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
  • 2. 독전과 비판
  • 독전과 선전
  • 포상을 위한 장계
심경호

과거에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하여 포상(褒賞)의 기제를 활용하였다. 한 지역의 안보를 책임지는 관리는 장계(狀啓)를 이용하여 수시로 포상할 대상을 올렸다. 한 예로,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 전라 감사 김주(金澍, 1512∼1563)의 「전주 부윤 이윤경의 전공을 적어 올 리는 장계(全州府尹李潤慶戰勳狀)」를 들 수 있다.281)『명종실록』 권18, 명종 10년 6월 1일(갑자) 「전주부윤이윤경전훈장(全州府尹李潤慶戰勳狀)」 : 심경호 옮김, 『역주 우암 김주 문집(寓庵金澍文集), 시간의 굴레, 2005, 268∼269쪽. 이윤경(李潤慶, 1498∼1562)은 전주 부윤으로서 영암성(靈岩城)에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그 공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하였으며, 1560년에는 병조 판서가 되었다.

왜적들이 달량(達梁, 전남 해남의 포구)에서 성을 함락시킨 뒤부터 승승장구하자, 우리나라의 인심이 어수선하여 두려워하기만 하고 나가서 싸우려고 하지 않아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만 흩어져 물러서려고 하므로 사세가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전주 부윤 이윤경이 군사 3,000여 명을 거느리고 영암에 진을 치고 지키면서 명령이 분명하고 은혜와 위엄을 다 같이 보이므로 성에 있는 군졸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호응하며 의지하여 믿었습니다. 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이 나주(羅州)에 이르러, 형을 명령으로 통제하기는 어렵겠다고 여겨 영암으로 공문을 보내어 성을 나오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윤경은 “국가의 후한 은덕을 받았으므로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해야 하니 의리상 나갈 수 없다.”라고 답하고서 그대로 영암에 있으며 군사를 진정시켰습니다. 왜적들이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장차 성을 포위하려고 하자 성 안의 장사(將士)들이 서로 돌아보며 기색을 잃어 적을 부술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윤경이 앞장서서 의리를 주창하며 정병을 선발해서 방어사와 함께 힘을 합쳐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아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습니다. 대체로 방어하고 포획한 공은 오직 이윤경이 제일입니다.

조선 조정은 삼포 왜란(1510), 사량진 왜변(1544) 등 왜구들의 행패가 있을 때마다 이에 대한 제재 조치로 그들의 세견선(歲遣船)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왜구는 1555년에 배 70여 척으로 전남 연안 지방을 습격하여 먼저 영암과 진도(珍島)의 여러 보루를 불태우고 만행을 저질렀고, 장흥(長興)·강진(康津)에도 침입하였다. 이를 막던 전라 병사 원적(元 績)과 장흥 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 등은 전사하고, 영암 군수 이덕견(李德堅)은 사로잡혔다. 이에 조선 조정은 이준경을 도순찰사(都巡察使), 김경석(金景錫)과 남치근(南致勤)을 방어사(防禦使)로 삼아 왜구를 토벌하여 영암에서 크게 무찔렀다. 이때 이준경이 전라도 순찰사가 된 것은 바로 김주의 장계에 의한 것이었다. 왜구가 물러간 뒤에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 사죄하고 세견선의 부활을 거듭 요청하자 조선 조정은 세견선 5척을 허락하였고, 세견선 파견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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