 대장으로 한 중앙의 원병이 도착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조·명 연합군은 1593년 1월에 평양성을 수복하고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 왜군을 축출하 였다. 그러나 한양을 앞에 두고 벽제관(碧蹄館) 여석령(礪石嶺) 전투에서 이여송은 기병 1,000명으로 급히 적병을 추격하였다가 매복하고 있던 왜군에게 대패하게 된다. 이후 명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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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탈환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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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탈환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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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조선에 왔던 명군은 숫자와 위세만 믿고 섣불리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여러 차례 패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593년에 요동도지휘사가 왜적을 정벌하다 전사한 관군을 위해 평양, 개성, 벽제, 한양에 단을 쌓고 원혼을 달랠 것을 명 황제에게 건의하여 허락을 받는다. 당시 건의한 주본(奏本)의 내용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살피건대, 각 부·주·현에 여단을 두어 해마다 봄가을로 제사하여 가난 하고 외로운 유혼(幽魂)을 위안하고 있습니다. 이제 평양·개성·벽제·왕경(王京)의 진중에서 싸우다 죽었거나 앓아 죽은 관군의 뼈가 구덩이에 버려지고 고육(膏肉)이 초야에 매흙질되어 유천(幽泉)에서 울부짖고 이역(異域)에서 원통해 하는 것은 제 고장에서 굶주려 죽은 것보다 더욱 민망합니다. 암담한 비와 스산한 바람 속에 그 누가 보리밥 한 덩이나마 던져 주겠습니까. 평양·개성·벽제·왕경 지방에 각각 단장(壇場)을 설치하고 본도사(本都司)의 당상관(堂上官) 1원(員)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뒤로 해마다 관은(官銀)을 주어 향촉(香燭)·저양(猪羊)·주과(酒果)를 장만하여 그 나라에서 공물을 바치러 온 관원에게 건네주어 가져가 제사하게 한다면 굳이 해마다 관원을 보내어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성재(聖裁)를 바랍니다. 단장의 명액(名額)은 아울러 황상께서 정하시 기 바랍니다. 또 신들이 한림원(翰林院)에 통지하여 제문을 지어서 시행하기를 청합니다.258)『선조실록』 권45, 선조 26년 윤11월 경자.

앞의 인용문에서도 전몰자에 대한 제사의 기본적 형태를 여제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본국이 아닌 이국땅에서 변을 당한 이들은 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찾는 이도 없어 제사도 제대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염려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곳에 별도의 제단을 만들어 명호를 내리고, 조선의 관원을 통해 해마다 제사를 지내게 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명 황제는 이를 허락하여 제단의 이름을 ‘민충단’이라 명하였는데 11월 20일 요동지휘사는 이 사실을 우리 조정에 알리고 평양·개성·벽제·한양 네 곳의 전투지에 단을 쌓고 민충단이라고 이름하고 ‘대명정동진망관군지위(大明征東陣亡官軍之位)’라는 위패를 설치할 것을 통지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조정에서는 해당 싸움터 근처에 간략하게 땅을 닦고 나무를 세워 ‘칙사민충단(勅使愍忠壇)’이라 쓰고 죽은 명군을 제사 지내어 위로하였다. 한양의 민충단은 도성 서쪽 홍제원 곁에 있었고, 평양은 을밀대 북쪽에 단을 세웠다고 한다.259)개성부와 벽제역에 세워진 민충단의 사적 및 위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증보문헌비고』 권63, 부록 민충단 참조). 명나라는 이 제사에 관심을 보이고 세세하게 조선 정부에 지시하였는데, 1595년 2월 1일에는 명나라 관원이 와서 민충단에 치제하고 제사 의주(儀註)를 만들어 제시하며 이에 따라 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제사는 원래 봄가을 두 계절에 설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실제 평양성에서 죽은 명군의 수효는 1,000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들의 수많은 시체는 전쟁이 끝난 후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고 모아 불에 태우거나 구덩이를 파 수십 명씩 함께 묻었다. 이역만리 타국의 전쟁에 와서 죽은 이 사람들을 위해 조선 정부는 민충단이 건립되기 이전에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리고 한양을 수복한 후에는 벽제관에서 죽은 명군을 위해 다시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치제가 전몰 용사를 위한 일회적인 행사였던 반면에 민충단은 이들을 위한 정기적인 제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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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도
진주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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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들을 위해 단을 세우고 합동 제사를 지내준 예는 비단 명나라 군사에만 해당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료는 비록 미약하지만 이와 비슷한 예를 진주성에 만든 정충단에서 찾아볼 수 있다. 1592년 10월에 있었던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조선이 육상에서 처음 왜군을 이긴 싸움 이었다. 3천의 군사로 3만의 적군을 물리친 이 전투는 행주 대첩,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에 들어갈 정도로 매우 큰 승리였다. 그러나 이 승리로 인해 진주성은 왜군의 표적이 되었으며 결국 다음해 이곳에서 대규모의 전투가 다시 발생하였는데 이를 제2차 진주성 전투라 하였다. 주력 부대 3만 7천여 명을 포함한 총 9만여 명의 왜군이 투입된 이 전투는 결국 조선의 패배로 끝났다. 전투 11일째 되는 날 성벽이 무너지자 물밀 듯이 들어온 왜군은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성 안에 남은 군사와 백성들을 남김없이 죽여 그 수가 6만에 이르렀다. 왜군은 백성들에게 사창(社倉)의 큰 창고에 피하면 죽음을 면할 것이라 거짓말을 퍼뜨려 사람들을 모은 후 한꺼번에 불태워 죽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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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의 정충단
진주성의 정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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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이 함락된 지 보름이 지난 후에야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7월 21일에 전몰자를 애통하는 교서를 내렸다. 다음달 8월 7일에 전몰자 중에서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이종인(李宗仁), 김준민(金俊民), 장윤(張潤) 등 6명을 증직하고 다음날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6명을 제외한 사람에 대한 논공행상과 가족에 대한 구휼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260)『선조실록』 권41, 선조 26년 8월 병술 ; 『선조실록』 권41, 선조 26년 8월 7일 무자. 진주성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6명의 포증 및 치제와 더불어 나머지 사람들의 논공에 대한 구별이 끝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진주성에서 죽은 사람들을 함께 제사 지내는 합동 제사를 거행하였다.261)『선조실록』 권41, 선조 26년 8월 기축. 그리고 방치된 시신들을 수습하여 한 곳에 매장을 하였는데 시체가 산처럼 쌓여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시작된 진주성 전몰자에 대한 제사는 언제부터인가 정충단이 란 이름의 단호(壇號)를 갖추고 성이 함락된 6월 29일에 지내는 정기 제사로 바뀌었다.262)『진양지(晉陽誌)』 (서울대 규장각 소장, 고4790-17), 단묘(壇廟), 창렬사(彰烈祠 :『조선시대 사찬 읍지』 22, 1989, 325쪽. 그러나 이 제향은 전쟁 후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제대로 거행되지 못하고 제단도 허물어진 채 방치되었다. 진주성의 제향 공간은 1607년(선조 40) 6월 이곳에 순찰사로 왔던 정사호(鄭賜湖)가 새롭게 정비하였다. 진주성이 함락된 날인 6월 29일에 그곳에 유숙하였던 정사호는 새벽에 성 아래에서 곡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나라에서 만든 정충단은 흙이 채워지지 않았고, 상석은 잡초에 파묻혀진 상태이지만 이곳에서 죽은 군민의 가족들이 성의 함락일이자 가족의 기일을 맞이하여 성 아래 모여 슬피 울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정사호는 성의 북서쪽 모퉁이에 3칸의 건물을 짓고, 김천일·황진·최경회의 위패를 건물 안에 모셨다. 그리고 사당 밖에 상·중·하의 3단을 쌓아, 상단에는 각 진(陣)의 의병장, 중단에는 제장 편장(諸將編將), 하단에는 각진 군병(各陣軍兵)을 모셨다.

임진왜란 때 죽은 군인과 백성들은 비단 평양과 진주에 한정되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제사를 지내 위로하고 유족에게 부역을 면제해 주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들을 구휼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제사가 일시적인 조문과 위로에서 정기적인 제향으로 바뀐 경우는 많지 않았다. 민충단은 조선의 의도보다 명나라의 일방적인 통고와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충단은 임진왜란 중에 세운 단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방치된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정사호가 정충단을 다시 정비하는 것과 비슷하게 조선 관민을 위한 사당이나 제단은 중앙 정부보다 지역 사족 또는 지방관의 노력으로 만들어지고 중앙에서는 사당이나 단의 이름을 내려주는 것이 관례화된다. 그러나 이 경우 전몰자에 대한 제사보다 왜구를 물리치는 데에 공이 크거나 충절의 모범을 보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와 달리 전몰자에 대한 제사는 정기적인 제향이 아니라 재난이 발생하였을 때에 거행하는 기양의례(祈禳儀禮)의 형식을 띠고 나타났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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