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
  • 2. 독전과 비판
  • 독전과 선전
  • 독전과 적개심의 표출
심경호

전근대시기에는 독전을 위해 한문 산문의 다양한 문체를 활용하였다. 1419년 이종무(李從茂)의 대마도 정벌 때 어변갑(魚變甲, 1380∼1434)이 세종을 대신하여 작성한 「정대마도교서(征對馬島敎書)」는 대외 전쟁에서 적국을 정벌하는 정당성을 선포한 명문이다.

왕은 말하노라. 무력만을 일삼는 것은 성현이 경계하신 바이지만, 죄를 성토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제왕의 부득이한 일이다. 옛적에 성탕(成湯)이 농사를 버리고 하(夏)나라를 쳤으며,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6월에 험윤(玁狁)을 쳤으니, 일이 비록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모두 죄를 성토하기 위하여 거사한 것은 같았다. 대마도라는 섬은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다만 막혀 있고 궁벽하며 협소하고 척박한 곳이므로 왜노(倭奴)가 웅거하도록 허용했던 것뿐이거늘, 감히 개처럼 도둑질하고 쥐처럼 훔치는 흉계를 품어서, 경인년(1410)부터 변경에서 방자하게 함부로 날뛰기 시작하여 우리 군민(軍民)을 살해하고, 우리 백성의 부형을 포로로 하며, 가옥을 불태워서 고아와 과부들이 바다의 섬 속에서 울고 헤매지 않는 해가 없으니,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이 팔뚝을 걷어붙이며 분통이 터져서, 놈들의 살을 씹어 먹고 놈들의 살가죽을 깔고 자려고 생각한 지 몇 해가 되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용이 하늘을 나는 천운에 부응하여 위엄과 덕을 사방에 입히어 신의로 무마하고 편안하게 하였으나, 흉하고 탐내는 버릇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여 병자년(1396)에 동래에서 우리 병선 20여 척을 약탈하고 군민을 살해하였다. 내가 대통을 이어 즉위한 이후에도 병술년(1406)에는 전라도에서, 무자년(1404)에는 충청도에서, 배에 실은 양곡을 빼앗아 가거나 병선을 불사르고 만호(萬戶)까지 죽였으니 포학이 극도에 달하였고, 두 번 제주(濟州)에 들어와서 살상한 것이 또한 많았다. 이것은 남의 재물을 탐내는 악독한 짐승이 간교한 생각만 품고 있어서 그런 것이기에 신명(神明)과 사람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죄악을 용서하여 따지지 않고, 굶주린 것을 진휼했으며, 통상(通商)도 허락하는 등 무릇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모두 다 들어주어 함께 살아갈 것을 기약하였는데, 뜻밖에 또 이제 우리의 허실을 엿보고 몰래 비인포(庇仁浦)에 들어와서, 인민 300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며 병선을 불태우고 장사(將士)들을 살해하고, 황해에 배를 띄워 평안도까지 이르러 가서 우리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하고 장차 명(明)나라의 국경을 범하려 하였으니,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고 천상(天常)을 패란(悖亂)한 것이 어찌 심하지 않은가. 나는 인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녀서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잃으면 오히려 천지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지금 왜구(倭寇)가 제 마음대로 탐욕과 해독을 부리고 백성을 살육하여 스스로 하늘의 앙화를 부르니, 그래도 참고서 정벌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겠는가. 지금 농사철을 맞아 장수를 명하고 군사를 내어 죄악을 치는 것이 또한 부득이한 일이다. 아, 간흉을 쓸어버리고, 인민의 목숨을 물과 불 같은 위급한 처지에서 건지고자 이렇게 이해(利害)를 열거하여 내 뜻을 신민(臣民)에게 알리노라.274)이 글은 『동문선(東文選)』 권24에 실려 있다. 『함종세고(咸從世稿)』에는 「정대마도교중외대소신료한량기로군민등서(征對馬島敎中外大小臣僚閑良耆老軍民等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 “대마도라는 섬은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다만 막혀 있고 궁벽하며 협소하고 천박한 곳이므로 왜노(倭奴)가 웅거하는 것을 들어주었던 것뿐인데, 이에 감히 개처럼 도둑질하고 쥐처럼 훔치는 흉계를 품었다.”라는 주장은 대마도 부속 문제에 중요한 근거를 제기해 주는 자료가 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상소의 형태로 독전의 내용을 담은 예를 하나 제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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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 지도
정족산성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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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원(李是遠, 1790∼1866)은 병인양요 때 아우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순절한 지사다.275)황현(黃玹), 『매천야록(梅泉野錄)』 권1 상. 1866년(고종 3) 9월에 선교사를 구출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우리나라에 왔던 프랑스 군대는 서울을 공격하기 어렵게 되자 7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조선 조정은 정규군 600명, 강화 수비대 6,000명, 연해에서 동원한 2∼3만 명 병력으로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에 다시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였다. 이때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정족산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것을 발판으로 프랑스 군대를 퇴각시켰다. 그보다 앞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자 강화 유수 이하 대부분의 관원들이 달아났고 성은 함락되었다. 77세의 고령이던 이시원은 이질을 앓고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유소(遺疏)를 쓰고 들것에 몸을 실어 선영에 하직하였다.

내가 이곳에 세거하였으니 옛날의 향대부(鄕大夫)에 해당한다. 어찌 일시의 벼슬에 견주겠는가. 이미 늙고 병들어 친히 북을 울리며 의병을 모아 적을 없애 보국할 수 없는 마당에 어찌 난을 피하여 살기를 구할 수 있겠는가. 오직 죽음만이 내 마음을 밝힐 수 있을 뿐이다.276)『이건창 전집(全集)』 하, 「조고증시충정공부군묘지(祖考贈諡忠貞公府君墓誌)」

둘째 아우 이지원도 같이 순절하겠다고 하였다.277)심경호, 『강화학파: 실심 실학의 계보』, 돌베게, 2006, 강화학 제5기 이시원 참조. 이시원은 김포의 임시 거처로 나가서 「강도성이 함락된 뒤 짓다(城陷後作)」라는 시를 지어 자결할 뜻을 더욱 분명하게 밝혔다.278)이시원, 『사기집(沙磯集)』 책2, 「성함후작(城陷後作)」(병인 9월).

첫째 수

장강(한강)의 요새를 방어하지 못해 내성이 텅 비어 / 長江失險內城空

궁전(강화 행궁)에 비린 먼지가 허공에 가득하다 / 宮殿腥塵積氣中

어진(어용)이 파월(播越)하는 것을 어이 말하랴 / 忍說御眞播越路

흐느끼는 시골 늙은이의 눈물이 가슴팍을 적시네 / 呑聲野老淚霑胸

셋째 수

한번 죽음이 백만 군사보다 나은 법 / 一死勝於百萬兵

동래성에선 왜놈들이 송공(송상현)을 두려워하였지 / 萊城倭慴宋公名

몸이 귀신 되어 적을 섬멸하리니 / 身爲厲鬼能殲敵

일곱 자 몸이 새털보다 가볍다 말하지 마라 / 莫道鴻毛七尺輕

이시원은 자결하기 전에 구국의 시책을 건의하는 소(疏)를 적었다.279)이시원, 『사기집』 책3, 「유소병인구월(遺疏丙寅九月)」. 같은 상소문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청치(淸治)』의 권두에도 실려 있다. 『청치』는 19세기 말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올린 척사소(斥邪疏)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모은 책이다. 편자나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892년(고종 29)에 올린 상소문이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에 편집된 것으로 추정된다. 1866년 9월에 이시원이 지은 상소문을 비롯하여 모두 28건의 상소와 계문(啓文)이 수록되어 있다. 곧, 이시원을 비롯하여 호조 참판 최익현(崔益鉉), 경기 유생 이행규(李行逵), 충청도 유생 한홍렬(韓洪烈), 영남 유학 김진순(金鎭淳) 등의 척사 상소(斥邪上疏), 전라도 유생 이태우(李泰宇) 등의 만인소(萬人疏), 이만손(李晩孫) 등 영남 유생들의 지정척사소(持正斥邪疏), 강원도 유생 홍재학(洪在鶴) 등의 지정척사소 등 전국 유생들의 척사 상소와 이에 대해 참판 김홍집(金弘集), 대사헌 한경원(韓敬源) 등이 올린 인혐 상소(引嫌上疏)가 함께 실려 있다. 척사 상소들은 구한말에 외침에 저항하는 독전(督戰)의 뜻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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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순절도 세부
동래부사순절도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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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듣자니 옛사람이 “난리가 많으면 나라를 일으키고, 큰 근심이 있으면 성군을 계발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적국이 바깥에서 환난(患難)을 끼치지 않는 나라는 언제나 망하기 마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는 서양 선박이 우리나라의 중흥의 기회가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재상 가운데는 독서인이 많고 조정에는 무신이 충분하므로, 외적의 침략을 막고 적의 선봉을 꺾는 계책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영명하시고 특출한 성군의 자질을 지니셨으니 적절한 사람을 얻어 특별히 위임하시면 난리를 평정하고 올바른 상태로 되돌리고 비린내를 말끔히 씻어버리는 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신은 또 책에서 읽기를 “경건함이 태만함을 이기는 자는 길하고 태만함이 경건 함을 이기는 자는 멸한다.”고 하였고, 『논어』에는 “씀씀이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다스림의 도리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저러한 많은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힘써 실천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신은 감히 스스로를 사어(史魚)의 시간(尸諫)에 견주지는 못하겠습니다만, 미나리를 바치고 햇볕을 바치는 그런 충정이야 어찌 없겠습니까. 부디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생각 하나, 사려 하나, 시책 하나, 법령 하나라도 반드시 경건함과 태만함의 분별을 참작하시고,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함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으소서. 선왕이 이룩한 헌장(憲章)을 거울 삼으시고 성학(聖學)을 밝혀 인정(仁政)을 행하신다면 온 우리나라 안의 수많은 백성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진심으로 따라서 적을 분개하는 충성과 올곧은 절개와 바른 기운이 우주를 한껏 뻗쳐 올리게 되리니, 그러면 바깥에서 오는 사악함과 더러움이 어찌 감히 맑디맑은 하늘에 요사한 무지개를 드리우겠습니까. 부디 성명께서는 깊이 맑게 성찰하시옵소서. 신은 피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우려와 분노 때문에 절박하고 무너질 것만 같아 견디기 어렵나이다.

전근대시기에 전쟁을 다룬 시가 문학도 적개심을 절실하게 표출하였다. 박인로(朴仁老, 1561∼1642)의 「선상탄(船上歎)」과 「태평사(太平詞)」는 전쟁 가사의 대표작이다. 박인로는 왜적이 물러간 뒤인 1605년(선조 38) 45세 때 통주사(統舟師)로 진동영(부산)에 부임하여 「선상탄」을 지어 적개심을 토로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2년이 지나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뒤를 이었고, 조선과 일본은 화친(和親)을 맺고자 교섭이 잦았던 때였다. 「선상탄」의 서사(序詞)에서 박인로는 “긴 칼을 비스듬히 차고 병선에 굳이 올라가서 기운을 떨치고 눈을 부릅떠 대마도를 굽어보니, 바람을 따르는 노란 구름은 멀리 또 가까이 쌓여 있고 아득한 푸른 물결은 긴 하늘과 같은 빛이로구나.”라고 하였다. 무인의 기개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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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란도(壬辰戰亂圖)
임진전란도(壬辰戰亂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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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本詞)에서는 “때때로 머리 들어 임금님 계신 곳을 바라보며 시국을 근심하는 늙은이의 눈물을 하늘 한 모퉁이에 떨어뜨린다.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의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에 뒤떨어지랴마는,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왜적의 흉악한 꾀에 속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고서 그 백분의 일도 아직 씻어 버리지 못했거든, 이 몸이 변변치 못하지만 신하가 되었으니 영달하지 못해서 임금님을 못 모시고 늙는다 한들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스런 마음이야 어느 시각인들 잊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충군애국의 정이 절절하다.

외세에 대한 저항 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시들은 구한말에 집중적으로 출현하였다. 의병 항쟁가나 구국 충절가의 한시들은 애국 가사, 우국 가사, 항일 민요와 함께 특히 왜적에 대한 저항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이 시기의 시 가운데 하나로 박정수(朴貞洙)의 「추풍고(秋風高)」를 들어 본다.280)『의사삼융원공을사창의유적(義士三戎元公乙巳倡義遺蹟)』, 한말 의병 자료집(韓末義兵資料集), 한국 독립 운동사 연구소, 1989년 영인. 박정수는 을미의병 때,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병진(湖佐義兵陣)에서 원용석(元容錫)과 함께 중군으로 있으면서 원주·제천·단양을 거점으로 활약하였다. 박정수는 1905년 9월 원주에서 붙잡혀 이호(梨湖)를 건너 서울로 압송되는 원용석을 전송하면서 이 장가(長歌)를 지어 민족의 앞날에 대한 불안감과 외적에게 나라를 파는 권귀(權貴)들에 대한 적개심을 강렬하게 표출하였다.

가을바람이 회회 불고 한강물 차건만 / 秋風高兮冽水寒

떠나는 그대를 보내노니 어느 때나 돌아오랴 / 送君去兮幾日還

물결 날름거려 조각배는 흔들흔들 / 波搖搖兮舟不定

그대 도리어 웃어 보이니, 그 기운 씩씩하도다 / 君笑語兮氣桓桓

에워싼 관솔 불빛은 황황하고 / 擁火城之煌煌兮

적의 검 빛은 번뜩인다 / 閃賊鋒之光芒

나는 소매를 뒤집어 흐르는 눈물을 닦네 / 余反袂兮淚漣洏

그 누가 이 마당에 한숨 짓지 않겠는가 / 孰不爲之歔欷

한스럽다, 열사가 한 목숨 가벼이 여겨도 / 嘆固烈士之輕生兮

하늘은 어찌 우리나라를 돌아보지 않으시는지 / 天盍眷顧夫吾東方

의사를 결박하여 시랑 떼에 던져 주거늘 / 束縛義士而納之豺狼兮

내 속마음이 어떠하랴 / 抑胡然於心腸

훈귀(勳貴)들 하는 잘난 짓이라는 것이 / 云是勳簪之冏所爲兮

다투어 호랑이 앞 창귀(倀鬼) 되는 일이라니 / 甘心爭作虎前倀

국시(國是)가 전도됨은 자고로 이렇다만 / 國是顚倒自昔然兮

만고에 이보다 애간장 끊는 일 어찌 있으랴 / 萬古安有此斷腸

하늘에다 지극한 원통을 호소하나 / 訴穹旻以至寃兮

만 리 높이 긴 하늘은 막막하기만 하네 / 邈然萬里一長空

긴 노래가 통곡보다 더 애절하나니 / 長歌甚於痛哭兮

슬픔과 한을 이 속에다 얽노라 / 悲與恨繃其中.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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