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
  • 3. 전몰처와 여제
  • 조선 후기 전몰처의 여제
  • 조선 후기 전염병의 공포
이욱

임진왜란의 여파와 함께 시작한 17세기는 병자호란에 의해 다시 전쟁과 치욕, 그리고 수탈의 긴 터널을 지나야 했다. 그러나 두 번의 전쟁으로 17세기의 고통이 끝나지는 않았다. 17세기 후반은 전후의 어느 시기보다 많은 재난 속에서 기근과 질병의 아픔을 맛보았다. 천체의 변이와 기후 변화, 특히 이상적인 저온 현상으로 인해 잇따라 발생한 기근과 허약해진 몸에 가해지는 역병은 전쟁보다 더 비참하였고, 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다.263)『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충재(蟲災)와 질역(疫疾)의 발생 빈도를 50년 단위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역질 순위
1392∼1450 18
1451∼1500 9  
1501∼1550 81
1551∼1600 9  
1601∼1650 50
1651∼1700 290
1701∼1750 69
1751∼1800 4  
1801∼1863 2  
합 계 532  
(이태진, 「소빙기(1500∼1750)의 천체 현상적 원인」, 『국사관논총』 72, 1996, 110쪽 참조).

이 시기 재난 발생은 빈도뿐만 아니라 범위 면에서도 이전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전염병의 경우만 보더라도 조선 전기에 국지적으로 발생하였던 것이 이 시기에는 전국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한성부뿐만 아니라 궁궐까지 역질 발생 가능 지역이 될 정도로 위태로웠다.

17세기 재난의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로 1670년(현종 11)과 1671년(현종 12) 두 해를 들 수 있다. 이상한 천체 현상에 연이은 기온 저하로 한발·홍수·풍해·여역·황충해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재난이 닥쳤으며, 이에 따른 기근과 질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1671년 한 해 동안 『조선왕조실록』에 보고된 사망자 수는 88,150명이었으나 실제 사망한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아 거의 백만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264)『현종개수실록』 권25, 현종 12년 12월 임오.

새삼스럽게 이러한 재난을 언급하는 까닭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재난이 이전의 전쟁을 기억나게 만드는 기제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재난과 전쟁의 연관성은 여역(厲疫)이라고 부르던 급성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에서 잘 드러나고 있었다.265)조선시대 전염병에 대한 명칭은 ‘역(疫)’, ‘역병(疫病)’, ‘역려(疫癘)’, ‘여역(厲疫)’, ‘당독역(唐毒疫)’, ‘염병(染病)’, ‘시기병(時氣病)’, ‘온역(瘟疫)’ 등 매우 다양하였다. 그 중 ‘역’ 또는 ‘역병’은 특정 질환이라기보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집단으로 앓고 있는 열병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신동원,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몸과 의학의 한국사-』, 역사비평사, 2004, 44∼45쪽). 그리고 이러한 기억에는 제사나 기념식에서 볼 수 있는 시간적 상징성보다 전몰처라는 공간적 상징과 현재적 아픔과 전쟁의 비극이 조응하면서 만들어내는 기억이라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조선시대에 여역이 발생하면 국가에서는 다양한 의료 대책 외에도 여 제를 거행하였다. 여제는 비명횡사한 원혼이 일으키는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서 지내는 일종의 위령제다. 그런데 이 원혼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일으키는 재앙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역병과 같은 전염병이었다. 당시에 여역은 사방에 만연한 사특한 기운(惡氣·毒癘)에 의해 발생한다고 믿었는데, 이 사특한 기운을 죽은 사람의 원한과 연결시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역이 발생하면 이러한 원혼들을 불러 위로해 줌으로써 재앙을 물리치고자 했었는데 이를 별여제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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